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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10:34-43
강설날짜 2019-02-17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강설(설교)하다(행10:34-43)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 중에 “조선인은 사회에 있을 때는 유교인이 되고 철학적으로는 불교인이 되며 문제가 생기면 주술적 신앙의 대상인 가지가지의 신들에게 구원을 부르짖는다"라고 특히 존스 선교사는 말합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기독교는 오직 삼위 하나님께 영광의 경배를 하는 종교입니다. 그런데도 백 년 전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한 미국인 선교사의 눈에 비친 한국인들의 모습과 오늘날의 신자들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과거보다 신앙인의 양심이 더 좋아졌습니까? 지금도 도긴개긴으로 개그맨이 말하는 도찐개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심이 있는 그리스도이라고 하면서 여전히 교회에서도 유교적인 행동방식과 문제가 생기면 주술적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무조건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보다 더 위대 하다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아버지에게 뱀을 주세요라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주어야 하는 것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무속 인이 하는 것처럼 하는 행동들은 무늬만 기독교인인지 양심에 물어 보십시오. 그냥 나는 철학적으로만 기독교인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최후의 심판 주로 오실 때는 기회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감당하심으로 사망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신앙 고백하는 신자들은 고넬료와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이요 로마 장교였지만 믿음을 소유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었습니다. 고넬료와 같은 우리는 부끄러움이 없이 담대함으로 복음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듣기 위해 고넬료는 욥바에서 머물고 있던 사울을 초청 한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한국인은 유교적이고, 철학으로는 불교인이고 문제가 생기면 주술적인 마음으로 예수님께 기도하는 자들이 되지 않도록 고넬료와 같음 마음이기를 소망합니다.

 

지난 주 강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의 말씀대로 순종한 고넬료가 베드로를 초정하여 대화를 나누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강설이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대화를 나누다”였습니다. 고넬료는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과” 베드로가 올 것을 믿고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고 하는 것을 믿고 순종하면서 생활하는 것처럼 고넬료는 베드로가 올 것을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고 따르는 것이 성도요 교회입니다. 베드로가 도착하자 로마 군대 장교인 고넬료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베드로가 자신을 초청 해준 것에 감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넬료는 로마 군대 장교로 이스라엘의 점령자입니다. 점령자가 유대인 베드로에게 마치 황제에게 경배를 하는 것처럼 절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황제가 도착한 것처럼 대하는 고넬료에게 베드로는 어떻게 합니까? 고넬료에게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넬료로부터 환대를 받은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신뢰하며 교제를 하는 것은 위법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고넬료는 점령자의 군대 장교이기 때문에 더 교제를 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심으로 고넬료가 부른 초정에 사양하지 않고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를 왜 불렀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한 베드로는 고넬료로부터 들음으로 환상에 대한 의미를 알고자 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로부터 말을 들은 고넬료는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있는 그대로 전달을 합니다. 그러면서 고넬료는 당신이(베드로) 왔으니 “잘 하였나이다”라고 하면서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전환한 것입니다.

 

고넬료만 듣고자 한 것이 아니라 친척과 친구들도 듣고자 한 것입니다. 그것을 고넬료는 “우리”라고 한 것입니다. 오늘 지팡이교회는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강설하다”라는 제목으로 강설을 듣고자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나만 잘 이해하고 ‘잘 살면 된다’라고 생각 하지 마십시오. 고넬료는 베드로의 강설을 들을 수 있도록 “우리”라고 합니다. 교회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지어져 가는 성전으로 교회 즉 신자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장성한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고넬료가 말한 것처럼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하면서 마음의 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고넬료와 함께 귀한 교제를 하면서 베드로는 입을 열어 강설을 시작합니다. 34절을 보시면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유대인이 생각했던 이방인을 위한 마음에 대한 것을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강설은 앞으로 이방인을 위한 선교의 지각 변동을 일으키기 위한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갈릴리 출신의 어부였던 제자가 이 짧은 몇 마디로 지금까지 선민의식으로 가득했던 유대인들에게도 돌이키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던 종교적이고, 인종적 편견에서 벗어나 이방인도 똑같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라는 의미는 상당히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말할 때(행8:35절)와 특히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강설하실 때처럼(마5:2절) “입을 열어”라는 의미는 곧 이어 언급될 이야기의 권위와 장중함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중함을 의미하는 선언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전했다면, 베드로는 이방인에 대한 구원을 말한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들으면 사울이 스데반을 죽인 것처럼 당장 실행을 할 정도의 선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의 마음 즉 중심”을 보십니다. 외모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외모는 율법과 종교적 제의와 관습을 지키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부르심의 구원은 무조건적인 선택에 의한 구원입니다. 내가 선행을 통해 구원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유대교만의 특정한 집단에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계속해서 확증할 수 있도록 35절에서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조심성 있게 본문을 보아야 합니다. ‘의를 행하는 사람’입니다. 잘못 된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오늘은 본문 전체를 보아야 합니다. 코끼리의 일부분인 꼬리만 만져보고 코끼리가 채찍처럼 생겼다고 생각 하는 것은 오류입니다. 전체의 몸을 보지 않으면 코끼리의 정확한 생김새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35절은 하나님은 인종 차별 없이 당신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을 받으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43절은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다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36-42절의 말씀이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이 부분에서는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담고 있습니다. 35절만 읽으면 하나님에게만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완벽주의 자만 구원하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그런 내용은 없습니다. 카톨릭이 생각하는 공로사상은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성인이라도 그는 사람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원하신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온전하신 순종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35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43절과 연결하여야 합니다. 35절에서 하나님은 모든 나라 즉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미이지 의를 행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자신이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이름을 믿을 때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것을 43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이방인 사역 그리고 고넬료와 대화를 하면서 환상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입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우선 36절을 보십시오.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이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본격적으로 고넬로와 함께 하고 있는 친척과 친구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모국어로 말한 것이 아니라 로만 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한국말을 조금 이해하는 미국인들에게 유창한 한글로 복음을 전하면 소용없을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베드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를 사용하여 전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단어가 “만유의 주”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당연히 하나님이시오 예수님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로마 사람들은 이교도의 신을 칭하는 말로 사용하였습니다. 그것을 베드로는 만유의 주를 하나님에게 적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이야기 합니다.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눅2:14절에서 천사가 한 말을 요약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고 십자가의 사건까지 요약한 것이 바로 화평의 복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과 땅의 권세를 지니신 분으로 ‘화평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화평의 복음은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화평은 하나님과 화해시키고 벽을 무너뜨림으로써 두 관계를 회복시켰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만유의 주’라고 사용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다 주가 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이방인의 신으로 알고 있는 ‘만유의 주’ 그(당신님이)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둘 사이를 가로막았던 장벽이 무너질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민족적 편견과 편애가 없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한다고 하면서 부자와 가난한 자를 나누고, 남녀가 한자리에 같이 앉지 아니한다는 뜻으로,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한 것을 알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처음에는 구별하여 예배를 했지만 지금은 구별 없이 예배를 합니다. 마치 이와 같은 것이 화평의 복음입니다.

 

계속해서 37-38절을 보시면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화평의 복음’을 위해 하신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누가는 긴 강설의 내용을 단순하게 요약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깊은 강설입니다. 그 이유는 이방인에게 베드로가 전한 복음의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베드로는 예수님과 동고동락을 한 제자였기 때문에 강설의 내용은 사실이었습니다. 누가는 ‘나사렛’ 이라는 지명과 함께 예수님을 언급하며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화평의 복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강설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아주 명료하게 전한 것입니다. 우리도 복음을 전할 때 베드로가 전한 말씀을 기억하면서 복음의 증인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과 말씀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베푸신 사랑과 은혜였습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품어야 할 가치관이요 세계관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만 하신 것이 아니라 늘 누가 함께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예수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향해 전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 후 39절을 보시면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라고 강설합니다. 죄의 형벌 가운데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이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즉 우리의 죄를 위해 나무에 달려 죽으셨지만 40절에서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즉 하나님이 3일 만에 다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화평의 복음을 전하면서 그 당시 복음의 증거자들의 핵심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없이는 기독교가 아닌 것입니다. 부활 사건의 주체가 누구입니까?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공로로 나 구원을 받았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체자라는 것을 다시 확인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사도들의 권위를 증거 하는 것이 40절입니다.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당신님과 먹고 마신 증인들에게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부활하신 후 함께 식 사를 나눌 때 주어진 예수님의 명령을 부활에 대한 복음 증인 자요 사도로 소명의식을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넬료는 로마 장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또한 부활에 대한 소식도 들었을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도 초대교회처럼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자입니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세상에서 그리고 세상이 초대교회 때 보다 더 타락해져 가는 시대에 하나님께서 불러 세운 소수의 증인입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행복입니다. 행복은 부활의 소망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의 행복을 택하겠습니까? 아니면 베드로처럼 화평의 복음이신 예수님을 따르겠습니까? 베드로의 강설은 단호합니다. 고넬료와 함께 듣는 자들은 어떤 선택을 했겠습니까? 바로 내가 내린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오직 부활하신 것을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를 향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강설하면서 42절에서는 심판하시는 분으로 말합니다.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어떻게 강조합니까?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이렇게 하신 것입니까?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베드로는 이 세상에서 하신 화평의 복음에 대한 강설을 하다가 세상의 마지막 날에 대한 것을 말합니다. 마치 솔로몬이 경험한 모든 일들을 마무리 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사람의 본문이라고 하면서 전12:13절에서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종말적 심판의 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베드로가 강설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온 마음으로 복음의 사역자인 사도의 본문을 충실히 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이제 43절을 통해 강설의 마무리를 합니다.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구약의 선지자들도 예수님을 믿는 자들도 그의 이름으로 죄 사람을 받는다는 것을 베드로가 말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가 지어낸 것이 아닙니다. 눅24:47-48절을 보시면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는 것입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베드로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 수 있도록 강설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베드로처럼 전해야 합니다. 공로 사상의 행위 복음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즉 화평의 복음으로 새로운 생명으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3장에서 특히 성전 미문에서 구걸을 하는 사람을 어떻게 했습니까? 돈과 금을 주었습니까? 나몰라 했습니까? 6절을 보시면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25-26절에서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예언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강설은 짧은 것 같지만 신약의 모든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화평의 복음으로 전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믿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죄 사함이 강설되어진 것입니다. 베드로의 강설은 복음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누구든지 사람에게 끼치는 결과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나타나는 결과가 믿는 신자들에게 주어짐으로 인간에게 가장 심각한 죄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 고넬료에게 강설한 메시지는 예수님의 사역을 요약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도행전을 통해 말씀을 전한 것과 다른 점이기도 합니다. 누가는 베드로가 전한 강설의 내용을 축약하여 기록하지만 그 날의 강설은 최고였을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도 베드로의 강설처럼 예수님께서 성육신으로 오심과 그리고 사역의 활동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죽음과 부활을 증거 함으로 성령께 그들이 깨달음을 통해 회심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성도는 존스 선교사가 말한 “조선인은 사회에 있을 때는 유교인이 되고 철학적으로는 불교인이 되며 문제가 생기면 주술적 신앙의 대상인 가지가지의 신들에게 구원을 부르짖는다"는 것이 틀리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신실하게 생활하는 교회입니다. 세상 사람처럼 그리고 무속 인처럼 될 수 없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런데도 그들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면 예수님을 왜 믿어야 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교회는 베드로처럼 화평의 복음을 강설하는 신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철학을 이야기 하는 연설이 아니라 예수님이 구원자 즉 메시야라는 것을 전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지팡이교회는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강설하다“라는 의미를 깨달아 기도하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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