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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장원 목사
성경본문 고전4:1-5
강설날짜 2017-08-13

무더위가 계속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름도 그리 길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제 가을이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월요일이 입추(立秋) 라는 절기였습니다. 항상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를 지켜주시고, 만나게 하시고, 성숙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함께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1절에서 고린도교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무엇에 대한 말씀입니까? 곧 우리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강조하여 명령법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는 사람들이 우리를 그렇게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과, 다음 우리 스스로 우리를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마디로 말하자면, 곧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을 바라보는 세상의 인식은 어떻습니까? 기독교, 혹 기독교인을 떠 올렸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무엇입니까?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것이 더 많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만큼 오늘의 교회가 교회 본래의 정체성으로부터 이탈되어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이기 때문에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진술은 결국 교회를 이루는 개개인에 대한 부정적 진술의 누적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말씀에 근거해 생각해보면, 오늘날 한국교회와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김 받지 못하고 있다”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사 초기의 기록을 보면, 기독교인들을 바라보는 몇 가지 시선이 나와 있습니다. 대한그리스도인회보 1893년 3월 1일자 기록을 보면, 조정에 뇌물을 바치고 원님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이 평안도 지역에는 가지 않겠다고 하소연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실은 이렇습니다. 몇 만 냥씩의 뇌물을 바쳐 어렵게 원님 자리를 차지하여 이제는 자신이 투자한 금액보다 더 많은 금액을 고을 사람들로부터 빼먹어야 할 텐데, 도통 기독교인이 많았던 평안도 지역 사람들은 원님에게 순순히 뇌물을 바치지 않으니 아무도 그 마을에는 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독교인들이 적은 경상도 외곽 지역으로 자신을 보내달라고 하소연을 합니다. 이 기사를 통해 우리는 기독교인이 많았던 평안도 지역에서는 원님들이 요구하는 부당한 일에 협조하지 않은 기독교인이 많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감옥에 갈지언정 부정한 일에 협력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이 기사처럼, 초기 한국교회 구성원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불의와 부정과 결별한 사람들, 정직하며 옳은 것에 목숨을 건 사람들이라는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초기에 이렇게 좋았던 평가가 1920년대를 넘어가면서부터 부정적으로 많이 바뀌었습니다.

 

한국교회사에서 1920년대는 매우 중요한 전환의 시기이었습니다. 1920년을 기점으로 한국기독교는 현실 참여적 종교에서 내세 지향적 종교로 전환을 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말씀을 깊이 있게 공부하던 사경회(査經會) 문화가 사라지고, 열광적인 종교의식으로 치장된 부흥회 문화가 등장합니다. 내세 지향적 종교로 전환한 한국교회는 결국 1930년대 이후부터는 일제에 협력하게 됩니다. 특히 1938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에서는 신사참배를 결정하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물론 불교와 가톨릭은 벌써 기독교의 변절 이전에 이미 일제와 손을 잡았습니다. 그나마 끝까지 일제와 긴장관계를 유지했던 곳이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끝내 교회도 변절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교회가 변절하게 되었는지를 질문하게 됩니다. 고난이 무서웠기 때문일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변절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지켜야 할 것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목사와 장로를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지키고자 하였고, 교회는 재산을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지킬 것이 생긴 이후부터 교회도, 신앙인도 모두 현상유지 적 입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교회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며 살아내는 것, 역사의 심판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를 신실하게 살아내는 것이 아닌 단지 교회당 그 자체를 지키는 것이 목적이 되어버린 한국교회는 그때부터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주기철, 한상동 목사를 비롯한 소수의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교회를 지킨다는 명목 하에 일제와 손을 잡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한번 타락한 교회는 이제 자연스레 타락한 종교가 되어버렸습니다. 한번 타락하기가 어렵지, 한번 타락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타락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집니다. 일제와 손잡은 교회는 이제 그 대상을 바꾸어 당대의 가장 강력한 세력과 연대하는 기관이 되어버렸습니다. 특별히 해방이후 3년간의 미 군정 기간과 이승만의 12년간의 통치기에 기독교는 가장 밀접하게 권력과 짝하여 지내며 많은 특권을 누렸습니다. 미 군정 시절에는 성탄절이 국가공휴일이 되었고 (초파일은 1975년부터 국가공휴일, 현재 성탄절을 휴일로 하는 아시아 국가는 가톨릭국가인 필리핀과 한국뿐이다), 주일날마다 서울방송에서 예배를 실황중계 해주었습니다. 일제가 남기고 간 많은 적산들을 교회와 기관들이 양도 받기도 하였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1951년 2월에는 아시아 국가 최초로 군목을 임명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군인들이 불교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군대에서의 종교행사는 기독교 예배 외에는 없었습니다. 아무리 불교신자라 하더라도 종교행사에 참여하고 싶다면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때 개신교는 군대를 황금어장이라 불렀습니다. 엄청난 신자가 자연스럽게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참고로, 불교 법사가 군종장교로 뽑힌 것은 1968년으로 그 이유는 불교신자가 많은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하에서 개신교는 절대 권력과 짝하여 최고의 특혜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교회는 그 본질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의 비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순종함을 통해서만 살아가야 하는 신앙인의 본질을 망각한 채 절대 권력과 짝하고 거대한 집회를 통해 신자들을 찍어내는 방식으로 부흥한 한국교회는 자신의 정체성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가 오늘의 한국 교회입니다.

 

거대한 몸집과 무시할 수 없는 권력을 지니고 있지만, 세상의 시선은 부정적이다 못해 냉소적입니다. 목사를 먹사라 부르고, 기독교를 개독교로 부르고 있습니다. 정체성을 상실한 우리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고 있으며,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기도 전에 먼저 무수한 사람들이 교회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교회는 지금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은 분명합니다. 정체성을 바르게 회복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비밀을 맡은 자로, 십자가의 비밀을 살아내는 자로 존재하는 것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정체성 인식에 있어 외부에서의 규정보다 중요한 것이 우리 자신이 내리는 규정입니다. 특별히 1절에서 바울은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하나님의 신비로운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부름 받은 그리스도의 종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 하나님의 신비로운 방식은 십자가의 길을 가리킵니다. 십자가의 길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시고, 그의 백성을 모으시는 하나님의 방식은 매우 특별하고 숨겨진 신비로운 지혜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방식으로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방식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자들을 부르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하고 깨닫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의 통치자들은 하나님의 그 신비로운 구원역사를 수용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들이 자신을 낮추어야하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신앙은 이성으로의 수용을 뛰어넘어 삶으로 수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방식을 신비롭다 말한 것은 그것이 일반 인간 이성이 기대하던 것을 전복시키는 방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 성경 전체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방식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많고 많은 민족 가운데 가장 약하고 보잘것없는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것(신 7:7), 하나님께서 절대 권력자들과 사회지도층이 아닌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동맹을 맺으신 것, 멋지고 늠름한 장자 엘리압이 아닌 부모가 볼 때에도 사무엘에게 선 보일 자는 아니었다고 판단한 다윗을 왕으로 부르신 것, 권문세가의 집안에서가 아닌 갈릴리 촌구석 나사렛 집안에서의 메시아의 탄생, 예수가 선택하신 제자들,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방식 등 하나님의 역사 섭리 방식은 우리의 기대와 상상을 매번 초월하거나 뒤집어엎고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메시아가 태어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장소는 어디입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을 선택하신다고 할 때 어떤 사람들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들의 사고에 근거하면, 하나님은 당연히 가장 호화로운 왕궁과 어울립니다. 예수님께서 초라한 집 안에서 태어나 마구간에 뉘였다는 것은 신이 어디에 계실까 라는 사람들의 생각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답변들을 뒤집어엎은 사건입니다. 제자를 선택하신 것도, 십자가의 죽음을 짊어지신 것도 인간의 일반적인 생각, 상식적인 사고를 뒤집어엎은 사건이었습니다. 그 놀라운 반전에 사람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자들이 있으니 바로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방식을 설명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자들입니다. 바울은 1절에서 우리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신비로운 구원방식을 설명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그리스도의 종으로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2절에서는 종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의무 한 가지를 알려줍니다. 바로 주인에게 신실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개역성경의 충성이라는 말은 신실하다는 말입니다. 이 신실함, 충성은 갈라디아서 5장 22 - 23절을 나오는 성령의 9가지 열매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께 신실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한다는 말입니다. 즉, 믿음, 신실함, 충성은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할 때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나님에 대한 충성이 그의 백성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보통 고전 4:2을 직분자 임직예배 때 많이 인용합니다. 그러면서 충성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기억해야할 것은 누구에 대한 충성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일하도록 하신 그분,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온전히 충성하고자 하는 이는 그분이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그분이 맡기신 일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바르게 온전히 알지 못하면 충성해서는 안 될 존재에게 절대충성을 바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결국 자신에게 임무를 부여한 예수님을 소외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1절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은 하나님의 신비로운 방식을 전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것을 전하라고 부름 받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종이라 하였습니다. 곧 정리하자면,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종인 우리들에게 위임된 주요한 사명은 하나님의 신비로운 일하심을 말로, 삶으로 전하는 것이고, 그 일을 행함에 있어 우리가 갖추어야 할 덕목은 충성과 신실함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 안에도 충성의 대상을 분별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소위 스타목사를 하나님 모시듯 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스타목사가 무슨 행위를 해도 무조건 그를 신뢰하고 옹호하며 정당화시키고자 합니다. 스타 목사와 대척점에 서 있는 모든 자들을 사단의 무리처럼 이해하고 공격합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스타목사와 하나님은 동격입니다. 마치 스타목사가 서는 것이 하나님이 서는 것이고, 스타목사가 몰락하는 것이 하나님의 몰락인 듯 행동합니다. 너무 어리석은 분별없는 행동입니다.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논리는 이러합니다. 자신이 그 스타목사로 인해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으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지금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스타목사는 하나님의 일을 하셨는데, 그 하나님의 일을 하던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큰 복을 받으니 사단이 시기하여 하나님의 일을 무너뜨리고자 그 스타목사를 흔들고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분별력을 갖춘 자기만이라도 그 목사의 편에 서서 그를 지켜내고, 하나님을 지켜내겠다는 겁니다. 이쯤 되면, 사실 정신병적 수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의 일을 자신의 관점으로만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한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총체적 사고를 하지 못하고 단편적 사고를 하면서 자신과 다른 모든 것들을 경계하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근본주의적 사고, 근본주의적 행동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는 무수하게 많은 말씀들이 있는데, 그저 단 하나의 말씀만을 붙잡고 이것이 성경의 전부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식이 내면화되면 다른 사람의 말은 절대 들리지 않습니다. 다른 말은 모두 자기 신앙을 허물어뜨리고자 하는 사단의 음성으로 들릴 뿐입니다. 이런 자세를 갖지 않도록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과연 그 스타목사가 그로 하여금 정말 신앙을 갖도록 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그는 단연코 아니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고전 3:6-7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바울은 자신의 공로를 나열하고 자기 자랑할 수 있는 많은 기회에서도 기꺼이 자신을 낮춥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을 이해한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만일 복음을 전하고 수용하는 일이 설명하는 자의 논리성, 달변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라면 바울도 얼마든지 자신이 맺은 사역의 열매와 관련하여 우쭐하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이 전한 것은 십자가의 복음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 십자가의 복음은 사람들이 꺼려하는 것이다, 미련해보이고 어리석어 보이는 것으로서 아무도 이 십자가의 복음을 수용하고자 하지 않는다, 이 십자가의 복음은 오직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서만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인 모든 신앙인들은 결국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믿게 된 것이므로 자신이 자랑할 것은 하나도 없다 라는 것입니다. 복음전도자가, 목회자가 자신이 맺은 열매에 대해 자랑한다는 것은 어쩌면 결국 십자가의 복음을 십자가의 방식으로 전하지 않았음을 스스로 시인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십자가의 방식으로 전한 사도 바울은 자신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으며 결국은 성령 하나님께서 복음을 듣는 자들로 하여금 그 말씀을 이해하고 깨닫도록 하셔서 그들이 신앙을 갖게 된 것이라 말하며 모든 공로를 하나님께 돌리고 있습니다. 너무 멋진 지도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만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면서, 바울은 결국 한 존재에 대한 판단도 하나님의 판단 외에는 신경 쓰지 않을 것임을 선포합니다. 3절입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매우 작은 일이라 함은 중요하지 않다 이런 말입니다. 사람들의 판단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자칫 이 말은 독불장군 이미지를 풍길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뭐라 하든 나는 내 갈 길을 가겠다 라는 것은 지사적, 투사적 이미지와 함께 독재자적 이미지를 풍기는 말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바울은 자신도 자기를 판단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게 바로 지사(투사)와 독재자와의 차이입니다. 지사도, 독재자도 자신을 판단하는 자입니다. 자신이 옳은 길을 걸아가고 있다는 확신 가운데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몇 해 전, 예산안을 날치기로 통과시키면서 모 당의 원내대표가 던진 말, ‘이것이 정의다’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 혹은 타인의 판단에 따라 행동을 결정하거나 수정합니다. 특별히 사람들의 판단에 민감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내리는 판단으로 인하여 삶이 요동치는 것이 일반적 모습입니다. 낙담하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합니다.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라는 것에 스트레스 받으며 많은 시간을 허비합니다. 바울의 인생도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바울과 같이 극적인 회심을 경험한 사람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말들이 오고 갔겠습니까? 그의 가족과 친척들이 내리는 판단, 그와 함께 공부하였던 가말리엘 문하생들이 내리는 판단, 디아스포라 유대 교포들이 내리는 판단, 예루살렘 종교권력자들이 내리는 판단, 초대교인들이 내리는 판단, 야고보를 중심한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이 내리는 판단 등 바울을 둘러싼 무수한 판단들이 있었습니다. 그 판단들 상호간에 갈등도 존재하였을 것입니다. 누구는 바울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누구는 바울을 죽여야 할 존재로 평가하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판단의 기준입니다. 사람들이 한 존재에 대해 내리는 판단의 내용이 상이한 것은 결국 판단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판단 기준은 진리도, 정의도 아닙니다. 얼마나 그가 진리에 근거하여 행동하는가, 얼마나 그가 정의로운 행동을 하는가는 사람들의 관심 밖에 존재합니다. 보다 중요한 기준은 얼마나 자기가 바라는 이익에 부합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가족의 판단도 이것을 뛰어넘지 못합니다. 그가 얼마나 가족의 이익에 기여하는가를 중심으로 판단을 합니다. 조직과 기관, 관계 등 대부분의 인간 모임에서의 한 존재에 대한 판단기준이 이익에 근거합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판단을 전담하는 사법부는 어떻습니까? 사법부는 무엇에 근거하여 판단합니까? 세상법정은 지금의 세상을 유지시키는 것을 기준으로 판단을 합니다. 한 개인의 사고와 행동이 아무리 옳은 것을 지향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지금의 현 체제를 급격하게 뒤흔들거나 전복시킬 우려가 있다면 세상법정은 그 사람에게 유죄를 선고할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세상법정의 판단이 그러하였습니다. 세상법정은 공의로움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야 할 최후의 보루이며, 어디에도 하소연 할 곳 없는 자가 마지막으로 의지할 수 있는 피난처입니다. 그러나 이미 세상법정은 정치, 경제, 종교, 문화에서 권력을 획득한 자들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법정에서 선고를 내리는 자들 스스로가 사회 최상위층을 형성하고 있기에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판단을 기대할 수 없는 처지에 놓아져 있는 것입니다. 구약시대부터 줄기차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공동체에 원하셨던 핵심이 미쉬파트, 곧 사법적 정의였습니다. 사법적 정의는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의 사법부는 미쉬파트, 정의를 드러내는 곳이 아닙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판단에 있어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사람들이 나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린다고 하여 내가 옳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판단은 사람들의 판단일 뿐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판단과 사람의 판단의 차이를 잘 드러내는 것이 사무엘상 16장 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기껏 외모, 드러난 모습, 말하는 모습만을 알 뿐입니다. 중심을 볼 수도, 알 수도 없습니다. 드러난 모습을 가지고 그의 속도 그러할 것이라고 짐작하거나 믿어줄 뿐입니다. 그래서 위선자들이 얼마든지 떳떳하게 활보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얼마 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늘 한국사회에서 나름 생각 있는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하고 인정받는 이들이 자신들이 말하는바 와는 다른 삶을 그 자식들에게는 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학벌차별 없애자고 운동하시는 분도 자기 아이는 고액과외를 시켜서 일류대학을 보내고자 하고, 대안교육운동을 주창하시는 분도 자기 자신은 특목고를 보내서 유학을 시키는 등, 말과 삶이 어긋난 이들이 우리 주위에는 참 많이 넘쳐납니다. 그렇지만 그분들 주위에는 항상 수백 명 이상의 팬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말, 그분들의 글에 감동받은 사람들입니다. 참 어처구니없는 역설입니다. 말하는 자 스스로는 지키지도 않는 것에 감동을 받고, 도전을 받고 인생을 바꾸고자 애쓰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역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모릅니다. 마태복음 23장 1-3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는 자들이 예전에도 지금도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저런 인간의 말에는 귀를 막아버려’ 이럴지 모르는데, 예수님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그렇게 살지 않는다 하여 우리 또한 그들을 핑계 삼아 그들 수준으로 추락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옳은 말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듯이 경청을 하고 순종하고자 애쓰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러나 더욱 큰 강조는 뒷부분에 있습니다. 저희의 행위를 본받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저들도, 저 유명하신 분들도 저렇게 사시는데 하며 하나님에 대한 참된 순종을 팽개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외모만을 볼 수 있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중심을 갈고 닦고자 애쓰기 보다는 외모를 화려하게 꾸미고자 노력합니다. 중심이 어떠해도 외모만, 스펙만 잘 갖추게 되면 사람들이 그 사람의 속도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판단에 집중한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판단에 주눅 들거나 기고만장하지 아니하고, 매순간 하나님의 판단에 그는 존재의 가치를 다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에 집중한 바울에게 있어 지켜야 할 핵심은 중심이었습니다. 외형적으로 그가 평생 전도여행을 하고, 교회를 세우고,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친다 하더라도 그런 행위를 하는 중심이 바뀌어져 버렸다면 그는 결코 이런 말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전에는 복음 없이 살아가는 자들의 삶에 대한 긍휼과 사랑으로 사역을 하다가도 어느 순간, 사역을 통해 얻게 되는 이익을 중심으로 사역을 할 수도 있습니다. 중심이 바뀌어져 버린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경계합니다. 그로 하여금 정신 바짝 차리게 만들었던 핵심이 바로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삶, 이것이 바로 종말론적 삶의 자세입니다. 바울은 종말론적 삶을 외쳤을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가 먼저 실천하며 살았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주님 오시기 전까지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판단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여기 판단하지 말라는 것은 헬라어로 ‘크리노’ 즉 최종판단을 말합니다. 판단이라는 말보다는 심판이라는 말이 어울립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설교에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7:1). 최종적 판단은 주님이 오셔서 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모든 어두운 가운데 숨겨져 있는 것들과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서야 하나님의 정확한 판단이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을 받는 그 시점에, 하나님께 칭찬받을만한 은밀한 것을 간직해야 합니다. 은밀한 중에 행한 자에게 주실 하나님의 칭찬을 기대하며, 오늘도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 나팔 불지 못하는 것을 기꺼이 감수해야 합니다. 선을 행하는 그 순간에 더욱 발동하는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잘 잠재워야 합니다. 사람들의 판단에는 민감하고, 하나님의 판단에는 둔감한 자로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날마다 새롭게 주어지는 선물, 하루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판단에 집중하며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하는 우리의 걸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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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마지막 시대의 환난과 고난은 택함을 받은 자도.....(마24:23-41) 전은덕 마24ㅣ23-31 2017-11-26 45
62 마지막 시대의 환난과 고난의 의미(마24:15-22) 전은덕 마24:15-22 2017-11-19 49
61 어느 때에 이런 일들이 있겠사오며 전은덕 마24:3-14 2017-11-12 61
60 성전이 무너뜨려질 것을 예언하다 전은덕 마24:1-2 2017-11-05 53
59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탄식 전은덕 마23:33-39 2017-10-29 50
58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시다3(마23:25-32) 전은덕 마23:25-32 2017-10-22 9
57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꾸짖다2 전은덕 마23:13-24 2017-10-15 19
56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꾸짖다1 전은덕 마23:1-12 6
55 이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을 아십니까? 전은덕 마22:34-40 2017-09-10 69
54 사두개인들의 시험- 부활 논쟁 전은덕 마22:23-33 2017-09-03 102
53 나는 너희 중에 섬기는 자로 있느니라(눅22:14-30) 전은덕 눅22:14-30 2017-08-27 16
52 가이사...... 그러나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마22:15-22) 전은덕 마22:15-22 2017-08-20 16
»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 엘 가르디아 아카데미 대표 전장원 목사 전장원 목사 고전4:1-5 2017-08-13 70
50 혼인 잔치의 비유를 아십니까? 전은덕 마22:1-14 2017-07-30 17
49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아십니까? 전은덕 마21:33-46 2017-07-23 46
48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전은덕 마21:23-32 2017-07-16 33
47 무화과나무 사건과 기도의 능력과 응답 전은덕 마21:18-22 2017-07-09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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