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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9:1-9
강설날짜 2018-12-09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울(행9:1-9)

 

오늘 말씀은 사마리아와 온 누리로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는 주제의 확장이기도 합니다. 복음은 가둘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시작하여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을 향해 전하여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옥 한음 목사님의 “고통에는 뜻이 있다”라는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자들은 핍박을 받았지만 예수님을 향한 신앙은 식을 줄 몰랐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울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되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존 스토트는 오늘 본문을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울의 체험은 교회사에서 가장 유명한 회심이다”라고 기록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울은 교회사에서 그리스도인에 대한 핍박 자 그리고 살인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복음을 감당했습니다. 자신의 이름과 가장 비슷한 로마이름인 바울로 개명을 하고 사도요 전도사로 지상명령을 감당했던 인류 역사의 핵을 그은 위대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강설을 듣기 전 지난 주 강설의 말씀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박해를 당하는 빌립은 어느 지역이든 복음을 감당하는 일꾼이었습니다. 어느 날 빌립은 사마리아 지역만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아프리카지역을 연결해 주는 “가사”로 이동하라는 주의 사자의 말을 듣고 이동하였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에디오피아 간다게 여왕의 모든 국고를 맡은 내시를 만나도록 하신 것입니다. 가사는 삼손의 이야기로 유명한 지역이었고 광야였습니다. 내시와 빌립을 광야에서 만나게 하는 것은 성령의 초자연적인 개입이라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의 사자, 성령, 주의 영이라고 사용함으로 빌립을 통해 사역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의 사자 즉 성령의 이끄심으로 간 광야에서 에디오피아 내시를 발견했을 때 그가 보고 있던 것은 무엇인지 기억을 하십니까?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 중에 이사야 선지자의 글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있던 빌립은 내시에게 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혜와 지식 그리고 학문 등이 높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이해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 수 있도록 성령께서 빌립을 통해 증거 하시는 것입니다. 내시는 학문이나 권력 등이 있어도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가지고 있는 보물입니다. 마치 진주를 발견한 것과 같은 것이 복음입니다. 성령의 이끄심을 받고 있는 빌립은 수레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고자하는 열망이 높은 내시에게 복음을 알려줍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 분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굴욕을 당하면서도 공정한 재판을 당하지 아니했으며 생명도 빼앗겼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위해서 이처럼 사랑으로 감당하신 것입니다. 빌립으로부터 복음을 들은 내시는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고 하면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이처럼 에디오피아 내시와 빌립을 통해 “성령이 임하시면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리라”는 말씀이 확장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누가는 빌립의 사역을 8장을 통해 마무리하면서 오늘 본문에서는 갑작스럽게 사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아도 사울을 어떻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까?“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라고 합니다. 누가는 사울에 대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신자들에게는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다고 기록합니다. 스데반이 순교 했지만 계속해서 살기와 증오는 더 강해진 것입니다. 사울이 무자비한 핍박을 시작한 것은 무엇 때문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제대로 이해 못하면 사울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열심히 믿는 자들을 광신적인 행동을 가진 분열주의자로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더욱 살기가 등등하여 특히 ‘주의 제자들’에게 박해하는 것이 자부심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울은 대제사장에게 가서 무엇을 요구했던 것입니까? 2절을 보시면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당시 대제사장은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이었고, 로마로부터 인정받은 권력과 행정권 등으로 같은 유대인들에게 힘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외국으로 도피한 자들이라도 로마의 힘을 등지고 있는 공회는 유대인을 본국으로 송환할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을 만났던 것입니다. 사울은 체포영장과 같은 것으로 무엇을 하였습니까? 다메섹 여러 회당에서 예배를 하는 자들을 체포해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 줄 것을 각 회장의 지도자들에게 요구한 것입니다. 다메섹은 예루살렘 동북쪽 약 230km 정도 거리에 위치한 도시로 지팡이교회당에서 출발하여 대전보다 더 먼 거리입니다. 이렇게 먼 거리라도 사울의 열정은 대단했던 것입니다. 왜 이런 열정이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까? 우리는 그 해답을 성경으로부터 찾아야 합니다. 고전1:23절을 보시면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자신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즉 신자들을 죽이고자 했던 이유가 철두철미한 유대교적인 신앙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정통 유대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는 결코 십자가에 처형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신21:23절을 보시면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즉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메시야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갈3:13절에서 그리스도가 나무에 달리신 일은 신자들에게 복을 가져다주었다는 비밀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사울의 열정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 사울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다가온 것입니다. 다메섹으로 가다가 뜻밖에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3절을 보시면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는 사울이 가지고 있던 열심을 이방인을 위한 복음 증인 자로 감당하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사울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사건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빛’은 아마도 태양과 같은 ‘발광채’를 의미하는 것보다 참 빛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더 좋은 해석으로 생각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나는 광채를 빛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신비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5절에서 그 의미를 좀 더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여튼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그 빛을 목격 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사울은 상상하지 못한 그 빛이 임한 것입니다. 자신에게 홀연히 임한 빛에 의해 사울은 반사적으로 행동을 합니다. 4절을 보시면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빛에 의해 사울은 쓰러지듯 엎드린 것입니다. 사울의 행동은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반사적이면서 두려움이었습니다.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사울에게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온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나 꾸지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두려웠을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 ‘사울아 사울아’하시면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에게 왜 이런 음성을 주시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열정은 하나님을 위한 영광이었는데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음성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울이 생각할 때 하나님을 핍박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과 율법을 보호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유대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으로 증언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로서 신자들과 함께 교제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던 사울은 질문과 함께 그 해답을 듣습니다. 5절을 보시면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는 사울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사울이 먼저 하나님을 찾고 구한 것이 아니라 먼저 찾아오신 것입니다. 죄인이 먼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시면 아담, 아브라함, 모세, 다윗, 베드로, 사울 등을 보아도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 오셨습니다. 인간이 신을 먼저 찾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신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먼저 은혜를 받은 것이기 때문에 교만하거나 자랑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여’는 신을 뜻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러면 왜 주라고 한 것입니까? 사울 자신을 부르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인식한 것이 아니라 원문을 살리어 말하면 ‘당신은 누구입니까?’입니다. 유대인적인 표현으로 하면 선생님 누구십니까?입니다. 당시에 높은 신분과 황제를 주라고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누군지 상상할 수 없는 사울은 자신을 부르고 있는 정체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약한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호칭입니다. 사울의 음성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출3:14절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는 말씀처럼 구약에서 모세가 만난 하나님과 동일시하십니다.

 

사울은 음성을 듣자마자 놀랬을 것입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열심이었던 모든 것이 무너진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저주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이제 유대교에서 십자가 사건에 기초한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입니다. 자신이 자랑해 오던 빌3:5-6절을 보시면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는 모든 것을 8절에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님이 누구신가를 알려주신 후 이어서 6-7절을 보시면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정체를 밝히신 후 곧이어 사울에게 일방적으로 지시하십니다. 이렇게 된 동기에 대해서 누가는 생략하고 행11장에서 자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울이 감당해야 할 사역을 말씀하시지 아니하시고, 다음 주에 강설을 하겠지만 아나니아를 통해 하십니다. 세상으로부터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울은 이제 얌전한 어린 양과 같이 된 것입니다. 신자들을 핍박하는 입장에서 이제는 자신의 생명을 구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사울과 함께 통행하였던 사람들의 반응을 묘사하면서 그들이 시각적으로 아무것도 감지하고 있지 못함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같은 장소에 있어도 무조건적인 선택의 섭리인 것입니다. 사울의 경험은 신비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성화나 그림이 보여주는 상상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사울과 함께 동행을 한 사람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의 열심과 용맹 그리고 핍박은 이제 땅에 엎드러졌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울의 개인적인 경험은 상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눈으로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8절을 보시면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울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있었을 때 땅에 엎드러진 상태로 계속해서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빛으로 인해 예수님의 모습을 보지 못했을지라도 음성은 들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동행을 한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은 사울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8절을 보시면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기도를 하면서 자신이 그 동안 해 왔던 모든 것을 회개하는 과정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을 핍박하는 사울에게 형벌을 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혜가 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된 교회는 이 말씀이 무엇인지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9절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신비적인 체험을 상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강조점은 보지 못함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흘 동안 먹지 못하고 내면적인 갈등을 하면서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교만하고 무자비하게 핍박을 하는 사울이 이제 깨어지고 무기력해진 모습을 정확하게 그려내고자 한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이 세상의 위대한 인물로 복음을 증거 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놀라운 경험을 한 사울은 예수님과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유기적이고 분리될 수 없는 어떤 통일성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핍박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 했지만,땅 위의 하나님의 백성들 즉 몸 된 교회를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우편 즉 하늘에서 사역하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울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는 사울을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복음의 사도가 되도록 하심으로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로마인과 온 누리에 복음이 증거 될 수 있도록 사역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이후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바로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을 만난 후 회개하고 사도가 되었다는 사실은 복음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바울의 회심은 인간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일어난 것입니다. 거저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사람으로부터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니라 확실한 것은 예수님을 통해 일어난 사건입니다.

 

“회심”이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에 의해 죄를 깨닫고 자신만을 위한 삶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것입니다. 회심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사역의 결과로 하나님의 백성이 응답하는 결과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지만 돌이키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돌이키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사울처럼 회심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헌신하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사울은 마음이 굳어서 냉정하고 차디찬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준비하셨습니다. 사울만 준비하신 것이 아니라 지팡이교회도 준비하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증거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많은 일을 해야 하나님으로부터 상급을 많이 받는 것이 아니라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구현할 때 주어지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이런 은혜를 받은 지팡이교회는 행복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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