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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21:12-17
강설날짜 2017-06-25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다(1))(마21:12-17)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노라”고 하시면서 당신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특히 세 번에 걸쳐서 당신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감당하시기 위해서 열두 제자를 선택하시고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를 선택하신 후 기업처럼 경영을 하지도 않고, 사교 클럽으로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명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예수님은 몸소 말과 행동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지팡이교회에서 주님의 부르심으로 함께 공동체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입니다. 함께 신앙 생활하는 공동체 위에 삼위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지난 주의 말씀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당신님의 고난과 죽음을 위해서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다는 강설로 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올 것을 오랫동안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입성을 마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소동’이라는 단어의 의미에는 ‘지진’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마치 지진처럼 예수님의 예루살렘의 입성은 엄청난 힘처럼 흔들어 놓았다라고 기록을 한 것입니다. 그 동안 예수님은 당신님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의 때가 무르익기 시작할 때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기 위해서 ‘나귀’를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들에게 맞은편 마을에 가서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나귀를 데리고 올 수 있도록 주인의 마음을 준비시켜 주셨습니다. 그 말씀은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구약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슥9:9절은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고 하신 것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나귀’위에 예수님이 앉을수 있도록 겉옷을 사용하여 안장을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입성을 할 때 모두가 알 수 있도록 지진과 같은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소동의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면서 찬송도 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호산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로 그들에게 있어서는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그리고 군사적인 통치자 예수님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하여튼 예수님의 입성은 놀랄 정도였습니다. 이런 광경을 보고 있는 무리 중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군중을 선동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면서 병행본문인 막19:39절에서 제자들을 책망하여 금하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말을 들은 예수님은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가까웠다는 것을 더욱 확인하여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당신님의 고난과 죽음의 결과로 “부활”하심으로 바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한 사랑과 긍휼 그리고 자비가 있는 섬김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구약의 말씀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메시야’로 이스라엘을 회복함으로 그 어떤 민족도 넘보지 못하는 강력한 나라로 만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섬김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성전을 깨끗하게’하십니다. 왜 이렇게 하셔야 하는 것입니까?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장소입니다. 또한 거룩한 곳이고, 그곳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장소입니다. 다윗은 성전의 의미를 알기 때문에 시편11:14절에서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사실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의미로서의 성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즉 땅에 세워진 보이는 성전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는 의미로 즉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리신 방법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고 있다는 것을 엡2:21절은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라고 하십니다. ‘서로 연결하여’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성도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값없이 구원을 받은 자로서 새로운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성전이 되었다는 것은 엡2:21절에서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하심으로 성전이 자라간다고 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구약이 말씀하고 있는 성전처럼 건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세상에는 건물로서 성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전은 하나만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약 성경에서는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이루신 그 공동체가 교회고 성전인 것입니다. 오늘 지팡이교회가 “영과 진리”로 예배하기 위해서 예배당에 모이는 행위가 교회로써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건물이 교회이고 우리가 여기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 된 신앙의 고백을 하는 공동체인 우리가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는 두 가지로 이야기 하기도 합니다. 지금처럼 모이는 교회로 영광을 올려 드린 후, 세상으로 나아가 흩어져 있을 때도 교회라고 합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시민권자로 생활하는 모든 곳에서 하나 된 신앙고백을 하는 우리가 교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이제 이 교회인 공동체가 어떻게 자라 가는가 하는 것을 우리한테 이야기해 줍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우리 가운데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과거나 오늘이나 미래에나 당신님의 백성의 공동체 안에서 교회를 세워 나가시는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재림의 주로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지는 과정을 의미하는 말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성전을 건축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시면 우리는 그분과 함께 지어져가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전은 이 세상에 유일하게 하나뿐인 성전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분들이 눈에 보이는 예배당이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당신님의 공동체에 성전을 지어가신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나는 정결한 마음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뿐인 성전 건축에 동참한 교회 공동체는 교회 공동체다운 모습으로 드러내는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를 알리기 위해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면서 나귀를 타시고 당신님이 당해야할 사건만이 아니라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루살렘이 갖는 특별한 의미를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가야할 곳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전에 맨 처음으로 가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아주 특별한 곳이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거처요 당신님의 백성에게 복된 통치가 베풀어지고 있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곳이면서 섬김이 있는 거룩한 곳입니다. 이런 영광스럽고 거룩한 성전에서 예수님은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성전에 들어가셔야 했던 것입니까? 슥14:21절을 보시면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가져다가 그것으로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가나안 사람(이방인) 즉 상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은 사업상으로 거룩함을 더럽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3:1절은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성전의 주인이신 메시야가 오심으로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에서 영광을 올려드리는 목적과 기능을 잘 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성전이 이상하게 변질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전에서 제사를 하고자 먼 거리에서 오는 사람을 위해서 재물용 동물을 파는 습관에서 타락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좋은 제도로 허용된 관행이었습니다. 신14:24-25절의 내용을 생각을 해보면,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짐승을 가지고 갈 수 없는 자들을 위해서 돈으로 바꾸어 가지고 가서 소나 양이나 포두주 등으로 구입해서 드릴 수 있도록 허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시대적인 상황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모든 유대인 성인 남자는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야 했습니다. 정확한 분량을 내기 위해 상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두로 동전으로 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로마나 헬라 동전을 가진 자들은 동전을 바꿀 필요가 있었습니다. 또 제사하기 위해서는 흠 없는 제물을 구입해야 할 필요도 있었습니다. 상인과 협력하여 종교지도자들은 막대한 이득을 챙겼습니다. 멀리서 제사하러 온 사람들의 제물들은 불합격 시키고, 그들이 시장에 내다 판 것을 다시 사들여 합격품으로 비싼 값에 되팔았습니다. 구약에서 허용된 것은 성전 안이 아니라 성전 밖에서 거래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는 “이방인의 뜰”에서 자신들의 이익만 챙긴 것입니다. 이방인의 뜰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장 외곽에 위치한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아직 할례를 받지 못한 자들이 있을 수 있는 공간입니다. 바로 이곳에서 성전의 청결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는 것은 당신님의 다가올 심판을 경고하는 메시지로 늘 청결한 마음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13절에서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이 말씀은 사56:7절에서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그리고 렘7:11절을 인용한 것으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왜 예수님은 이사야와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한 것입니까? 이사야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맥을 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성전에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책망으로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바르게 기도하고 예배하지 않는 일에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말씀은 성전 안에서 ‘도둑의 소굴’이라는 의미로 예수님은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라고 하는 것은 개인적인 영리를 목적으로 장사를 하고 속이는 행위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래 성전의 의미가 가지고 있는 목적과 기능을 상실한 것에 대한 책망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당에서 테크닉에 몰두한 교회를 보면 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예수님께서 성전 청결을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성전을 처음으로 만들기 시작한 다윗 왕 시대부터 결국 다음 왕인 솔로몬에 의해서 건축하게 됩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봉헌하면서 성전의 목적과 기능에 대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왕상8:29-30절입니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 주의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30.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이 말씀을 요약하면 성전은 기도하고 간구하는 장소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사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사실 솔로몬의 성전 기도에서 유대인만이 아니라 41절에서 “또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 속하지 아니한 자 곧 주의 이름을 위하여 먼 지방에서 온 이방인이라도”라고 하심으로 결국 이방인에게도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단지 유대인에게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56:7절 말씀에서 온누리에 이방인에게도 개방될 것이고 메시야를 통해서 성취될 것을 예언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유대인이 생각하는 성전의 개념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교회의 개념인 건물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기도하는 자들이 어떤 마음으로 기도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님의 백성을 위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시고 참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나 된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에서 강도의 소굴이 되어 가는 것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자 하는 이방인 뜰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나님의 임재와 긍휼이 임하는 기도의 집에서 범죄를 하는 것은 주님이 세우신 교회를 짓밟는 것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전이나 오늘날의 예배당에서 기도하고 예배하면 안전하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외식하는 자들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운 악한 자라는 것입니다. 과연 성전이 안전하게 해 줍니까? 예배당이 안전하게 해 줍니까?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기도하고 간구함으로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7:11절에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이 있다고 하면서 나는 안전하다고 하면서 도둑의 소굴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대한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방인의 뜰에서 상업적인 장사를 하는 자들을 내쫒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사56:8절을 성취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시는 주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미 모은 백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모독하는 사람들을 꾸짖어 내어 쫓으시고, 본래의 목적과 기능을 회복할 수 있도록 성전청결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아들이시고 이미 모은 자신의 백성 이외에 이방인들도 모아들이셨습니다.

 

지팡이교회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자신의 기도와 간구를 골방이든 어느 장소이든지 하나님께 나아가 죄를 구하고 죄를 용서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나는 다시 관계성을 회복됨으로 “영과 진리”로 영광을 올려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예배를 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구약의 모든 예언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제사장이실 뿐 아니라, 완전한 제물이 되어서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우리는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집’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이 건물이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마24:1-2절에서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2.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그들은 예수님께 마26:61절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라는 말씀을 보면 기도하는 집을 건물로만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성전청결을 하셨는지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권력을 위한 것으로만 생각한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말씀처럼 마27:50-51절에서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51.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당신님의 몸이 성전의 실체라는 것을 알리신 것입니다. 그런 후 A.D 70년에는 성전 건물을 로마 군인으로 하여금 완전히 파괴하십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이제 참 성전 되신 예수님 안에서 누구든지 어디서든지 하나님께 나가 기도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성도는 예배당을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교회란 무엇인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이용하여 세상적인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심으로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 자들이 오히려 죄가 쌓여서 이제는 하나님께 반역을 한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회개를 촉구했지만, 예수님 당시는 회개를 촉구할 선지자나 종교지도자들도 없는 시대였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욕심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예수님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심으로 지도자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백성이 된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답게 생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성전을 더럽히고 복 받기만을 바라는 것은 그 시대나 오늘의 시대나 “도찐개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그리고 교회가 타락한다 할지라도 지팡이교회는 성전을 건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예배당을 건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는 백성들의 공동체가 성전이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바로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하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증인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증인자만 되는 것이 아니라 참 성전이신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모습을 갖출 수 있도록 늘 기도하는 집,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죄로 가득한 것은 강도의 소굴이 됨으로 결국은 영원한 심판을 받습니다. 영원한 심판을 당하지 않도록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성전의 목적과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오직 주님만 바라봅시다. 우리는 겸손의 왕이신 예수님을 모신 성전으로서, 주님의 성품을 잘 드러내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생각하면서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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