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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7:44-53
강설날짜 2018-11-04

스데반이 공회에서 강설을 마무리하다.(행7:44-53)

 

지팡이교회 주위를 보아도 많은 예배당이 있습니다. 제가 시골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 목왕리에는 하나의 예배당이 있었습니다. 시골에서 남양주군 가운리에 이사를 왔을 때 주위에는 예배당이 하나였습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가운리에는 예배당이 두 군데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골보다 많았지만, 지금처럼 많은 예배당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예배당이 많아졌습니다. 과거보다 예배당이 많아졌다고 해서 참된 신앙인이 많아졌다고 말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단보로 하며 믿어야 하는 시대였습니다. 우리나라도 복음이 들어왔을 때 어떠했습니까? 초대교회와 같이 자신의 목숨을 단보로 해야 했습니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을 때 오히려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네로 황제가 교회를 핍박할 때 교회는 참된 신앙고백을 하면서 순교자의 길을 가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순교자를 보면서 그들과 같은 신앙인이 되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했습니다. 오늘 스데반의 강설을 마무리하는 시간입니다. 다음 주에는 스데반의 순교에 대한 강설을 들을 것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초대교회에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리게 되는 꽃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말씀처럼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하여질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지팡이교회에서 신앙 생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이스라엘의 족장인 아브라함으로 시작하여, 모세에 이르기까지 긴 강설을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적인 힘에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으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약속의 땅인 하나님 나라를 위해, 우리를 모세와 같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로 구원하시위해, 메시야가 오신 것입니다. 모세가 출애굽을 하면서 “기사와 표적”을 한 것 같이, 너희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이 말씀은 신18:15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모세가 예언한 것을 스데반은 더 구체적으로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살아 있는 말씀’으로 너희들이 선지자 중 최고라고 할 수 있는 모세가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기사와 표적을 행한 것을 알고 있듯이,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자손에게 세우신 메시야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들의 악행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악행을 잘 생각할 수 있도록 스데반은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오른 때를 기억하도록 합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모세가 없을 때 아론에게 우리를 위해 신을 만들라고 한 것입니다. 표적과 기사를 보았지만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였다는 것입니다. 송아지만 만들었습니까?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으로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것이 조상들이 한 죄라는 것입니다. 지금 너희들이 하는 행동이 죄라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결국 성전의 의미를 상실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긴 강설을 들은 공회와 자유민들은 예수님을 죽인 것과 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스데반은 이스라엘 역사를 강설하는 가운데 마지막 부분의 정점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과거의 기억을 떠 올렸으면 합니다. 스데반이 이처럼 긴 강설을 하게 된 동기입니다. 거짓 증인 자들은 스데반이 율법을 거스려 말한다는 것이고,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고 한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율법에 대한 것을 말했다면, 특히 오늘은 모세, 여호수아, 다윗, 솔로몬을 통해 성전과 관련하여 어떤 일을 했는가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4절을 보시면 성막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영광스러운 역사를 지닌 의미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그가 본 그 양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막은 ‘증거의 장막’으로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을 새긴 두 개의 돌판을 그 장막 안에 보관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입니다.(민 9:15) 그러면 왜 스데반은 성전을 이야기하기 위해 성막을 말하는 것입니까? 스데반은 성막과 성전을 대조함으로 성전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출애굽할 때 성막은 이동이 가능했고, 그곳에 돌 판 즉 “언약의 열 가지 말씀” 즉 십계명을 보관한 곳입니다. 성막은 성전이 완공되기 전인 다윗시대까지 있었던 것으로 그곳에서 예배를 했습니다. 성막에서 예배하던 중 다윗은 하나님께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요청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는 반대를 하지만 나중에는 허락을 합니다. 그러면 성전을 짓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까? 스데반은 성전 지은 것을 잘못된 것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성전 안에만 임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제한된 것이 아니고, 성전을 지나치게 증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짓 증인 자들은 스데반이 성전을 부정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스데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막에 대한 역사를 스데반은 45절에서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성전은 움직일 수 없는 장소로 예배를 위해서 꼭 와야 하는 장소였지만, 성막은 움직일 수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어느 장소로 이동하든지 그들과 함께 하심을 알리신 것입니다. 이런 은혜에도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몰록의 장막”을 만들어(43절) 우상을 섬기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홀히 섬겼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어느 곳에 있든지 함께 하겠다는 것이고, 구원자로 활동하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도 역시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에도 장막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의 시대만이 아니라 다윗시대까지 있었다는 역사를 이야기함으로 성전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전의 의미를 알 수 있도록 스데반은 46절에서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라는 것입니다. 삼하7:5-7절의 말씀을 생각하면 나단이라는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성막에 대해 만족하셨음을 확인하고 특별한 집을 짓고자 하는 다윗의 마음이 잘못된 것임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다윗이 요구를 허락하십니다. 다윗은 자기 아들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마무리 할 수 있도록 그리고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여러 가지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결국 성전은 47절에 말하듯이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시작으로 솔로몬을 통한 성전 건축은 약속의 모형일 뿐 최종적인 성취는 아닌 것입니다. 성전을 주신 이유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최종적으로 성취하도록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성전은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외형적인 모형입니다. 성전의 실체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성전의 건축자이시며 동시에 성전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24:2절에서 제자들에게 성전 건물을 가리켜 보이면서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뜨려지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요2:19절에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심으로 당신님의 몸인 성전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성전의 의미를 드러냄으로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을 냉소적으로 진술한 것이 아닙니다. 성전은 눈에 보이는 건물을 넘어선 것으로 영적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막과 성전은 하나님을 매일 수 있도록 하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48절을 보시면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전을 지은 솔로몬 왕도 왕상8:27절에서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은 솔모몬이 말한 의미를 상실하면서 하나님을 성전에 제한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스데반은 하나님께서 성막과 성전에 제한받으실 수 없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합니다.(사66:1-3) 49-50절을 보시면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라고 함으로 성막도 성전도 영원히 지속되도록 계획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둘 다 앞으로 임할 더 큰 실체를 위한 모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으로 결코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장소에 거하실 수 없습니다. 지팡이교회가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를 하지만 이곳에서만 거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모든 피조물 위에 계시는 분이기에 어떠한 것이라도 능히 하나님의 처소요 집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성전은 46년 동안 지어진 즉 사람이 만든 성전이 아니라 ‘당신님의 육체’ 즉 예수님이 성전임을 제자들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예배당을 크게 짓고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것입니다.

 

성전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순종과 신뢰의 필요성을 알려 주기 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3:16절에서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신앙 생활하는 자들에게는 성전이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성전이 있다는 것은 순종과 신뢰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처럼 보이는 성전을 우상화하고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성전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솔로몬의 성전처럼 보이지 아니하는 성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을 우상화하고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야 하겠습니까?

 

이제 스데반은 유대인들의 마음을 아시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 강한 책망을 합니다. 51절을 보시면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스데반은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이스라엘인들에게 직접적인 공격을 하면서 강설의 끝을 맺기 시작합니다. 스데반은 구약의 말씀에 능통한 사람으로서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말씀은 선지자들이 하나님께 고발한 죄목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공회는 놀랐을 것이고, 당장 죽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양심에 가책도 없는 죄인의 모습을 잘 드러낸 것입니다. 스데반의 책망은 예수님과 복음을 증인하는 신자들을 억압하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함으로 공회와 거짓 증인 자들이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유대인들은 육체에 할례 받은 사실만을 자랑할 뿐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진리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도들이 요구한 회개를 전적으로 거절한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신앙인에게도 구약 시대처럼 금송아지를 숭배하며 배교하고 성전의 의미를 모르면서 자신을 위한 믿음은 불순종이고 결국 영원한 심판을 당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에도 성령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치 아니하는 완악한 마음을 갖고 있는 유대인들 마음과 무엇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스데반은 ‘너희’라고 말하면서 선지자들을 죽인 것에 대해 철저하게 기소합니다. 인칭 대명사를 강조하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성령 충만하신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거역하고, 십자가에 죽인 것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우리라면 당장 욕이라고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데반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지팡이교회는 구약과 신약 백성들과 어떤 점에서 다른지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52절을 보시면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스데반은 이제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들을 거부하고, 궁극적 구원자이신 예수님 즉 의인을 죽인 죄를 추궁하는 것입니다. ‘의인이 오시리라’고 말한 그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지상의 물질과 권력에 욕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삶에 가치를 둔 것이 아니라 하늘을 지향한 즉 하나님만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오실 메시야의 도래를 예고한 선지자들을 죽였지만, 지금 너희들은 모세와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 의인’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죽였다고 고발한 것입니다. 계속해서 스데반은 53절의 고발로 긴 강설을 끝맺습니다. 자신이 율법을 거부한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여기서 ‘율법’은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선지자들이 수없이 예언한 율법을 거절한 것입니다.

 

스데반은 냉혹하게 고발하면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입니다. 스데반의 강설은 구절구절마다 마치 서릿발 같이 준엄한 것입니다. 이런 일꾼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것입니다. 오늘날은 회개를 위한 강설은 많지 않고 오히려 사람을 위한 강설이 많은 시대입니다. 스데반의 강설은 구약의 역사와 예언에 근거함으로 교회가 새로운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잘 설명하였습니다. 스데반은 율법과 성전에 관해서 무엇이 참되고 거룩한 것이며 무엇이 본질적으로 중요한가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어떻게 했는가를 통해 복음의 증인 자요 일꾼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우리들도 유대인들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성경의 말씀을 사모하면서 하나님께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종교지도자들처럼 그리고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을 무시하여 성경의 말씀을 거역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면서 성전에서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로마로부터 구원해 주실 메시야를 기다리면서도 정치, 경제적 번영만을 생각하는 것은 세상적인 믿음입니다. 오늘날에도 인간적 생각과 기대를 훨씬 초월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지상의 예배당에 국한시키고자 합니다. 예배당에 있으면 안전하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했는데 사이비와 이단들이 말하는 것처럼 예배당이 그리고 특정한 지역이 지상 낙원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을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초월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지상의 예배당, 성전에 가둘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성막이나 성전 그리고 예배당이 없을 때도 이미 존재했습니다. 약속의 땅이 아닌 곳에도 아브라함을 부르시기 이전에도 하나님의 임재는 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특정 공간으로 제한된다는 생각은 이방인의 종교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건물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는 이방인의 신관을 벗어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유대인들처럼 잘못된 생각이 비집고 들어와 우상숭배를 하도록 길을 열어 놓을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고난에 처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거나 외면한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속된 고난과 핍박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실의와 좌절에 빠지게 하는 요인이 되나 동시에 그것은 강력한 믿음과 인내를 소유하게 하는 경건한 신앙 형성의 결정적인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저는 믿습니다. 지금 교회가 연약하다 할지라도 또한 계속되는 고난과 어려움속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스데반도 자신이 어떻게 될지 모르면서도 강설하고, 그 후에는 순교를 당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데반을 사랑한 것같이 우리를 향한 사랑과 열정으로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사랑을 받고 있는 지팡이교회는 참으로 행복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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