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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7:17-34
강설날짜 2018-10-21

스데반이 공회에서 강설하다3(행7:17-34)

 

오늘도 지난주에 이어서 “스데반이 공회에서 강설하다”라는 강설을 들음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기를 소망합니다. 스데반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교회 사역을 잘 감당하는 일꾼이었습니다. 또한 스데반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 충만함으로 “지상대명령”을 감당하는 일꾼이었습니다. 이런 스데반을 보면 우리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점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들의 가르침은 교회를 바르게 세워가는 힘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주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일꾼으로 사역을 감당하던 중 자유민들과 논쟁을 합니다. 교회 사역을 하다보면 시기와 다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행한 “큰 기사와 표적”의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에 속한 사람들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과 논쟁을 했지만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함으로 어떻게 했는지 기억을 하십니까? 논쟁자들은 거짓 증인 자들을 세워 두 가지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성전의 신성불가침을 침해하고 침범했다는 것과 모세의 율법을 자신의 멋대로 변경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두 개의 질문에는 거기에 맞는 답변이 있어야 자신의 무제를 증명할 수 있습니다. 거짓 증인 자들이 말한 것을 가지고 답변을 하면 공회에서 쉽게 풀려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상대방으로부터 공격을 당하면 거기에 맞는 항변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스데반의 강설을 보시면 오직 성경의 말씀과 믿음의 조상인 인물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였습니다. 스데반은 자신이 전하려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역사적인 사실들을 이야기 했습니다. 신약교회에만 있었던 말씀만이 아니라 과거나 오늘도 한결같은 성경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도 은혜가 있을 줄 믿습니다.

 

스데반은 유대인이라면 가장 잘 알고 있는 아브라함을 처음으로 등장시키고,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을 통해 긴 강설을 하였습니다. 지난 주 강설은 요셉 중심이었던 것을 기억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도 잘 아는 이야기처럼 요셉은 형들로부터 애굽의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오늘날 말로 하면 인신매매입니다. 형제들의 마음은 악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가정을 구원하시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종으로 팔려온 요셉은 총리가 되고 야곱은 양식을 구하기 위해 아들들을 애굽으로 보내었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결국 애굽 왕 바로에게 알려지게 되고 야곱의 가족들을 애굽에 정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야곱은 애굽에서 요셉과 생활하던 중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애굽에서 사망을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땅에 잠들기를 소망하였습니다. 야곱의 소망은 애굽으로부터 출애굽하면서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야곱은 “세겜으로 옮겨져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 주고 산 무덤에 장사”된 것입니다. 스데반은 믿음의 조상을 이야기함으로 사람은 악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당신님의 언약을 이루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고난을 당한 것처럼 스데반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을 위해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하나님을 의지한 것처럼 스데반도 오직 예수님만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구약의 족장들의 이야기를 한 후 스데반이 모세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강설의 의미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행7장에서 아브라함, 요셉, 다윗, 솔로몬 중에 스데반은 모세를 통해 가장 긴 강설을 합니다. 모세를 통해 스데반이 전하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스데반은 모세의 이야기로 넘어가기 위해 잠시 17-19절에서 아브라함부터 요셉의 때까지의 일을 간략하게 이야기 합니다. 먼저 17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한 언약이 가까워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애굽에서 생활 했고, 번성했지만 아직 그 약속은 성취 되지 아니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가 가까워진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인구의 증가라는 것입니다. 야곱의 가정이 애굽으로 갈 때는 적은 인원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후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처럼 애굽에서 출애굽을 할 때는 보행할 수 있는 장정의 수가 60만이라면(출12:37-38) 실제적으로는 출애굽한 수가 더 많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한 때가 가까웠기 때문에 행복보다는 고난이 시작된 것입니다. 18-19절을 보시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그가 우리 족속에게 교활한 방법을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 아이들을 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 요셉의 공적을 모르는 애굽 왕의 등장은 하나님의 약속이 좌절된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럴수록 백성들은(유대인) 원망을 하지만 하나님은 약속을 기억하시고 오직 당신만을 믿도록 하시면서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킬 것을 모르는 애굽 왕은 유대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산파를 동해 남자 아이를 은밀히 죽이고자 했지만 실패하였습니다. 유대인의 남자 아이들을 죽이는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애굽 왕은 점점 강해지고 번성하는 유대인을 멸절하고자 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할 때 와 비슷하기도 합니다. 애굽의 바로와 모세,헤롯과 예수님을 생각하면 매우 유사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때가(6절) 가까울 때 즉 연대기적인 시기가 아니라 특정한 시점을 가리키는 ‘때’입니다. 20절을 보시면 “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 언약 백성의 생존이 위협 당하는 현실에서 유대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일을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고 하는 것은 모세의 외적인 모습과 내적인 마음만이 아니라 부모의 영적 상태가 온전하여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바로 깨닫고 그에 부합하는 마음과 눈을 가졌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출생한 후 3개월 동안 집에서 은밀하게 양육되다가 어떻게 됩니까? 21-22절을 보시면 “버려진 후에 바로의 딸이 그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갈대 상자에 넣어 나일 강에 버려졌지만 바로의 딸이 건져 내어 자기의 친아들로 양육을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는 애굽의 바로 왕이 유대인의 어린 아이를 모두 죽이고자 하는 때에 바로의 딸이 모세를 물에서 건져내어 양육하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를 모세를 통해 당신님께서 하시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의 딸에게 입양되고 애굽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였습니다. 당시 애굽의 모든 지혜는 고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하였습니다. 모든 지혜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겠으나 학문이 뛰어났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다는 것은 모세를 긍정적으로 스데반은 강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누가는 눅24:19절에서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즉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라는 것을 보면 모세를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강설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 역시 3:22절에서 예수님을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처럼 애굽의 학문을 통해 세상 적으로 말과 일에 능하였지만 40년 동안 광야에서 훈련을 받은 후에는 하나님의 일은 결코 세상적인 말의 힘을 통해 할 수 없음을 인식한 데서 비롯된 진솔한 고백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고백은 자신이 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간증은 자신을 자랑하고, 높임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부러울 것 없이 잘 성장하는 모세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납니까? 자신의 정체성을 알게 된 것입니다. 23절을 보시면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아마도 모세는 자신이 어릴 때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난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애굽의 왕자로서 교육과 힘의 위치에 있었지만, 자신과 같은 민족이 고난을 당하는 것을 나이가 들어서 안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과 다른 삶을 살고 고통을 당하는 현실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 나이가 40세라고 스데반은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이 때의 모세의 나이를 구약에서는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기록하는 것은 모세가 미디안에서 돌이켜 바로 앞에 선 때가 팔십 세였으며(출7:7),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고 세상을 떠난 때가 백이십 세(신34:7)라는 것만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스데반에게 있어서 40년이라는 의미는 아주 중요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모세의 이야기를 통해 긴 강설을 하면서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 기준이 되는 것이 ‘40년’이라는 연수입니다.(23, 30, 36절) 첫 번째는 23-29절에서 40세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고자 했으나 버림을 받습니다. 그런 후 스데반은 둘째와 세 번째 40년에 중요한 의미를 두고 기록을 합니다. 둘째는 30-34절을 보시면 광야 생활을 40년 동안하면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훈련 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40년은 40절로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35-37절) 홍해와 광야에서 당신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모세를 통해 “기사와 표적”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40년이라는 의미의 공통점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대적했다는 것입니다. 대적이라는 의미를 알게 함으로 이스라엘이 불순종하는 것처럼 지금 너희들이 예수님께 순종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모든 지혜를 배우는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고자 했습니다. 24절을 보시면 “ 사람이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자기 형제들을 돌아보러 나간 모세는 애굽인이 유대인을 치는 장면을 목격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던 모세는 애굽 사람을 쳐 죽임으로 자기 동족을 구합니다. 그러면 같은 동포인 백성들은 모세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떠했습니까? 25절을 보시면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바라던 기대와 달리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구원자로 전혀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모세는 같은 형제를 위해 또 무엇을 합니까? 26절을 보십시오.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끼리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해시키려 하여 이르되 너희는 형제인데 어찌 서로 해치느냐”고 한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배척을 당한 것입니다. 모세는 스스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실제로 받지 않고 모세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으나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스스로 생각하면서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중재자로 나섰으나, 유대인들은 모세을 같은 민족으로 생각하지 아니했습니다. 바로의 궁에서 호화로운 생활만 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신들은 죽을 고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므로 모세를 중재자로 생각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세의 마음도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은 27절에서 “그 동무를 해치는 사람이 모세를 밀어뜨려 이르되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고 한 것입니다. 형제들의 싸움의 갈등을 막고자 했지만 그들은 애굽과 이스라엘 민족의 갈등이 심하다는 것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애굽과 이스라엘은 마치 한 민족처럼 생활했지만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 왕의 등장으로 상상할 수 없는 고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또한 우리에게도 같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민족의 갈등은 모세의 마음도 모르면서 노예 생활로 인해 관원을 꺼리게 된 그들의 민감한 반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모세에 대한 강한 배척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모르고 모세가 스스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은 실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라고 항의하였지만, 그 후 하나님으로부터 훈련을 받은 모세는 36절을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으로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 세웠다라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애굽인을 죽인 것처럼 자신들을 어떻게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까? 28절을 보시면 “네가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고 한 것입니다. 모세의 입장에서는 억장이 무너질 것 같았을 것입니다. 모세는 자기의 살인에 대해 동족들이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쁜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으므로 그 사실이 바로에게 알려 지기 전에 도망했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29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 말 때문에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고 스데반이 이야기하는 것은 스데반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스라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는(출2:15) 바로 왕이 죽이고자 한 것으로 기록을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에게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애굽인을 죽이고 도망을 치고, 또한 동포로부터 40년 동안 배척을 당한 후 모세에게 누가 찾아 왔습니까? 30절을 보시면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우리도 잘 아는 이야기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 산 가시나무 떨기 불꽃에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애굽으로부터 도망을 치고 민족으로부터 배척을 당한 모세를 훈련하시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원리에 익숙한 모세를 미디안 광야로 내보내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로 새롭게 태어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 시기가 지나고 이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모세는 어릴 적 나일 강에서 죽을 수 있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난 후 애굽에서 풍요로운 생활을 한 40년과 대조적으로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통해 세상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청지기를 감당할 때 세상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인 성경을 읽어야 하고, 기도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놀라운 현상이었습니다. ‘가시나무 떨기 불꽃’에서 부르시는 것을 본 것을 스데반은 31절에서 이렇게 강설합니다. “모세가 그 광경을 보고 놀랍게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가 있어” 당시에 가시나무는 땔감으로도 별로 소용이 없는 나무로 아마도 학대받던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30절에서는 ‘천사’로만 언급되었으나 본절에서는 ‘주’ 로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모세에게 나타나신 분은 하 나님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대면하면 죽는 것으로 생각했으므로 단순하게 ‘천사’로 기록했을 것입니다. 모세가 들은 주의 소리가 무엇이었습니까? 32절을 보시면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바라보지 못하더라” 하나님은 당신님을 스스로 소개할 때 ‘네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자연스럽게 누구나 알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당신님께서 그들과 언약하신 것을 이루는데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죽으면 언약이 끝난 것입니까?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예수님이 오셔서 완전하게 이룰 수 있도록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잘 알고 있는 말씀을 모세에게 말합니다. 33절을 보시면 “주께서 이르시되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지금 모세가 서 있는 땅이 거룩한 땅입니까? 모세를 부르신 땅이 이방인의 땅으로 미디안 광야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있는 장소는 약속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메소보다미아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장소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서 멀리 있는 시내 산에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장소를 ‘거룩한 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애굽의 왕궁도 아닌 사람들도 왕래가 없는 초라한 땅이라고 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바로 그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은 척박한 땅임에도 불구하고 거룩한 곳임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로 타락함으로 그 자체가 거룩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이 거룩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했지만 그들로부터 배척을 당한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시고 있습니까? 34절을 보시면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스데반은 하나님이 고통받는 당신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택한 모세가 사실 그 백성에게 배척받은 자였음을 역설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40년이 지난 때었습니다. 세월이 흐른 뒤에 하나님의 부르심은 늦은 것 같지만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는 이처럼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통해 모세는 자신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었기 때문에 애굽에서 고통 받고 압박받는 백성들을 구출하시겠다는 당신님의 의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스데반을 크게 두 가지 논쟁을 통해 죽이고자 했었습니다. 하지만 스데반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시작하여 이스라엘의 존재가 무엇인가를 알도록 했습니다. 애굽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면서 약속의 의미를 모르고 있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언약의 약속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그들이 알 수 있도록 애굽에서 고난과 핍박을 받던 것을 떠 올리도록 함으로 우리의 조상과 너희들이 무엇이 다르고 같은지 생각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떠난 것이 아니라 언제나 늘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위해 모세를 준비하셨습니다. 그런 후 무조건 가서 구출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아니했습니다. 애굽으로부터 모든 지혜를 받고 권위 있는 통치자에 있었지만 배척을 당하고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양치는 목동으로 훈련시켰습니다.

 

지팡이교회도 본향을 향해 주님과 동행하는 제자입니다. 본향을 가면서 모세와 같은 훈련도 있고, 배척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 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무모한 무한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무모한 무한도전이라고 속삭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을 알고 있습니다. 모세를 이스라엘에게 보낼 때도 그들은 마치 무모한 도전으로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의 힘이 약한 것만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선물은 그들을 구출하고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애굽을 나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향해 가는 무리와 같습니다. 그들 스스로 무모한 도전으로만 생각했던 것이 실제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에 도착한 것입니다. 이것이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큰 선물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구원의 선물은 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선물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쓰심으로 많은 사람이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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