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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17:16-21

바울이 아덴에서 무엇을 했습니까?(행17:16-21)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한 분으로 시작하여 열두 제자, 칠십인 전도대 그 이후 박해로 인하여 초대교회는 힘을 다해 복음을 전하는 복음의 전도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난을 감당하면서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이유는 구원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나라든지 복음이 들어갈 때는 고난을 받았습니다. 고난을 겪으며 교회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면서 세워졌습니다. 교회는 고난을 받아서 이곳저곳으로 흩어졌지만, 오히려 교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오직 메시야로 믿는 지팡이 교회는 무엇인지 알고 있을 것을 믿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놀랍게도 온 누리에 복음이 확장되도록 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그것도 모르면서 박해를 했지만, 온 누리에 교회가 세워지도록 했습니다. 행1:8절을 아실 것입니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사도 바울이 스데반을 순교하도록 한 장본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죽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박해를 받으면서 복음을 전하리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군가를 안 바울은 자신을 헌신하면서 교회가 세워지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바울만 교회를 세워지도록 한 것이 아니라 믿는 신자들은 어느 곳에 가든지 흩어져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오늘 우리도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가 급속히 성장하도록 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박해였습니다. 믿음이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하는 힘을 나에게서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와 같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박해를 받으면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여 교회를 세우니 마치 잡초와 같았습니다. 이런 믿음의 선배님들에 의해 오늘도 우리는 굳건하게 교회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힘든 길이지만, 함께 교회를 세워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지난주 강설은(설교) “베뢰아에서 사도 바울이 무엇을 했습니까?”였습니다. 매주 이렇게 반복하여 알려주는 것은 반복적인 효과로 성경을 좀 더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 주 강설과 연결되는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저자들은 글을 쓸 때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한 후 좋은 결과를 얻었지만, 그곳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베뢰아로 이동을 한 것입니다. 늘 바울은 새로운 지역으로 이동을 하였지만, 놀랍게도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와 다르게 베뢰아는 신사적이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성경이 과연 무엇을 말하고자 관심이 많았습니다. 지팡이 교회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신사적인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중에 “귀부인”도 있었습니다. 복음이 확장되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입니다. 복음이 확장되어 가고 있는 가운데 데살로니가 사람들은(박해를 했던 자들) 소식을 듣고 베뢰아로 온 것입니다. 그러면 데살로니가에서 있었던 것처럼 소동이 일어나야 했지만, 베뢰아 사람들은 소동도 하지 않고 성경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흔들리지 아니한다는 것은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가도록 하는 힘이 있습니다. 바울은 베뢰아를 떠나 새로운 지역으로 이동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강설로 들어야 하는 “아덴”입니다.

 

아덴은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세계 3대 도시였습니다. 오늘날 프랑스, 뉴욕과 같은 즉 상징성이 있는 고대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명의 발상지로 철학, 문학, 예술 등의 중심지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 등이 살았던 지역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좀 더 쉬울 것 같습니다. 하여튼, 아덴은 데살로니가처럼 자유시로 로마는 인정하여 주었습니다. 로마는 아덴을 자유시로 인정함으로 자치적으로 조직과 법령을 실행해 나갈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독립성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덴은 우상의 숭배도시로 유명하였습니다. 로마의 문인인 페트로니우스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아덴에서는 사람을 만나기보다 신을 만나기가 더 쉽다”라고 했습니다. 아덴은 사람보다 우상이 더 많았다는 것을 보면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바울이 이 도시를 방문하였을 때는 찬란했던 옛 영광이 사그라든 뒤였지만, 화려한 명성만은 계속 지속하고 있던 터라 그 도시민들의 자부심은 대단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보시면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아무리 화려하고 학문적인 것이 있어도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수치스러운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우상의 도시인 아덴에서 디모데와 실라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들은 베뢰아에서 어린 교회로 성장하고 있는 신자들의 신앙을 돌보도록 한 것입니다. 그 일이 어느 정도 잘 마무리되었을 것입니다. 그 일을 잘 수행한 디모데와 실라를 바울은 아덴에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상을 보면서 격분한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격분이라고 읽지만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마음에서 진심으로 나오는 한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덴의 모습을 본 바울은 철학과 학문의 도시인 그곳에서 변론합니다. 17절을 보시면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바울이 변론을 하고자 했던 이유는 우상의 도시인 아덴을 보며 격분한 마음으로 그들이 복음을 듣고 돌이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하나님을 아는 자들과 도시의 광장에서는 시민들과 논쟁을 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동안 해 왔던 강설(설교)을 생각할 때 구약의 핵심 주제인 오실 메시야와 오신 메시야 즉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성육신으로 오심으로 고난과 부활로 성취하셨다는 것을 전한 것입니다. 우상의 도시인 그곳에서 참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장소가 어느 곳이 되었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우상을 섬기는 모습을 보고 있는 사도 바울의 마음을 잘 드려다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이 지팡이 교회도 있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이 아덴을 방문하였을 때는 찬란했던 옛 영광이 사그라든 뒤였지만, 화려한 명성만은 계속 지속하고 있었습니다. 과거의 영광을 자부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회당과 장터에서 복음을 자세하게 매일같이 전했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중요한 것은 메시야가 누구신가를 전함으로 지상명령을 감당한 것입니다. 우상의 도시인 그곳에서 마치 예레미야 선지자와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전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강설을 들은 아덴에서 생활하고 있던 철학자들의 반응을 기록한 것이 18절입니다.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아덴은 철학의 도시였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18절이기도 합니다. 그 도시에는 에피쿠로스와(창시자는 에피쿠로스) 스토아(창시자는 제논) 철학이 유명하였습니다. 에피쿠로스 철학은 쾌락을 삶의 최고의 선으로 여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은 없는 것이고, 창조를 부인했습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은 이 세상은 원자 또는 분자의 충돌 때문에 생겨났으므로 물질로 이루어진 것 외에는 믿지 아니했습니다. 특히 사후의 심판과 내세를 믿지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죽은 다음에는 아무것도 없으니 먹고 마시자”와 같은 향락주의로 전락하기도 했습니다. 스토아학파는 아덴 광장에서 제자들을 모아 자연과 일치하는 삶을 가르친 데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스토아 철학도 에피쿠로스처럼 이 세상은 물질적인 존재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점은 물질적인 존재의 시작은 신에게서 기원했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금욕적이고 범신론적이며 사후의 심판이나 내세를 믿지 아니했습니다. 두 학파에 대해서는 인터넷에 더 자세하게 나와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당대와 유명한 철학자들과 대화를 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을의 말을 들었던 철학자들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바울을 ‘말장이’라고 한 것입니다. 말장이는 원래 곡식을 쪼아먹는 새를 뜻하였으나 후에 쓰레기를 주워 모으는 사람을 칭하였습니다. 바울은 마치 새가 씨앗을 쪼아 먹는 것처럼 개념들을 쪼아 먹은 뒤 그 개념들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내뱉는 자라고 한 것입니다. 오늘 본분에서 말장이는 바울을 극단적인 조롱과 멸시의 의미로서 사기꾼이나 돈벌이를 하는 자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상의 도시였기 때문에 바울은 이방 신들을 전하는 자로 생각한 것입니다. 사후 세계를 믿지 아니했기 때문에 바울이 전한 부활을 믿지 아니한 것입니다.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 일부 철학자들은 바울이 전한 ‘ 예수와 부활’을 전한 것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디로 데리고 갑니까? 19절을 보시면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그곳이 ‘아레오바고’입니다. 아레오바고는 “아레스의 언덕”을 뜻하는 의미로 종교적인 제도와 의식과 관련된 일을 책임지고 있는 공식적인 의결 기구였습니다. 바울 당신이 전하는 말이 아주 많이 신기하고 상당히 무슨 근거를 가지고 자꾸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하니 토론하기 좋은 장소로 같이 이동한 것입니다. 특히 이곳은 중요한 연설자를 세워 놓고 어디 한번 이야기해 보라고 하며 철학자들이 질문과 답을 요구했던 자리였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인도함으로 받으면 그곳에서 연설하게 됩니다. 그들이 볼 때 연설이지만, 우리가 볼 때는 강설을 한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것을 더 자세히 알고자 하는 것을 보면 철학을 좋아하는 도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듣는 것만 좋아하면 안 됩니다. 자신의 마음을 돌이킬 때 참된 구원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돌이킬 수 있도록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이해하실 수 있도록 하십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20절에서 왜 바울을 아레오바고로 데리고 간 이유를 설명합니다. 20절을 보시면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바울이 전한 메시지를 생각할 때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사후 세계 즉 부활을 전하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장터보다 아레오바고로가 토론하기에 좋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좋은 일이지만, 자신의 마음을 열고 베뢰아 사람들처럼 신사적이어야 합니다. 성경을 배워야 합니다. 학문적이고 철학적인 토론만 하면 안 됩니다. 바울이 전한 메시지를 단지 지식의 학문으로 끝나는 호기심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상의 도시인 아덴의 종교적 배경과 철학적 사고 체계에서는 바울의 가르침이 새롭고도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에게서 더욱 자세한 내용과 그 배경 등을 알아보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헬레니즘의 철학적 사고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이해하려고 한 철학자들의 노력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해는 이 세상의 학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철학으로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철학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주신 당신님의 특별한 계시인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누가는 20절에서 그 이야기를 합니다.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듣지만,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누가는 20절을 통해 풍자하여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바울이 선교를 하면서 이번처럼 어려웠던 적은 없을 것입니다. 듣기는 하는데 반응이 없는 것입니다. 호기심은 있었지만, 하나의 철학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관한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후 세계를 인정하지 아니하는 그들의 모습을 잘 대변해 주는 것 같습니다. 아덴 사람들은 끝없이 새로운 것들을 찾아다녔습니다. 새로운 것을 찾았을 때는 쉽게 싫증 났던 것입니다. 아덴 사람들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주전 5세기 장군이자 정치가인 클레옹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아덴 사람들을 소위 새로운 것이라고만 하면 가장 잘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바울이 전한 메시지에 대해 새로운 면을 보고서 복음을 일시적으로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지만 믿지 아니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아덴 사람들과 다른 사람이어야 합니다. 아덴은 주전 5세기경에 정치,경제,철학,학문과 예술 등 전반에 걸쳐 찬란한 업적을 이룬 도시였지만, 바울이 아덴에 도착했을 때는 한때 찬란했던 영광이 사라진 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덴 사람들은 여전히 학문과 철학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가 잘 알고 철학자들이 많은 도시이기도 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당연히 철학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철학으로 예수님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 계시 된 하나님은 유일하시시고, 절대 주권자이시며, 초월적이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 성경을 통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아덴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범신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죄입니다. 그리고 많은 신 중에 하나로 생각하는 자들도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기독교가 참되다는 증거를 우리에게서 기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회심은 당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상명령을 감당해야 하는 전신갑주를 입는 복음의 증인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19:26절에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자입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순전히 철학적이고 학문적인 토론을 통해 잃어버린 영혼들을 얻는다든지 그들의 정신적 영적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을 절대 원치 않으십니다.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성경적인 방법은 신앙을 따라 경건한 생활을 바탕으로 해서 인내하며 기도하는 심정으로 참 복음을 사랑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일꾼으로서 오직 살아 있고 운동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한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람의 방어벽을 뚫고 들어가 불신자의 마음을 꿰뚫을 수 있으며 그리함으로써 하나님만이 참된 구원자를 인정하며 돌이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찬란했던 아덴에서 자신의 학문으로 자신만의 학파를 만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에게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된 복음을 전하는 사도였습니다. 그래서 우상 숭배를 하는 그들을 분개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한 것입니다. 철학자들이 좋아하는 방식이 아니라 성경을 가지고 전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무기 중의 무기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전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아덴 사람들처럼 오늘날에도 듣기는 좋아하지만, 금방 싫증을 내더라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가련해 보이고 눈물겹기도 합니다. 오늘날에도 바울처럼 옳고 바른 길을 알려 줘도 따르지 않는 자들을 보면 애처롭기도 합니다. 그럴 때 복음은 전하는 증인 자의 모습은 지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을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의 자세를 보면 나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임마누엘이신 하나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지팡이 교회도 사도 바울과 같은 삶의 증인 자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기도로 마무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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