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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15:36-41
강설날짜 2019-06-30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1Kk7eawcTzk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다른 사역의 길로 가다(행15:36-41)

 

“한국어 기초 사전은 대한민국 국립국어원이 만든 한국어 사전으로, 외국인 한국어 학습자를 위한 인터넷 한국어 학습용 기초 사전입니다. 한국어 학습 수요가 많은 지역 또는 국가의 언어로 한국어-외국어 학습사전을 만들 때 번역의 기반이 되는 사전”입니다. 외국인도 한국인처럼 생활하려면 한국어 기초 사전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런 것처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바른 이해를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복음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로로 내 영혼이 구원받았으니 오늘 내가 할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과거의 사건(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으로 인해 미래가 바뀌었기에(구원과 심판) 오늘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살아갈 것을 요구하는 승리의 소식입니다.

 

믿음은 복음에 대하여 지적, 정서적, 의지적으로 수용하여 변화되어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믿음을 이렇게 오해를 합니다. “너는 예수 믿고 구원받았어?”라고 질문하면 “네”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인해 달라진 육체적, 사회적, 경제적, 신앙적, 영적 삶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예수 믿고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으로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자유는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 의로운 삶을 향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과 성경을 잘 모르는 신자들은 자유를 오해합니다.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은 사람의 삶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거룩한 것처럼 성도도 거룩하고 순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안식을 누리면서 예배를 합니다. 여기서도 안식에 대해서 오해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오해를 합니까? 힘들게 일하며 사는 것을 멈추고 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안식이란 하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주권 아래 세상을 통치하는 삶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교회는 복음을 믿음으로 자유를 얻은 백성이 안식을 경험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렇지만 오해를 합니다. 주일에 모여서 예배하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를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구원함을 받은 신자들이 안식을 누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기 위해 모이는 장소는 예배당입니다.

 

복음, 믿음, 구원, 자유, 안식, 교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같은 말 같지만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성경을 바르게 배우는 것이 이처럼 중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언어적 혼란은 의미의 왜곡을 가져오기에 글로 정리해보았습니다.

 

지팡이교회는 바른 용어를 알고 사용하며 하나님 나라의 삶을 누리면서 주의 길을 잘 가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 강설은 “예루살렘 공회 결과에 대해 이방인에게 편지를.....”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공회의의 결과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수용하였습니다. 할례와 율법준수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방인 지역에 알리기 위해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를 보내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의 결과를 전달해야 하는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입으로만 전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공식적인 서한 즉 편지가 있었습니다. 그 편지에는 발신자와 수신자가 있었습니다. 공식적인 문서가 아니면 마치 어떤 유대인들처럼 교회 즉 신자들을 힘들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식적인 문서인 편지를 보면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이라고 하면서 이방인들도 주 안에서 한 형제라는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바울과 바나바를 소개함으로 그들은 공식적인 선교사임을 확인해 준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하여질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라고 칭합니다. 우리도 그들과 같은 마음으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일꾼입니다.

 

성령께서 예루살렘 공회의와 함께 하시면서 ‘성령과 우리’라고 함으로 누구든지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신 결정에 모두 완벽하게 순종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방인들에게 정중한 요청이요 최소한의 노력을 요구합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리스도를 믿으면 서로 하나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서로 덕을 세우기 위해 사랑함으로 존중하면서 신앙의 길을 가자는 것입니다. 이런 편지의 글을 읽은 사람들은 “위로의 말을 기뻐”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최초의 예루살렘 총회의 결과였습니다.

 

예루살렘 공회의의 결과는 바울과 바나바가 다시 전도 여행을 할 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파송한 안디옥 교회에서 다시 길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과 함께 전도 여행을 할 수 있는 일꾼을 데리고 가고자 했습니다. 오늘 본문 36절을 보시면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유다와 실라가 예루살렘으로 떠난 이후로 며칠 후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1차 전도 여행을 했던 지역을 다시 방문하고자 바나바에게 요청을 했습니다. 선교지에 대한 재방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방문을 하고자 한 이유는 아마도 자신들이 전도한 신자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살피고, 권면 하고자 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바울과 바나바는 새로운 지역으로 2차 전도 여행을 위한 준비보다 오히려 단순히 그들이 갔었던 도시들에 다시 가서 신자들을 양육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바울이 바나바에게 제안을 한 것입니다. 전도 여행을 준비하면서 자신들이 2차 전도 여행을 유럽으로 갈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아시아가 아닌 유럽으로 가게 된 것입니까? ‘드로아’라는 지역에서 마케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기 전까지는 유럽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인도로 복음이 유럽으로 전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의 인생길에서 내가 계획을 하지 않았지만, 결과를 보면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다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젠가 알게 하십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바나바는 바울의 제안에 긍정적 이였습니다. 그래서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자고 한 것입니다. 37절을 보시면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나바는 자신의 사촌을 데리고 가고자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가 요한도 데리고 ‘가자고’라는 문장을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원어를 좀 더 살리어 읽으면 이렇습니다. 바나바는 이미 행하기로 확고하게 작정 된 마음의 강력한 의지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바울의 제안을 기뻐하면서 마가 요한을 꼭 데리고 가야 한다고 것입니다. 마가 요한은 1차 여행 때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까지 동행하였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적이 있습니다. 마가가 예루살렘에서 안디옥까지 왔는지 아니면 바나바가 그를 데리러 예루살렘으로 간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결국, 마가 요한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는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지역 신자들이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구체적인 삶에서 바른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고자 한 것입니다. 새로운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복음을 받아들인 신자들이 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양육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날과 같은 교회로 성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나바는 바울의 제안을 기뻐했지만, 둘은 마가 요한으로 인하여 결국 다른 선택의 길을 가게 됩니다. 38절을 보시면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마가 요한처럼 큰 실수를 한 사람을 다시 선교사로 보내야 하는가? 반대로 마가 요한을 선교사로 회복시키지 말고 신앙생활을 하라고 권면해야 하는가? 입니다. 이 문제는 그때마다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참된 신앙인으로 회복될 때 그리고 선교사로서 다시 보낼 힘이 있을 때입니다. 바울은 아직 그가 참된 선교사가 될 수 있는 시기가 아닌 것으로 보고, 전도 여행을 떠나기는 아직 아니라고 생각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차 전도 여행 때 마가 요한이 중도에서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생각할 때 마가 요한이 아직 선교에 대한 소명 의식이 부족하고 용기가 없다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만약 동행하면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마가 요한은 훗날 바울의 동역자로서 바울의 사역에 많은 도움을 줌으로써 바울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골4:10, 딤후4:11, 몬 1:24)

 

바울과 바나바는 전도 여행을 잘 준비하던 중 마가 요한을 데려가는 문제로 인해 각자 다른 길을 떠나게 됩니다. 39절을 보시면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이 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아픕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서로 심히 다툰 것입니다. 서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읽을 때 ‘다투다’로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원문을 살리어 보면 “병이 발작한다든지 할 때의 그 발작이라는 말의 어원이 되는 말”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심히 다투어’라고 할 때의 그 헬라 말을 쓴 것을 보면,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될 정도로 상상할 수 없이 다툰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주권 안에서 이 분쟁의 결과로 그들의 선교 확장은 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큰 뜻을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40절을 보시면 유능한 선교자 바울과 바나바는 서로 다른 길로 출발을 합니다.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바울은 자신과 함께할 사람 즉 실라를 선택합니다. 실라는 예루살렘 사도와 장도들로부터 공식적인 문서를 전달할 사역자로 선택되었던 인물입니다. 그 역할을 잘 했기 때문에 그를 선택한 것 같습니다. 실라의 사역을 보면서 그의 탁월한 재능을 본 것 같습니다. 그들은 서로 안디옥에서 이방인을 위한 사역을 잠시 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안디옥 교회로부터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두 사람은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바울이 안디옥을 떠나는 장면 묘사는 바나바와 매우 대조됩니다. 바나바는 매우 화난 사람이 훌쩍 떠나 버린 듯한 묘사를 39절에 했다면, 바울은 안디옥 교회 신자들로부터 환송과 축복을 받으며 떠나는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바울을 지지하는 태도를 보인 것입니다. 아마도 사도행전의 저자는 바울에게 초점을 맞추고자 바울의 비중을 높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오늘 본문 이후부터는 이름이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2차 전도 여행을 어디로 출발합니까? 41절을 보시면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입니다. 바나바는 구브로 즉 바울과 처음으로 같던 지역으로 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차 전도 여행을 했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간 것입니다. 그곳에 교회들을 즉 신자들을 견고하게 했습니다. 견고하게 했다는 것은 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양육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선교지를 재방문하고자 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주 안에서 하나가 된 성도님, 오늘 말씀을 통해 지팡이 교회는 우리가 하는 일 가운데 사람이 보기에 완전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받으실 만한 것이라고 자부하는 일이라도 그것을 완전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정도의 차가 있을지언정 항상 거기에 결핍과 부족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서로 좋아서 결정했다고 하지만, 진실로 하나님의 뜻과 같은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바나바가 다른 사역의 길로 가게 하심으로 복음을 확장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섭리의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바울은 이미 세운 교회를 돌아보고 그들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려는 의도가 있었으나 하나님은 2차 여행을 선교 확장의 계기로 삼으셨습니다. 바울이 아무리 일을 잘한다 해도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를 온전하게 다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 잘했다 잘못했다 하는 판단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주님이 일하십니다. 어떻게 일하시는가 하는 것은 주님의 소관입니다. 우리는 따라갈 뿐입니다. 그저 순종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율법이나 아니면 나 개인의 기준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하심 자체를 판단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에 얽매여서도 안 되고 또한 율법에 얽매일 수 없는 자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다시 확인된 분명한 진리,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얻는다는 이 분명한 사실에 어떤 율법도 추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여기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었다는 것은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복음이 확장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참고로 예수님을 믿으면 성격이 변해야 한다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 요한 때문에 심히 다툰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온전하게 예수님처럼 신자들의 성격이 바뀝니까? 인격의 변화가 과연 가능합니까? 근본적으로 인격의 변화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길 때 변화된 것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 우리를 주장하셔서 육체의 원하는 바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그 순간에 성령의 열매가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우리는 변화되었다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사람이 변화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가 성령에 의해 맺혀질 뿐입니다. 그것이 다른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안지키고 하는 것으로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목표가 다르고 원리가 다르다는 차원에서 다르다는 것이지 세상에서 무엇을 지키고 사는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과는 다른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목표를 가지고 주의 은혜로 사는 자입니다. 즉 다시 말해서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서 살지만 예수님을 믿는 신자는 예수님을 위해서 생활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과 다른 차원으로 사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다른 길로 복음을 확장했지만, 같은 마음으로 주의 일을 감당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하면서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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