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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5:27-32
강설날짜 2018-09-09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요.....(행5:27-32)

 

성경의 내용은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교회는 무엇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목회자는 지금 무엇을 전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까? 성경은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복음을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구원의 메시지는 이미 예수님께서 전하심으로 입증이 된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 구원을 설명하고자 하면 본래의 의미를 상실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전하신 말씀으로 전할 때 구원의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살리시고 우리를 회개하도록 하시고 당신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셨기 때문에,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이런 사랑을 받은 주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참된 복입니다.

 

우리는 이미 복을 받은 백성으로서 사도들의 생활을 보면 어떠합니까?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감옥에 투옥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인생역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와 동행을 하여 주신다는 것이 참된 행복이고, 나의 눈물을 말끔히 씻어주는 날은 몸과 영혼이 부활하는 날입니다. 사도들은 구원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구원의 메시지를 전한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의무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있는 제자들은 복음을 전함으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두려움의 대상이 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종교지도자들은 자신의 권력과 자리 그리고 부를 위해 사도들을 감옥에 가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자들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신약 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교회가 해야 할 일을 망각하고 다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슬픔입니다. 참된 복음의 메시지를 모르기 때문에 목회자의 말만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것입니다. 거짓 목회자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메시지인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복음만을 전했던 제자들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천사가 사도들에게 한 말은 ‘이 생명의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전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고, 교회가 해야 할 의무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일부분의 교회는 세상에 물든 교회가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없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예수님의 길과 사도들의 길을 보면서 나도 눈물을 흘리는 길을 가더라도 주님과 동행하는 참된 복을 얻은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님이 누구신가를 알리셨던 장소였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신자들이요 성도로서 주님의 날을 사모하는 거룩한 신부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순결을 지키면서 예수님을 사모하면서 성경의 말씀을 사모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런 교회로 느리더라도 바르게 성장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전에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던 종교지도자들은 심문을 하기 위해 잡아오라고 했지만 부하들은 이렇게 보고를 합니다. “이르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키는 사람들이 문에 서 있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믿을 수 없는 보고를 받은 자들은 어떻게 말을 합니까?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종교지도자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로부터 다시 보냄을 받은 자들은 사도들을 잡고자 하면서도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성전 맡은 자가 부하들과 같이 가서 그들을 잡아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더라” 자신들을 돌로 칠까 두려워 하였지만 제자들은 그들이 누군지를 알면서도 폭력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따라 갔습니다. 제자들은 종교지도자들에게 다시 복음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고, 유대인들과 온 누리에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리는 사건이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은 지난 주 시간의 연속으로 사도들은 담대함으로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라고 하면서 복음의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전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산헤드린 공회에 어떤 내용으로 기소를 했는지를 27-28절에서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사도들은 백성을 자극해서 소요를 일으키거나 종교지도자들의 부하의 연행에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순순히 따라 왔을 때 종교지도자들이 기소한 내용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종교지도자들의 협박과 위협을 함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불복종이며, 근거 없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사도들을 공회에 세운 두 번째 이유가 바로 자신들을 보호하고자 한 것입니다.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신들에게 전가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건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일부러 생략한 것인지 아니면 종교지도자들이 그것에 대해서는 심문하지 아니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감옥에 있었는데 어떻게 나갔는지 전혀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기적을 인정하면 자신들의 공회가 난처할 수 있기 때문에 질문을 뺀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들에 의해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과 백성들이 사도들에 대한 태도 변화는 종교지도자들의 위치와 권력을 위협 하고 위기감을 조성하기에 충분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들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종교지도자들에게 국가의 조직이나 국가와 개인 관계를 규정하는 법률로 헌법·행정법 등에 순종할 것을 가르치는 규정에 대한 예외가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29절을 보시면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도들은 종교지도자들의 권력에 성경의 말씀이 남용되지 않도록 전체적인 성경의 명령들과 관계 속에서 이해되도록 하기 위해 설명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자신의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당하게 말한 것입니다. 사도들은 가르친 내용이 있고, 가르칠 근거가 있었고, 복음을 전할 자신과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세상의 권력자의 부정한 말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한 성도입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자신들의 말에 대해 변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종교지도자들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증인자로서 예수님을 죽인 그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하나님께만 순종하겠다는 단호한 결심을 밝히면서 대제사장의 질문에 대하여 답변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형벌을 집행한 자들은 로마인들이지만 죽음으로 몰고 간 자들이 다름 아닌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 지도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사도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자신들의 죽음을 두려워하여 도망을 하였지만 부활과 승천하신 예수님을 안 이후 하나님의 말씀을 최우선으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지도자들의 공회에 불복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 한 사도들의 답변은 이전에 베드로와 요한이 대제사장 앞에 섰을 때 취했던 태도와 같으며(행4:19-20),초대교회 복음선교의 기본적인 정신이었습니다. 이런 복음의 정신이 오늘날에도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합니까? 세상에 물든 기독교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들은 담대함으로 공회 앞에서 증인자로서 30-31절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너희들은 믿지 아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하나님과 지금 너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께서는 신성모독 죄로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온 누리의 백성을 위해 즉 우리의 죄를 감당하심으로 불순종의 역사가 끝나도록 바란 대속적인 왕이요 구원자라를 것을 역설한 것입니다. 당신들이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살리심으로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선물로 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선물을 받은 사람이 성도요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순결과 능력을 상실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서 사도들처럼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사도들이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세상 사람들도 왜 교회가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복음의 증인자로서 참 된 행복이 무엇인지 전해야 합니다. 하지만 종교지도자들과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보내어 주신 예수님을 믿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의 위대한 메시지인 동시에 당신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어 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고 사도들처럼 증인이 된 성도입니다. 사도들에게 주신 성령과 우리에게 주신 성령은 동일합니다. 이것을 사도들은 성령과 증인을 연결함으로 복음을 잘 증거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1:8절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제자들은 그리고 초대교회는 증인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동일하게 증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 구속의 완성임을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살리심으로 나타내 보이시고 성령께서는 그 사실을 확증하도록 오늘날에도 증인 자를 세우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과 지팡이교회는 증인으로서 이 사실을 전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가진 것이 신자들이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이 ‘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회개와 죄 사함이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복음은 무가치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공회 앞에 끌려와서 단지 자신들을 변명하기 위하여 역설하는 것이 아니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딤후4:2)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담대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들과 교회가 감당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인생역전과 다른 인생역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시험을 이기신 후 마4:17절을 보시면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고 하심으로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그리고 막1:15절에서는 “때가 갔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사역도 회개하도록 하시는 것이고, 사도들도 같은 것이고, 마땅히 지팡이교회도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하실 수 있습니다. 회개는 인간의 행위적인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회개하도록 하심으로 구원을 얻도록 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같습니다. 그와 반대로 회개하지 아니하면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책임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회개는 우리의 책임입니까?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면 회개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아래 선택된 당신님의 백성이 복음을 듣고 애통하는 마음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내가 회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긍휼하신 은혜로 자연스럽게 회개하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철저하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과 같습니다. 회개는 나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보는 참된 눈물의 고백입니다. 그럴 때 세상의 형통과 다른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 자체만으로 형통한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삶을 통해서 잘 샆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최초로 형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창39:23절을 보시면 감옥소에 있던 중에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라는 말씀을 생각하면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사도들은 감옥에 투옥되고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심문을 당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이 형통입니다. 형통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회개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예정 섭리의 측면에서 보면 선택된 자들은 마음을 열고 회개하게 되지만 선택되지 않는 자들은 들을 귀와 보는 눈의 부재로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도 보지 못하게 되는 영적 소경과 귀머거리의 상태로 여전히 악에 머물러 있게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팡이교회는 회개한 자들임을 믿습니다. 그러니 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자랑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성도는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라는 것을 아시고 주의 길을 잘 가시는 신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들의 고백처럼 사도들도 종교지도자들에게 32절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자신들을 체포하여 온 자들에게 당당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협박과 심문을 당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알고 있는 제자들에게는 담대함으로 복음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처럼 죽음을 당할 수 있어도 하나님께 불순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알기 때문에 죽음은 더 행복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에게는 몸과 부활을 알기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 몸과 영혼의 부활은 오후 모임에서 웨스트민스터에서 강의하는 것에 잘 가르치고 있으니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홈페이지에 올려져 있습니다.) 지팡이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자 입니까? 사도들은 하나님께 순종할 것을 자신 있게 전하고 있습니다. 순종하는 것은 성령을 받은 사람의 본질적인 모습이라는 것을 전함으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종교지도자들에게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사도들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도들이 종교지도자들에게 말한 것처럼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증거 하는 증인이었던 것처럼 지팡이교회도 같은 길을 가야 하는 증인입니다. 우리의 특권은 복음의 증인 자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어떠합니까? 종교지도자들처럼 세상의 권력과 자리를 위해 열심입니다. 기독교에 대한 적대 정신이 만연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너희들을 보니 내 주먹을 믿겠다는 사람도 있을 정도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사도들이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심문을 당해도 담대할 수 있는 것은 사도들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누리는 신자들이 행복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복음의 메시지를 알기 때문에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태도임을 성령의 내적 증거를 통해서 최종적으로 확증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신적인 능력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십니다. 귀신을 쫓아내거나 중병을 치유하며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는 것으로 증거의 수단을 삼기도 하시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증거의 수단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많은 이적과 기적을 행하였지만 가장 많이 전한 것은 하나님 말씀이었습니다. 이적과 기적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기적과 이적을 행하시는 분들 중에는 성경의 말씀과 다르게 전하는 것은 성경의 메시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넘어가는 것은 성경을 모르는 것입니다. 같은 종교처럼 보이지만 “이단”이라는 말처럼 끝이 다른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하나남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교회요 성도입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10:17절에서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의 의미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만이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말씀을 이해케 하고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자이십니다. 지팡이교회도 오직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사도들과 같은 “우리는 이 이들의 증인”이라는 것을 깊이 생각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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