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지팡이교회

오전예배강설

조회 수 352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14:19-28
강설날짜 2019-05-26

유대인들의 원정 핍박과 선교에 대한 사역 요약과 보고(행14:19-28)

 

과거나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볼 때 무풍지대와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무풍지대의 의미는 “다른 곳의 재난이나 번거로움이 미치지 아니하는 평화롭고 안전한 곳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과연 교회는 안전합니까? 참되게 믿는 신자들 즉 주님이 함께하는 성도는 안전합니다. 하지만 교회를 건물로 오해하여 예배당에 있으면 안전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예배당이 구원을 하며 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구원은 하나님이 임마누엘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과거보다 목사와 신학 교수들이 많아졌지만, 세상 사람이든 신자들이라도 어떻게 생각을 합니까? 세상 사람들 중에 말세라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종말의 시대 즉 예수님께서 재림의 주로 오실 때라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이런 시대에 자신의 마음을 보십시오, 주님만을 의지합니까?

 

지팡이 교회는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된 공동체입니다. 즉 성도가 구원함을 받은 공동체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님을 배신한 제자들을 위해 어떻게 하셨습니까?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었습니다. 주님의 진실한 사랑을 받은 자가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를 위해 직분 자를 세울 때 자주 사용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계2:10b입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입니다. 신자들을 위해 임직을 받은 분들에게 당부하는 말씀으로 사용을 합니다. 임직을 받는 분만 아니라 신자들에게도 사용하기도 합니다. 과연 이것이 적절한 표현입니까? 교회를 위해 주님께서 섬기어 주신 사랑처럼 봉사도 하고, 충성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미 우리는 교회로 부르심을 받을 때 헌신한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믿기로 한 신자들이 헌신 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하실 수 있습니다. 계2:10절의 ‘죽도록 충성’하는 것은 맞는 것 아닙니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늘 성경을 볼 때 전후 문맥을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부분만 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계2:10절 전체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잘 읽어 보시면 어떠한 마음이 드십니까? 이 말씀은 서머나 교회에 당부 즉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로마로부터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황제에 대하여 숭배를 거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마치 일제 강점기 때 일황 숭배을 거부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하면 누군가 배도 자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너희가 당하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배도 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환난과 고난 그리고 죽음 등을 당할지라도 너희는 구원함을 받은 성도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은 고난을 겪지만, 주님의 재림 날에는 ‘생명의 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해를 하도록 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한자어로 충성은 “자유로이 바치는 충실함(신의)의 의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참된 마음으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실한 마음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본분입니다. 하나님께 맹목적으로 헌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뜻을 다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믿음과 신뢰로 하나님 나라의 증인 된 제자입니다. 두 마음을 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보여 주신 분이 사도 바울입니다. 과거의 모습에서 새 사람으로 헌신 된 바울은 교회를 위해, 이방인의 사도로 신실한 마음으로 충성을 한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위해 선교를 감당하던 중 루스드라 지역에서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 즉 앉은뱅이를 고친 이야기를 누가는 기록 하였습니다. 현대시대라도 선천적으로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을 온전한 사람처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과학과 의학이 발전해도 넘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기적을 보이도록 하심으로 당신님이 누구신가를 분명하게 알린 것입니다.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으로 인해 타락한 사람이 온전하게 주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에 대하여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면서 앉은뱅이는 듣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강설을 듣습니다. 그렇다면 앉은뱅이와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함을 받은 백성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마음입니다. 말씀을 있는 그대로 듣고 있던 앉은뱅이에게 바울은 예수님처럼 명령을 한 것입니다. 선천적인 것을 다 알고 있는 사람에게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입니다.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확장될 수 있도록 바울을 통해 기적이 일어나도록 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루스드라 사람들은 눈과 귀 그리고 마음으로 기적이 일어난 것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루가오니아 방언으로(자국어) 바나바는 “제우스”고, 바울은 “헤르메스”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무엇을 하는지 몰랐지만, 루스드라 사람들이 제우스 신당에서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와 제사를 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 때야 비로소 바울과 바나바는 안 것입니다. 두 사람은 옷을 찢는 행동을 함으로 자신들도 너희들과 같은 사람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너희들의 헛된 일들을 버리게 함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복음을 강설로 전하든, 전도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만을 전해야 합니다. 자신만을 전하는 것은 사람을 속일지언정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결국, 심판을 당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강설을 들은 루스드라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고자 했던 제사를 멈춘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이 빠르게 여러 지역으로 퍼졌습니다. 루스드라 지역에는 많은 유대인이 거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명에는 어려움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먼 지역에서 루스드라까지 와서 무리들을 선동하여 사도 바울을 돌로 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9절을 보시면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이 사건은 바울이 고후11:24-26절에서 자신의 고난을 회상할 때 다시 언급을 할 만큼 가장 큰 고통을 주었던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바울을 박해하는 것도 모자라서 죽이고자 먼 지역에서 유대인들이 원정을 온 것입니다. 그들은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으로 루스드라 사람들을 충동질하여 죽이고자 한 사건입니다. 그들은 왜 원정을 왔을까? 추측을 하면 유대교에 대한 간섭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설득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을 유대교에 대한 배신자로 생각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을 알고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이번 만이 아니라 이고니온에서도 돌로 쳐 죽이고자 했지만 실패한 적도 있었습니다.

 

돌로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 즉 성 밖으로 끌어내어 내치었습니다. 과연 사도 바울은 죽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사역을 위해 바울의 생명을 보존하셨습니다. 20절을 보시면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바울은 죽음에 이를 만큼 깊은 상처를 입고 고통의 신음을 하고 있었을 자리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있던 제자들을 언급함으로 실제 일어났던 일임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온 것은 아마도 바울을 장례 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오히려 제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 견고해졌을 것입니다.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전한 복음으로 제자들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이 확장될 수 있도록 일을 감당하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성경 인물입니다. 바로 ‘디모데’입니다. 아버지는 헬라 사람이고, 어머니는 유대 사람인 루스드라 사람입니다. 그 이야기를 행16장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님의 일꾼을 사용하시어 복음을 감당하도록 하십니다. 바울이 스스로 일어났다는 것은 거의 죽은 자와 같은 모습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살리신 것입니다. 마치 바울이 부활한 것같이 누가는 묘사를 한 것입니다. 바울이 일어난 후 도망을 치지 않고 성안으로 들어간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의 목숨보다 하나님의 복음을 더 중요시 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행20:24절에서 자신에 대한 고별사를 기록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우리도 이런 각오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이 회복되도록 하심으로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06e06a10.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714pixel, 세로 438pixel 생명을 보존한 바울은 루스드라를 떠나 어디에 도착했습니까? 더베입니다. 루스드라로부터 약 93킬로미터 거리에 있습니다. 이곳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21절을 보시면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입니다. 이 기사를 아주 간략하게 기록합니다. 이미 두 사람은 행14:7절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다시 간것입니까? 저자는 이 복음 전파의 결과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다고 21절에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도 바울의 선교 방식이 있습니다. 복음만 전하고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도시를 다시 돌아보면서 제자들의 신앙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다시 간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많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모습을 보면 믿음은 이처럼 놀라운 것입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은 복음을 전했던 장소로 가면서 연약한 교회를 격려하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바울의 1차 선교 여행 결과에 대해 누가는 많은 제자를 얻었다는 성공적인 성과를 언급합니다. 바울의 선교 전체가 성공적이었다는 것을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독자들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는 힘이 되도록 한 것입니다. 누가가 아주 간결한 마무리를 하는 것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뿌린 복음의 씨앗이 어떻게 결실을 맺고 있는지 확인하면서도 바르게 성장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이야기를 22절에서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바울이 박해를 당한 것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제자들도 ‘많은 환난’을 예상했을 것입니다. 지팡이 교회도 당연히 ‘마을을 굳게’ 해야 합니다.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는 바울의 권면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당해야 합니다. 바울은 제자들에게 믿음으로 인내하라고 정확하게 말합니다. 신자들이 받을 고난을 필수적인 것으로 제시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사도 바울과 같은 육체적인 고난보다 더 무서운 것이 물질에 대한 욕망이라고 생각합니다. 물질에 대한 욕망이든, 육체적인 고난이든 무엇이 되었든지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오히려 복음이 전해지도록 하는 씨앗과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는 고난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인 신자들은 하나님의 가족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이 와도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이니 승리하라는 격려의 권면입니다.

 

바울은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갈 수 있도록 회당의 패턴을 따랐습니다. 이런 얼마 안 된 교회들에도 처음부터 장로들이 세워졌다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오늘날과 다른 시대적인 환경으로 보아야 합니다. 성급하게 장로들을 세운 것이 아닌가 하지만, 갓 태어난 교회들의 특성을 인식해야 합니다. 23절을 보시면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입니다. 오늘날의 목회자와 같은 기능을 하며 성도들을 돌보는 자로서 언급된 점으로 보아(딛1:5, 약5:14) 사실상 목회자였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장로교 헌법에는 장로는 가르치는 목사 즉 장로와 돌보는 장로로 나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장로를 아무렇게 세운 것이 아닙니다. 금식 기도하며 세웠습니다. 장로들을 세움으로 교회를 섬기고 인도하는 일에 협력하도록 한 것입니다.

 

더베에서 장로를 세운 후 바울과 바나바는 24절에서 어디로 이동을 합니까?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음을 간략하게 언급함으로 빠르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간 곳은 25절을 보시면 어떻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까? “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버가에서 말씀을 전한 후 바울과 바나바는 앗달리아로 방향을 바꾸어 진행합니다. 왜 방향을 바꾸어 앗달리아로 갔는지 그 이유는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버가에서도 복음을 전한 점으로 보아 귀환 길에도 쉼과 휴식 없이 전도 활동을 계속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 일행은 전도의 목적을 갖고 앗달리아로 갔을 것입니다. 잇달리아는 항구 도시로 지금은 ‘아달라’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습니다.

 

앗달리아에서 복음을 전한 후 바울과 바나바는 어디로 왔습니까? 안디옥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한 지역이요 교회이기도 합니다. 26절을 보시면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맡긴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그들을 위한 하나의 교회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것을 다시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교회를 모아 무엇을 했습니까? 27절을 보시면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통해 행하신 일들을 보고한 것입니다. 여기서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교회는 예배당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배당이 어떻게 부른다고 올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성전을 파괴하신 후 이제는 성전은 없습니다. 성전은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교회입니다. 우리말 번역에는 ‘교회들’이라고 되어 있지만, 원어로는 단수 즉 교회입니다. 안디옥 지역에서 무수한 신자들이 각기 다른 곳에서 모였던 것이 분명할지라도, 여기서 단수를 사용하는 것은 그들이 함께 모였을 때, 그들은 하나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입니다. 하여튼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이 행한 업적을 자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하신 일들 즉 구원의 역사를 설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한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이러한 사역은 행15장에서 이방인의 개종을 중심으로 회의 됩니다. 할례와 이방인의 구원문제이기도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사역을 보고한 후 적지 않은 기간을 안디옥에서 보냅니다. 27절을 보시면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이런 쉼과 휴식은 다음 선교를 위한 안식이었을 것입니다. 이 기간에 바울과 바나바가 환영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마음을 굳게 하여 믿음“에 거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 빌립보, 고린도, 에베소 등과 같은 큰 도시를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큰 도시를 통해 작은 도시로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이 잘 모이는 회당에서 전함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구원자라는 것을 전파한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실하기 위해 복음에 충실했습니다. 전하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환난’에 대한 특별한 마음가짐을 권면하는 것을 보면 오늘날의 교회에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교회는 사도 바울이 걸어왔던 발자취를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이 당한 환난은 자신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이 미워하는 것이고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일부 교회는 예수님을 믿으면 복 받는 것만 전하는 것을 보면 속상하기도 합니다.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신자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런데도 다단계를 하면서 교회를 성장시키겠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비극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무엇을 의지합니까? 세상의 돈과 권력입니까? 우리가 붙잡아야 하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바울은 진정한 구원이 무엇인지를 알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한 것입니다. 그것을 알기에 믿음에 굳게 서라는 권면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입니다. 시민권자가 갈 수 있는 곳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사망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는 영생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기 때문에 믿음에 굳게 서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같은 유대인들로부터 돌로 쳐 죽임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능히 심판 하실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받은 환난과 고난 등은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배우고자 합니까? 세상이 볼 때는 배울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기대할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바울은 어리석은 바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가는 바울이 핍박과 고난을 받는 것을 보면서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TAG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설교자 성경본문 강설날짜 조회 수
144 복음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부제: 마게도냐인의 환상) 전은덕 행16:6-10 2019-07-14 781
143 바울이 디모데와 함께..... 전은덕 행16:1-5 2019-07-07 498
142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다른 사역의 길로 가다 전은덕 행15:36-41 2019-06-30 535
141 예루살렘 공회 결과에 대해-이방인에게 편지를..... 전은덕 행15:22-35 2019-06-23 447
140 예루살렘 공회의 의장인 야고보의 연설과 결정 전은덕 행15:13-21 2019-06-16 451
139 예루살렘 공회의 소집 전은덕 행15:6-12 2019-06-09 400
138 예루살렘 교회 회의의 발의 전은덕 행15:1-5 2019-06-02 383
» 유대인들의 원정 핍박과 선교에 대한 사역 요약과 보고 전은덕 행14:19-28 2019-05-26 352
136 루스드라에서 전도(선교)하는 사도 바울과 바나바 전은덕 행14:8-18 2019-05-19 558
135 이고니온에서 전도하는 바울과 바나바 전은덕 행14:1-7 2019-05-12 485
134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선교를(3)..... 전은덕 행13:42-52 2019-05-05 422
133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선교를(2)..... 전은덕 행13:26-41 2019-04-28 405
132 부활에 참여하는 성찬식 전은덕 요13:20-30 2019-04-21 479
131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선교를..... 전은덕 행13:14-25 2019-04-14 528
130 1차 선교 여행을 파송 받은 사울과 바나바 전은덕 행13:1-12 2019-04-07 477
129 헤롯이 죽다 전은덕 행12:18-25 2019-03-31 654
128 베드로 구출에 대한 교회의 반응 전은덕 행12:13-17 2019-03-24 315
127 (사도 중에) 최초의 순교자 사도 야고보와 베드로의 투옥 그리고... 전은덕 행12:1:12 2019-03-17 549
126 최초의 이방인 안디옥 교회 전은덕 행11:19-30 2019-03-10 638
125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한 내용 전은덕 행11:1-18 2019-03-03 479
Board Pagination Prev 1 ... 5 6 7 8 9 10 11 12 13 14 ... 17 Next
/ 17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