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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10:17-23
강설날짜 2019-02-03

이방인 고넬료가 사도 베드로를 청하다(행10:17-23)

 

JTBC의 정치부회의를 보면서 가이드의 말이 마음에 쏙 들어 왔습니다. “신이 우리에게 주신 최소한의 양심”이라는 말입니다. 목회자요 성도인 나는 죄인임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누가 자신 있게 설 수 있을까?입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 아시지요.’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죄인을 기억해 주세요’라는 것입니다. 목회자요 성도인 저는 하나님 앞에 누구였습니까? 하나님께서 복음의 일꾼을 저에게 보내어 주심으로 ‘들을 귀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것처럼 오늘 말씀을 통해 다 같이 들을 귀 있는 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주 안에서 하나의 몸 된 교회인 성도님,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알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당신님의 백성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나의 죄를 없애려고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를 감당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나의 죄가 당신님께 전가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형벌을 당신님께(예수님) 전가시킴으로 대신 형벌을 감당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형벌을 감당하여 주심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진 것입니다. 그로인하여 우리를 온전히 의롭다고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양자가 되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옮겨져 새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인 성경을 통해 우리는 이 모든 일을 알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을 감사하면서 삶의 예배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 된 교회요 성도로서 삶의 예배를 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을 감사하며 기뻐하는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지상명령을 부탁하신 것을 알면서 생활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아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팡이교회는 아주 작은 교회이지만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생활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하고자 하는 마음처럼 세상에서의 생활도 중요한 것입니다. 신실한 성도의 삶 속에서 반드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좋은 교회의 모습을 잘 나타내는 것입니다. 삶의 예배가 거짓이면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증거 하는 것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 나라를 믿지 못하도록 하는 거짓된 교회요 성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주 극단적인 경우 교회가 아닐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가 되지 아니하도록 하나님 앞에 최소한의 양심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삶의 예배에서도 최소한의 양심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양심’을 기억하면서 바른 교회, 바른 믿음이 있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일 지팡이교회는 “이방인 선교의 문이 열리도록 고넬료를 준비하신 하나님”이라는 강설을 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를 통해 이방인도 구원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 고넬료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섭리와 간섭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벨료를 준비하시기 위해 환상 중에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시었습니다. 고넬료는 이방인 즉 로마인으로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고, 경건하며,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라는 신실한 이방인 신자였습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잘 구현하는 것이고, 양심이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고넬료와 같은 사람이 바로 좋은 교회요 하나님 나라를 잘 구현하는 성도입니다.

 

고넬료가 기도하던 중에 하나님의 사자인 천사가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데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경건하고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던 고넬료는 그 즉시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욥바로 보낸 것을 아실 것입니다. 만약 이와 같은 현실이 나에게도 일어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베드로는 이런 상황도 모르는 가운데 옥상에 올라가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기도하던 중에 배가 시장하여 먹을 것을 준비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베드로는 “황홀한 중에” 무엇을 보았는지 기억을 하십니까? 누가는 구체적으로 기록을 해 두었습니다.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볼 때 보자기 안에는 유대인이 먹지 아니하는 부정한 짐승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생각할 때 먹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어떻게 됩니까?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넬료를 만나실 수 있도록 베드로의 마음을 돌보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게 하심으로 구원이 그들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과 하나님 안에서 식사의 공동체가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지팡이교회가 성찬을 하는 이유도 같은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있다는 것을 고넬료를 통해 베드로가 알 수 있도록 준비하시는 것을 보면 참으로 은혜 중에 은혜입니다. 베드로는 앞으로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사자인 천사를 통해 준비하신 것입니다. 환상을 본 베드로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의아해하고 있을 때 무두장이의 집 앞에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한 것을 17절에서 말하여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 하더니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그 환상이 무슨 뜻인지 의아하게 여기고 있는 가운데 아마도 베드로는 신학적이고 행위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유대교를 오랫동안 믿었기 때문에 환상의 의미는 계속해서 당황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환상을 본 베드로의 입장에서 이성으로는 해석하기 어려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속으로 의아해 하더니’라는 말은 요셉이 마리아와 혼인하기 전 잉태했다는 사실을 알고 믿을 수 없다는 의미와 같은 단어이기도 합니다. 계속해서 환상의 의미를 의아해 하고 있는 가운데 그 때에 고넬료가 보낸 “하인 둘과 경건한 사람”이 도착한 것입니다. 도착하자마자 무엇을 합니까? 18절을 보시면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유숙하느냐 하거늘”이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욥바에서 베드로는 “선행과 구제”일을 감당했던 도르가를 살린 후 무두장이라는 시몬의 집에 잠시 머물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에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하자마자 베드로가 이곳에 유숙하고 있느냐고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옥상에서 계속해서 환상에 대한 의미를 깊이 생각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9절을 보시면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너를 만나기 위해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성령께서 알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아직도 환상의 의미를 마음으로 의아해 하고 있는 것을 누가는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라고 기록을 합니다. 바로 그 때에 성령의 음성은 ‘두 사람이 너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음성은 조금 전에 일어난 환상과 다르게 구분하시면서 초기 사도들의 활동이 철저하게 성령의 인도를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가 독자에게 던지고 있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고넬료는 분명히 하인 둘과 경건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모두 세 명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서는 왜 두 명입니까? 서로 다른 사람이 기록한 것이 아닙니까?하면서 ‘성경을 틀린 것이다’라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자 사본(D)에서는 숫자를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른 사본에는 ‘세 사람’ 이라고 언급하지만,우리가 사용하는 본문은 바티칸 사본(B)을 따라 두 명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나 두 명이란 표현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언급된 두 명은 고넬료의 직접적인 명령을 받은 두 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면 무리가 없습니다.

 

‘두 명’이든 ‘세 명’이든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20절을 보시면 어떻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까?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베드로야 일어나 내려가 그들을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의심도 하지 말고 함께 가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령께서 직접 그들을 베드로에게 보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고넬료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들을 책임지시며 그들의 임무와 베드로의 환상을 연결시킴으로 이방인 사역이 확장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동일하게 성령께서는 일꾼을 사용하시어 일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은혜요 영광이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본 환상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자세히 알 수 있도록 성령께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지시에 따라 옥상으로부터 내려온 베드로의 모습을 21절에서 어떻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까?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이르되 내가 곧 너희가 찾는 사람인데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는 것입니다. 성령의 말씀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너희가 찾는 자가 바로 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령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보면 양심이 있는 사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도 있어야 하는 얌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성령의 지시에 담긴 의미를 알고 싶어 ‘무슨 일로 왔느냐’는 것입니다. 아마도 아직까지는 자신에게 찾아온 의미를 완전하게 알지 못한 것 같습니다.

 

고넬료의 명령을 받은 ‘두 명’은 22절에서 무엇이라고 담대하게 말을 합니까? “그들이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두 명은 그 동안 있었던 일을 그대로 말을 합니다. 누가도 하나님께서 이 사건들을 주도하신 것을 독자들이 확실히 이해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기도 합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들을 수 있는 준비를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베드로로 하여금 성령께서 이방인 사역을 하도록 파송된 것으로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사역을 시킬 때 무엇을 왜 해야 하는지 이해하도록 하십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의인”은 오직 자신들에게 쓸 수 있는 의미로 생각을 했습니다. 이방인에게는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시대였습니다. 율법을 준수할 수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에게만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넬료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은 백부장을 ‘의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생각할 때 백부장은 원수이기 때문에 의인이라는 단어는 상상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가이사랴에 생활하던 디아스포라인들은 고넬료의 경건한 삶을 인정했던 것 같습니다. 그로 인하여 유대인들로부터(디아스포라) 의인이라는 칭송을 받은 것 같습니다. 교회는 이처럼 세상의 사람으로부터 의인이라는 양심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요 성도이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으로 고넬료가 누구인가를 알고 싶었을 것입니다. 두 명은 더 구체적으로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고벨료가 천사의 지시를 받았다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은혜라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를 통해 이방인을 위한 선교는 불가항력적인 것임을 알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하셨던 행1:8절의 의미를 밝히 알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그들은 베드로에게 당신을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말을 통해 성령에 감동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오니 함께 가자는 것입니다.

 

고넬료의 명령을 받고 온 사람들을 베드로는 어떻게 합니까? 23절을 보시면 “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튿날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갈새 욥바에서 온 어떤 형제들도 함께 가니라”입니다. 함께 유숙을 하자는 것은 베드로에게 아주 특별한 밤이 되었을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밤을 지새웠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왜 환상을 통해 보여주셨는지를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한 지붕 아래에 독특한 사람들이 유숙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정한 사람 무두장이와 유대인 베드로 그리고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넬료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교회가 유대지역만이 아니라 땅 끝까지 전하여 질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마음과 지식이 알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섭리와 간섭으로 준비하신 것입니다. 베드로 자신은 성령께서 보여주신 “보자기 같은 그릇”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양심의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이방인에게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를 고넬료가 보낸 사람으로부터 들으면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을 것입니다.

 

주 안에서 하나가 된 교회요 성도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건이 가져온 것은 이처럼 유대인들은 상상도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자신들이라고만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과 결혼한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보다 더 못한 마치 개와 돼지처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고벨료를 준비하심으로 사도들의 마음이 무너지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속의 사건은 이방인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사역을 가급적 유대인 지역으로 제한하셨지만, 부활하신 이후 제자들에게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복음은 유대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령 강림 후 이러한 사실을 일부분으로는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고넬료의 사건은 더욱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것이 무엇인지 알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환상을 보았을 때 의아해 하고 무슨 의미인가 고민했지만, 결국 하나님의 간섭은 베드로의 양심을 통해 이해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하면서 그 날 밤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간직하면서 주의 길을 묵묵히 걸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본 환상의 의미가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깨끗하게 하셨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눈물로 기도하면서 ‘주님 아시지요’라고 했을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하나님 나라의 복된 소식은 처음부터 하나님 안에서 민족과 지역을 넘어서 진행된 것이라는 역사적인 사실을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해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눅4:25-27절에서 ‘시돈 땅에 있는 사랩다의 한 과부와 수리아 사람 나아만’을 통해 강조하고, 행8:26-40절에서 ‘에디오피아 내시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참된 복음을 알게 되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행9:1-22절에서는 ‘오순절 사건을 통해 모든 족속이 하나님 나라의 큰 비밀을 보게 하는 것과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며 바리새인 중 바리새인이라 할 수 있는 바울의 그릇된 사상을 변화’ 시켰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오늘 본문인 고넬료의 사건을 통해 복음이 유대인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사건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이방인에게까지 전하여 질 수 있도록 오늘도 성령께서는 일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온전하지 못한 우리는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비밀을 완전하게 다 알지 못하지만 삶의 예배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소한의 양심의 소리를 들으십시오.

 

지팡이교회는 왜 나만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투정부리기 보다는 베드로처럼 일을 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몇 명인지 아실 것입니다. 베드로가 생각할 때 많은 제자 중에 왜 ‘나’입니까?라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환상의 의미를 알고 또한 성령께서 하신 일을 안 베드로의 마음을 생각해 보는 귀한 성도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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