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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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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6:8-15
강설날짜 2018-09-30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MxGv-q5IA3g

스데반의 활동과 거짓 증인 자들(행6:8-15)

 

지팡이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인 성경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듣고자 합니다. 우리의 모든 지식, 지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용서하여 주시고, 은혜와 사랑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께서는 마16:24절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큰 영광이요 형통의 길입니다. 이러한 길을 가는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길은 나를 부인하며 나의 십자가를 지고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하나님 나라의 증인 자로 삶에서 형통한 길을 걷는 것입니다. 참된 삶을 보여주신 분이 사도들이었습니다. 사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침으로 고난과 위협을 당해도 계속해서 형통한 길을 걸었습니다.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형통한 길은 나를 구원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전하였습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을 믿기로 한 제자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가 급성장할 때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내부적인 갈등의 문제로 헬라파 유대인들의 과부는 생활에 필요한 도움을 얻지 못하고, 히브리파 사람들은 도움을 얻었고 있었기 때문에 원망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럴 때 사도들은 자신들의 잘못이라고 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만의 힘과 능력으로 해결하고자 하지 않고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하면서 제자들을(공동체 즉 성도) 모두 참여 시킵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가르치는 봉사의 일은 높고 구제 등의 봉사의 일은 차원이 낮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복음의 증인 자로서 서로 같은 봉사입니다. 서로 봉사의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사도들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고 한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도 각자에게 필요한 은사를 주심으로 함께 지어져가는 성전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만 성전으로 지어져가는 것이 아니라 예배당은 달라도 하나의 교회로 성장하도록 하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기능과 역할은 달라도 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성도요 교회입니다. 서로가 섬길 때 교회는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만 잘 가르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섬김의 손길이 있을 때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사도들의 권면대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 명을 선출합니다. 그 이름은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니골라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세상적인 표준이 아니라 신앙이 표준인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럴 때 히브리인과 헬라인이 서로 연합하여 하나의 교회로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선출된 일꾼들을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사도들과 서로 보완을 하면서 거룩한 공교회가 되도록 안수를 한 것입니다. 안수를 한다는 것은 사도들과 신자들이 한 것 같지만 결정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일곱 일꾼들은 사도들과 같은 섬김의 봉사로 교회가 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과 일곱 일꾼들은 서로 협력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교회가 해야 할 일을 잘 감당한 것입니다.

 

오늘은 일곱 일꾼 중에서 “스데반의 활동과 거짓 증인 자들”의 강설을 통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저번 주에 말씀 드린 것처럼 일곱 일꾼 중에서 맨 처음으로 등장하도록 하는 것은 앞으로 스데반의 사역에 관한 기록을 염두 해 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것처럼 오늘부터 7장까지 스데반에 대한 기록은 복음 사역에 지각 변동이 일어나도록 하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보시면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스데반은 사도들로부터 안수를 받은 구제 등의 봉사를 담당하는 일꾼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일곱 집사가 했던 일들을 모두 기록하지 않고 7장까지는 스데반을 기록하고, 8장에서는 빌립만을 기록합니다. 저자의 의도는 구제 등의 사역보다 복음 증거 사역에 중점을 두고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사도들이나 일곱 일꾼이나 오늘날의 교회도 똑같은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성령 충만한 사도들을 감당 못한 것처럼 스데반도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라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스데반은 구제 사역 등을 잘 하면서 그 이상의 일도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더 놀라운 것은 초대교회 안에서 ‘기사와 표적’을 행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합니다. 또한 최초의 순교자이기도 합니다. 스데반이라는 이름의 뜻을 보면 놀랍기도 합니다. 스데반은 헬라어로 “스테파노스”로 면류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부모님께서 스데반의 장래를 축복하고 미래에 가문의 영광을 얻도록 하기 위한 이름이었을 것입니다. 부모님의 의도는 잘 모르겠지만, 스데반은 기독교의 최초 순교자가 됨으로 생명의 면류관을 쓰는 영광을 누린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면류관을 씌워 주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씌워 주는 구원의 면류관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이처럼 형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교회 안에서 사역도 잘 감당하였고, 세상에서도 ‘기사와 표적’을 행함으로 세상은 미워했을지라도 사람을 구원하는 증인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이 믿음과 성령이 충만함으로 기사와 표적을 행하는 것을 알고 있던 ‘자유민들’(디아스로라) 즉 포로로 생활하던 중 고국으로 돌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스데반에게 도전장을(논쟁) 내민 것입니다. 9절을 보시면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여러 지역에서 노예로 생활하다가 유대 땅으로 돌아온 자유민들로 구레네인과 알렉산드리아인은 북아프리카를 대표하고, 길리기아와 아시아는 터키를 대표하는 지명이기도 합니다. 무슨 문제인지 본 절에서는 알기는 어렵지만 스데반의 가르침에 동의하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같은 유대인이라도 10절을 보시면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스데반은 성경에 해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박한 지식으로 자유민들과 거짓 증인 자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혜와 성령’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논쟁자들은 여러 지역이었지만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을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심은 이처럼 세상적인 지혜와 지식과는 다른 것입니다. 여기서 지난 주 강설로 들은 7절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말씀이 왕성하여 지는 것보다 교회가 부흥 즉 사람이 많아지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예배당이 많아지고 믿는다고 하는 분들이 많아질 때 교회는 쇠퇴하고 말씀이 사라지는 것을 교회사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말씀이 왕성하여 지기를 바라기보다, 먹고 살기 위해서 예배당에 사람을 채우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인지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참된 제자가 많아질 수 있도록 교회는 말씀 가르침에 충실해야 합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함으로 말하고,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어떻게 합니까? 11절을 보시면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변론자들은 사람들을 사주한 것입니다. 사람들을 은밀하게 선동하여 스데반과 대적하게 만들었습니다. 고소의 내용이 ‘모세를 모독했다’고 하는 것은 스데반이 주장한 모든 말이 모세 율법의 영원한 확실성을 흔들리게 하는 도전적인 것으로 생각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예배의 기초이며 구심점인 예루살렘 성전을 폐기해도 된다는 말을 한 것같이 보이도록 한 것입니다. 변론자들은 사람들을 선동하여 스데반이 하나님과 모세를 모독했다는 거짓말을 퍼뜨리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고소는 마치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소의 내용과 유사하기도 합니다. (마 26:61;막 14:58;요 2:19-22). 선동을 당한 사람들은 모세와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며 스데반이 신성 모독하는 죄를 짓고 있도록 함으로 예수님처럼 사형을 당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결국 스데반은 어떻게 됩니까? 12절을 보시면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소문은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이 미치게 됨으로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와서 스데반을 잡아서 산헤드린 공회로 데리고 간 것입니다. 자신들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이처럼 공적인 권력을 동원한 것입니다. 여기서 유심히 볼 것은 ‘백성’이 스데반 즉 그리스도인과 대적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백성들을 선동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한 편으로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호산나”라고 하였지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치던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모르면 이처럼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장로와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증인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13절을 보시면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이 곳과(성전)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사주를 받은 거짓 증인 자들은 법정에서 거짓을 말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들의 거짓말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더 구체적으로 ;거룩한 곳과 율법‘을 모독하는 말을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특히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라고 하면서 실제적으로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성전 덕택으로 살았기 때문에 성전에 대한 모독은 민감했을 것입니다. 각국에서 생활하던 디아스포라는 고국에 있는 성전을 위해 아주 많은 돈을 내기도 했습니다. 성전은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었지만,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자신들이 한 행동은 알지 못한 것입니다.

 

거짓 증인 자들은 계속해서 14절을 보시면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짓 증인 자들은 아마도 스데반이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면 사흘 만에 다시 지으시겠다는 말씀을 한 것을 전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위증한 것처럼 스데반도 같은 유대인으로부터 교묘하게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사실을 말했지만, 자유민들에게는 자신들의 이념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성전 파괴와 새로운 건축으로 죽이고 싶었지만 증거가 없어 하나님을 모독 한다는 죄로 죽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스데반을 죽이기 위해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과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는 것으로 위증하도록 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행6장 15절에서 이렇게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고 하면서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닮은 것으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읽어도 이런 표현은 이례적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에 앉은 사람들이 스데반을 볼 때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현상을 본 것입니다. 아마도 변화산의 예수님처럼 빛나는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데반은 앞으로 순교할 것이며, 부활하신 예수님 모습을 닮아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스데반은 죽음을 앞두고 있으면서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평온함과 담대함으로 승리할 것을 예표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스데반의 성령이 충만하고, 순수한 영적 은혜가 가득하고,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아니하는 담대함을 통해 하나님의 길을 잘 가라고 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선배님이신 스데반 일꾼을 통하여 지팡이교회는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영광을 위해 거룩한 초석으로, 거룩한 복음의 증인 자로 부르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게 하심으로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은 것처럼 우리도 그런 모습이 될 것을 믿으십시오. 하지만 내가 억지로 하여 위선자가 되면 마치 종교지도자들처럼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자격과 힘과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영광을 위해 나를 통해 복음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의 지혜, 능력, 재주, 충성심 등으로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님의 백성을 위해 예수님을 성육신하게 하심으로 구원하여 주신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로 부르신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과 지팡이교회가 즉 신자들과 한 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빛나는 얼굴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은 스데반에 대해서 행22:20절에서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라고 하면서 스데반을 ‘주의 증인’이라고 표현합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결국 사도 바울에게 복음의 증인 자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스데반이 순교를 한 것처럼 자신도 같은 길을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스데반의 활동과 거짓 증인 자들”이라는 강설을 통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주의 길을 잘 가시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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