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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15:22-35
강설날짜 2019-06-23

예루살렘 공회 결과에 대해-이방인에게 편지를.....(행15:22-35)

 

사람들은 “복”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복을 위해서라면 점도 보고, 이웃을 도와주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만 복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성도들 중에 삼박자 축복을 좋아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성경적인 것입니까? 요한삼서는 사도 요한이 가이오에게 보낸 편지 글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개역개정은 “편지하노라”고 하지만, 원문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왜 편지라는 표현을 한 것입니까? ‘편지 글’이라는 것을 알게 하려고 삽입을 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을 장로라고 소개를 하면서 가이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가이오라는 이름은 “기뻐하는”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 놀이를 하면서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고 합니다. 가이오는 글을 읽으면서 웃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이용하여 말 놀이를 하는 사도 요한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가이오에게 애정 어린 표현을 사용함으로 특별한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가 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서로 예수님에 대한 동일한 진리를 믿는 성도였습니다. 지팡이교회 성도이든, 아니든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은 누구나 가이오와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삼박자 즉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가이오에게 말을 합니다. 과연 삼박자 축복입니까? 어떻게 보면 삼박자 구원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여행하는 사람에게 좋은 길로 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마치 인생에서 성도의 길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좋은 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입니다. 이것은 진리의 길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문장은 모든 일에서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이 말씀에 동의하면서 생활합니까?

 

가이오는 하나님 나라의 길을 충성스럽게 잘 가고 있는 성도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영적인 삶’을 생활하면서 순조로운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영지주의자들에 대해 경고를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가이오는 영지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를 보면 영지주의자들 때문에 힘든 시대였습니다. 그들은 몸의 부활을 믿지 아니했습니다. 이단들은 영과 물질의 분리를 가르치고 육체의 삶을 멸시했습니다. 그래서 금욕주의와 고행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사도 요한은 가이오에게 육체가 강건하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가이오를 위해 하나님 나라의 길을 잘 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예수님에 대한 진리를 함께 누리면서 주의 길을 잘 가자는 것입니다. 삼박자 축복과 사실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가이오와 같은 마음으로 주의 길을 잘 가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 강설은 “예루살렘 공회의의 의장인 야고보의 연설과 결정”이었습니다. 할례와 율법에 관한 주제로 예루살렘 공회의가 열린 후 변론이 많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변론이 있던 중에 사도 베드로가 연설했습니다. 연설이 끝난 후 바울과 바나바가 자신들에 대한 사역을 보고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듣고 있었던 야고보 의장은 “형제들아” 하면서 자신의 말을 “들으라”고 했습니다. 의장인 야고보는 연설을 통해 결정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의 연설은 베드로의 연설과 일치 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아모스 선지자의 글을 인용합니다.(암9:11-12) 구약의 말씀을 인용함으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듣고 믿을 때 구원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선지자들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유대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을 바르게 해석하여 주었습니다. 아모스의 예언은 유대주의의 배타적 세계관이 무너지고 메시야에 의해 재건된 세계관으로 전환됨을 강조하는 것임을 전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믿는 신자들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야고보의 연설은 바울과 베드로와 일치한 것으로 이방인에게 복음이 확장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구원과 관련은 없지만, 이방인과 유대인들의 서로 다른 문화적인 차이를 위해 야고보는 중재합니다. 복음이 확장되는데 어려움을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종한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에게 할례와 율법 준수를 하라고 하면서 괴롭히지 말라고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유대인들은 우월감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임을 알고 이방인과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에게 편지를 사용하여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도록 편지를 보내라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이방인의 관습이지만, 서로 사랑 안에서 협력하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공회의에서의 결과는 일치함으로 서로 수용하였습니다. 바로 그것을 오늘 본문 22절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야고보가 의장이었지만, 회중의 통치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열리는 공동의회와 비슷합니다. 의장은(당회장, 바른 용어는 공동의회 의장) 목사이고, 회중은 세례를 받은 성도입니다. 야고보가 회의에 관해 결정하였지만, 승인은 예루살렘 공회의에 참석을 한 신자들이 한 것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며 교회요 성도인 신자들은 지혜를 하나님께 의지하면서 최종적인 결정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참된 모습입니다. 그러면서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을 비롯한 여러 지역으로 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을 알리고자 합니다. 즉 편지를 전달할 수 있는 중요한 인물을 선정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였습니다. 바사바에 대한 자료는 찾기가 어렵습니다. 아마도 사도의 후보로 올랐던 요셉 바사바(행1:23)의 형제로 생각됩니다. 실제 이름은 유다이고, 별명은 바사바로 “안식일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와 함께 전달자로 선출된 실라는 제2차 선교여행의 동역자가 됩니다. 그는 바울처럼 로마 시민권자로서 “실루아노”로 불립니다.(고후1:19, 살전1:1)

 

두 사람을 통해 전달될 편지는 아주 중요한 공회의에 대한 공식적인 서한이었습니다. 편지의 발신자와 수신자는 누구였습니까? 23절을 보시면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발신자들 즉 사도와 장로는 이방인과 같은 ‘형제들’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면 편지의 내용은 무엇인지 같이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24절을 보시면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입니다. 사도와 장로는 먼저 예루살렘 교회에 소속된 어떤 자들에 의해 이방인 형제들을 괴롭게 하고, 마음을 힘들게 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에 대한 사과의 글을 먼저 쓰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와 장로의 지시 없이 이방인을 힘들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정식적인 이야기도 아니며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승인을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방인 지역에서 복음을 확장하도록 애쓴 바울과 바나바를 소개합니다. 25-26절을 보시면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가 공식적으로 보증하는 선교사임을 확인하여 준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이방인들이 그들의 말을 믿을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 만큼 예루살렘 교회의 권위와 신뢰가 높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에는 사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에 의해 최초의 교회가 설립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부터 교회는 이방인 지역으로 확장되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확장될 수 있도록 한 바울과 바나바를 사도와 장로는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35회 사용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오늘 처음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공식적인 신앙고백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복음이 확장될 수 있도록,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이요 하나님 나라를 향해 길을 가고 있는 자세이기도 합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바울과 바나바를 먼저 언급한 후 27절을 보시면 누구를 언급합니까?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예루살렘 교회는 공회의에 대한 결정에 대한 편지를 ‘유다(바사바)와 실라’를 통해 전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인물을 통해 예루살렘의 공식적인 공문서를 보낸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설명하고 확증하는 중대한 사역입니다. 편지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질문할 것에 대해 답변도 해야 하는 임무입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공식적인 절차 없이 어떤 자들에 의해 ‘할례와 율법 준수’를 전한 것에 대하여 바로잡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들은 이방인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이고, 마음을 혼란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다와 실라를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함으로 공회의에 대한 결정을 알리고자 한 것입니다. 또한, 이방인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함으로 복음이 확장될 수 있도록 섬기는 것입니다.

 

이제 핵심적인 결정 사항을 28-29절에서 소개합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여기서 우리는 ‘성령과 우리’라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공회의는 성령의 인도하에 결정한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성령께서 예루살렘 공회의와 함께 하시면서 의사 결정을 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유다와 실라를 보내게 된 결정권자 즉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의 주체가 곧 성령과 자신들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 되신 주님이 함께하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신 결정에 모두 완벽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이 요긴한 것’이라고 함으로 그것의 기원이나 권위에 대한 모든 의혹을 제거하고자 합니다.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서로 사랑 안에서 교제하고 하나의 교회로 생활할 수 있는 것을 언급합니다. 지난주에 유대인들이 이방인에게 편지를 보낸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것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입니다. 4가지 금지 조항 외에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 교회에 요구하는 것은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서로 협력하여 믿음 안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방인들에게 정중한 요청이요 최소한의 노력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알 수 있지만, 이방인도 예루살렘 교회처럼 같은 형제요 우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 사랑함으로 존중하면서 신앙의 길을 함께 가자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덕을 세우기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신자들이 실천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식탁 교제를 힘들게 하지 아니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은 먹어서는 안 됩니까?라는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다고 권면하기 때문입니다.(고전8:5-8) 하지만, 이러한 행동으로 상처를 받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먹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형제를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품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보낸 글을 읽은 이방인들은 어떠했습니까? 30-31절을 보시면 “그들이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입니다. 이방인들도 위에서 언급한 4가지의 금지 조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공회의에 대한 결정이 자신들에게는 위로의 말이고, 기쁨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다와 실라를 통해 공회의에 대한 결정이 잘 전달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교적 기독교인들의 공격에 대한 승리로 여기고 당당한 기독교인으로 새로 태어남을 경험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이러한 대표들의 활동을 32-33절에서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라고 기록합니다. 유다와 실라는 서로 협력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권면과 위로의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여기서 그들을 가리켜 ‘선지자’라고 합니다. 아마도, 유다와 실라가 이방인 신자들을 격려하게 된 것에 대한 권위와 정당성을 설명하기 위해,누가는 그들의 신분이 ‘선지자’라고 표현한 것 같습니다. 그들은 견고한 믿음을 북돋우도록 권고하면서 성경의 가르침을 잘 전달한 것입니다.(참고로 성경이 다 기록된 후 선지자는 없어진 것으로 봅니다.) 유다와 실라가 얼마 동안 지내다가 전송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는 언급을 함으로써 누가는 유다와 실라의 활동이 호의적인 반응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는 제2차 선교여행을 위한 기쁨이 되었을 것입니다.

 

유다와 실라는 공회의에 대한 결정을 이방인들에게 잘 전달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35절을 보시면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고 합니다. 두 사람은 복음의 확장을 위해 양육의 가르침과 전도를 위해 전파했습니다. 이제 안디옥 교회는 더 많은 일꾼이 세웠졌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두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해야 할 임무이기도 합니다. 또한, 할례와 율법 준수에 대한 문제로 어려움을 당했지만, 이제는 해결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기 위해 고넬료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예루살렘 공회의가 열리게 하심으로 이방인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확증한 것입니다. 그 회의를 통해 사도와 장로들만의 특권자만의 회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으로부터 어려움 그리고 이단들과 여러 가지로부터 힘든 가운데 있지만, 교회의 회의를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의지하지 아니하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실 때 예루살렘 공회의와 같은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공회의는 많은 변론이 있었지만, 서로 존중하고 배려했습니다. 결국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하나가 된 힘이 되었습니다. 서로에게 걸림돌이 되는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서로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고백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기초를 놓은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이방인들이 잘 알수 있도록 사도와 장로는 유다와 실라를 파송했습니다. 교회는 지혜로운 판단을 내렸을 뿐 아니라 이를 편지로 작성함은 물론 예루살렘 교회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두 지도자를 보냄으로 결국 기쁨이 되도록 했습니다. 그들의 말은 위로의 말이었고, 권면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세상으로부터의 즐거움과 권면을 듣는 것보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순간부터 나의 삶은 완전히 변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과거의 도덕적인 규범에 얽매여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새 사람을 입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야 합니다. 과거에는 수동적인 사람이었다면 이제는 능동적인 삶을 생활하면서 복음이 확장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바울은 회심한 후 능동적인 전도자가 되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보물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었습니다. 나를 통해 보물이 무엇인가를 알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종교적인 사람과 진실한 그리스도인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합니다. 오늘 우리는 강설을 들음으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필요한 은혜를 주심으로 교회가 성장하도록 하실 것을 믿습니다. 각 사람을 온전하게 세워주실 것을 믿으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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