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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2:42-47
강설날짜 2018-06-17

이번 한주에는 북미정상회당과 지방선거도 있었습니다. 아마도 많은 관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의 일에는 관심이 있지만 메시야이신 예수님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복음을 증거 하는 성도의 길은 귀한 것입니다. 그 길을 가는 지팡이교회 성도에게 주님의 축복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일 우리는 “베드로의 강설에 의한 사람들의 반응”에 대한 강설을 들었습니다.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할 때에 베드로는 일어나서 자기들에게 일어난 일들을 설명하였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난 사건을 사람들은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을 보고 놀라워하고 신기하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그 부분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을 자랑하지도, 너희들도 우리와 같이 ‘다른 언어로 말하고자 노력하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다른 언어’가 핵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일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부흥회와 집회를 보면 어떠합니까? 일부분이지만 ‘방언’을 받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이 진정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동고동락한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의 사생활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배신자이고, 권력자도 아니고, 유능한 언변술사도 아니었습니다. 요즘 시대로 말하면 ‘스팩’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스팩이 있으면 자신을 자랑합니다. 자신의 노력에 의한 것으로 보상을 받고자 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과 동고동락한 것을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전했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하면서 마음이 찔렸던 것입니다. 구약의 말씀을 잘 알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베드로의 강설을 들은 후 자신들이 죽인 예수님이 메시야요,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스팩도 없는 베드로는 신비한 체험으로 그들을 변화시키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논리적이고 지혜롭게 전하기만 한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알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는 복음의 종교요,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강설(설교, 선포)하는 종교입니다. 세상적인 것과 분명하게 구분되는 종교입니다. 이것을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모습을 보면 비전을 제시하면서 말씀을 교묘히 이용하여 선동하고자 하는 것은 과연 성경적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토끼와 거북이”라는 이야기를 알 것입니다. 느리더라도 거북이처럼 한 걸음 한 걸음 가는 것이 하나님의 길이라 생각됩니다. “우리가 얼찌할꼬”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계속되는 구원 메시지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사람이 회개와 세례 그리고 성령을 자신의 노력으로 받아 내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닙니다. 베드로의 강설을 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아 “우리가 어찌할꼬”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변화시키는 것입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사람이 해야 할 일’ 즉 자신이 어떻게 해서든지 받아 내야 하는 것처럼 선동합니다. 이것은 가짜인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오직 하나님이 하실 일 즉 복음을 전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면서 복음을 증거 하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베드로는 “받으라”고 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내가 받기 위해서 어떠한 노력과 행위,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나에게 주어지는 것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에게는 성령을 선물로 받게 하심으로 새로운 새 언약 백성 공동체 즉 교회에 속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은 교회는 옛 성전을 대치하는 하나님의 새 집과 새 성전이 되었으므로 믿는 자들이 성령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사람들에게 차별없이 성령이 임한 것처럼 믿는 자들에게는 동일하게 임하는 것입니다. 죄인이든, 약자이든,가난한 자이든 하나님이 부르시면 모두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전능자이십니다. 오늘날의 시대에도 베드로의 말씀처럼 “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는 것은 동일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강설을 들은 사람들에 대해서 누가는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행2:42-47절 말씀을 사용하여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라는 강설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들으십시오. 아마도 오늘 본문을 생각하면 대체적으로 “초대교회의 생활”로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저는 사도들의 가르침이 중요하게 생각되어 강설의 핵심이라고 보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교회의 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오늘날 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패역한 세대”는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패역한 세대를 개혁하고 새롭게 하고자 하는 세상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 즉 말씀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일생을 보면 그리고 예수님을 보아도 하나님이 큰 일 즉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도들은 그리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성도들은 예수님의 사역,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등을 전함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교회를 세워 나가시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강설로 사람들은 “우리가 어찌할꼬”하면서 회개을 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 후 삼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를 하였습니다. 42-47절 말씀 중에서 성도님은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당연히 사도들의 가르침입니다. 구원받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성령강림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여 회개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자신의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영원한 형벌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심으로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성도요 교회는 죄가 없다고 하심으로 구원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받은 지팡이교회는 주님의 축복을 받은 축복의 통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흥미로운 것은 초대교회의 생활을 기록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 교회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라는 단어는 건물, 교파, 예수님의 몸 등으로 사용을 합니다. 그 중에 어떤 것이 과연 바른 용어입니까? 주일이면 대체적으로 교회에 간다라고 말을 합니다. 여기서 알 것은 성경에서 건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어느 누군가가 기도를 하기 위해서 나는 기도하기 위해 교회에 간다라고 하지만 건물만이 그를 맞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어떤 사람이 나에게 당신은 무슨 교파입니까?라고 하면 대체적으로 장로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라고 말을 하지만 성경은 교파라는 의미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교파라고 물어볼 때 우리는 장로교라고 하는 것이 바른 용어입니다. 성경은 교파 즉 신학적인 진리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집단이 모인 그리스도의 몸을 보다 크게 대표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신자들이 성령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에 들어오기 때문에 우리는 ‘주와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한 것처럼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성도가 교회인 것입니다.

 

베드로의 강설로 인하여 초대교회는 수적인 증가와 함께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신자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는 일에 충실했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모습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주었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먼저 42절을 보시면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급진적이고 역동적인 변화 가운데 베드로만 사역을 감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열두 사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유심히 보시면 죄인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1:1절에서 당신님이 누구신가를 명확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의 권위에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증거와 함께 사도들이 직접 들었던 말씀들로 전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행4:1-2절을 보시면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행5:42절에서는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세상에서 들을 수 없는 진리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지상 사역을 직접 목격했으므로 복음을 가르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사람들이 입교함에 따라 신자들에게 복음이 무엇인지 가르치는 것은 매우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도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정확히 가르치고 보전하는 일에 전념함으로 주님의 “지상대명령”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교회는 이런 일을 감당하고 있는지 질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한 것은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신자들은 ‘서로 교제’했습니다. 성도가 교제를 통해서 거룩한 교회의 거룩한 모습을 잘 보여 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처럼 밀접한 단체가 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교제를 보면서 교회의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교제를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적인 교제가 아니라 사도들의 가르침을 생각하는 교제였습니다. 교제를 한 후 신자들은 ‘떡을 떼며“라는 것은 초대교회는 떡을 떼는 일에 힘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떡을 떼는 일을 일상적인 식사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주님께서 재정하여 주신 당신님의 만찬에 사용되는 단어 ”클라시스“를(눅24:35) 사용함으로 떡을 떼는 것은 성찬식을 기념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의 만찬“으로(고전11:20) 말을 하지만 누가는 ”떡을 떼며“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했던 것은 주의 만찬은 예수님께서 식사 중에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후 떡만 뗀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기도는 같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생각하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초대교회에만 한정된 특징이라 할 수 없습니다. 지팡이교회는 성경을 통하여 전달된 주의 말씀을 열심히 선포하고 보존하며,교제와 성찬 그리고 기도하기를 힘써야 하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았던 사람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43절을 보시면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 ‘두렵다’는 동사는 두려워하다. 겁내다, 놀라다, 기이히 여기다 등으로 사용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삶과 다른 모습을 보면서 두렵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고, 기이히 여기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성령의 사역에 힘입어 당당하게 교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을 본 유대인은 두려움을 감추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미 그들은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를 출교하기로 결의하였던 것입니다.(요9:22)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이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하면서 담대히 선포하며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교제하며 떡을 떼고 기도하는 것을 두려워 한 것입니다. 그리고 더 놀랐던 것은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사도들과 함께 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먼저 교회를 보면 어떠합니까? 하나님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행한 것처럼 말을 합니다. 그리고 믿는다고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믿음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일부분의 교회가 교활하고 타락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권력과 재력을 사용함으로 세상을 이기려고 하여 결국 초대교회의 모습을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누가는 44-45절에서 초대교회의 재물 공유에 대해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교회가 늘어나면서 가난한 성도를 돌보기 위해 자발적으로 재산을 기증했던 것입니다. 한 번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통용하다’ 그리고 ‘나누어 주다’라는 동사를 보면 미완료시제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자신의 재산을 모두 팔아서 공동분배를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내에 가난한 성도가 있으면 해결을 하기 위해서 신자들이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 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로서 사랑하는 법을 배웠던 것입니다. 물건과 재산 등은 성도 안에 어려운 자들을 위한 것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부인하는 것은 자기 소유가 하나님의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늘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까?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공산주의자들처럼 공동분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으로 즉 힘이 되는대로 하는 것입니다. 행4:32-5:11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재산을 공유하는 생활이 심각한 어려움에 봉착했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에 모여서 신앙 생활했던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행4:34-35절을 보시면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자발적으로 물건을 서로 통용함으로 언약의 거룩한 공교회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현상은 성령께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신 예루살렘 교회에 한정되었고 그 외 다른 지역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큰일을 하도록 하셨는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특히 예루살렘 공동체는 바울을 통해 이루어진 이방인 공동체와 이 점에서 구별되기도 합니다. 이방인 공동체에서는 결코 “유무상통”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고 오히려 사유 재산이 인정되고 있습니다.(고전11:2-22)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면 신실한 출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6절을 보시면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그들은 날마다 성전 뜰에 함께 모여 기도하고, 나누어주고, 먹고 즐거워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신자들은 성령에 이끌리어 일상생활이 얼마나 아름다운 공동체로 성장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늘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교제를 하면서 떡을 떼며 식사를 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는 표현처럼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에 속한 것을 잘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집에서’라는 표현을 조심해야 합니다. 누가는 성전에서의 모임과 집에서의 모임이 구분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집에서’가 본문에서 매우 애매한 표현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말이 ‘그들 각자의 집에서’란 의미로 표현된다면 타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떡을 떼는 것은 각 가정에서 음식을 먹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성찬과 애찬의 의미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때 넓은 공간이 있는 집을 택해서 하루 씩 돌아가면서 모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기쁨이 넘쳐 이집 저집을 돌아다니며 모임을 갖고 음식을 나누면서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날과 같은 예배당에 모인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기면서 신자들을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는 47절을 보시면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는 것입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를 보았던 사람들은 계속해서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믿는 자들이 계속 늘어났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으로부터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던’것입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믿지 아니했고,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리어 죽인 사람들이 이제는 자발적으로 찬미했던 것입니다. 초기의 모습은 이러했지만 행4장부터는 복음의 증거는 죽음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온 백성’으로부터 ‘칭송’을 받는 교회에 대해서 잘 드러내는 문서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초대 교회의 분위기는 총독이었던 ‘플리니우스’가 ‘트라얀’ 황제에게 보낸 서신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박해로 인해 비밀리에 모이는 기독교 공동체를 은밀히 조사해 본 후 ‘그들은 법 이상을 실천하는 사람들’ 이라고 보고 함으로써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윤리적 삶이 칭송 받을 만 했음을 로마의 정치가로서 입증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 충만한 성도는 세상의 법을 초월해서 생활함으로 ‘주와 그리스도’의 고백으로 생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에 빠져있었던 사람들은 참된 기쁨을 교회로부터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믿도록 하기 위해서 호감을 갖도록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상한 방법으로 믿도록 강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가장 근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는 말씀처럼 구원받는 사람을 더하게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순종의 길을 가는 것뿐입니다. 아래 그림처럼 로마 지하 묘지에 그려진 벽화를 보면 식사를 하고 교제를 나눔으로 많은 사람으로부터 칭송을 받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팡이교회는 교회의 참모습을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성도는 자발적 감사와 기쁨으로 주의 길을 가야 합니다.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성도에게 주어진 풍성한 삶을 누리며 생활하는 축복의 통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충실한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들 자신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초대교회를 세우실 때에 거기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참 교회는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을 생각하면서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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