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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19:20-31
강설날짜 2019-10-13

에베소에서 일어난 소동(행19:20-31)

 

오늘은 종교개혁기념 주일입니다. 그렇다고 다른 날 즉 주일보다 더 특별한 날은 아닙니다. 모든 날은 주의 날입니다. 하지만, 왜 종교개혁이 일어났는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개혁에 대한 특강은 오후 모임에서 하겠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아주 작은 신자의 공동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의 은혜를 받은 성도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구원의 은혜에 영광을 올려드리며 신앙의 길을 가는 교회입니다. 그러면서 신앙의 한 길을 걷는 거룩한 신자입니다. 구원을 알기에 주일날 영과 진리로 예배하고 있습니다. 예배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에게 영광의 박수나 감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위한 종교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세상의 종교는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신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형상을 만들어 복을 빕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오직 유일하신 삼위 하나님께 예배하는 종교입니다. 구원받은 신자들이 예배를 통해 나의 신앙으로 하나님께 고백하는 가장 사람다운 시간입니다. 그렇다고 예배시간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배님들은 늘 한결같이 “삶이 예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삶은 없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과거 믿음의 선배님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물질과 명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자들을 서로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한 이유는 주님의 은혜로 하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하나의 교회 즉 성도의 교제가 있는 신자들은 바닥에 앉아서 찬양하든, 좋은 의자, 화려한 실내장식이 아니어도 은혜가 있었습니다. 오늘날처럼 화려하고 카리스마적인 언변 술이 없어도, 오직 감사의 영광을 올려 드렸습니다. 다양한 프로그램이 없어도 기쁨이 넘치었습니다. 믿음의 선배님들의 예배는 ‘쇼’라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오직 ‘순수한 마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마음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어떠한 마음으로 예배당에 왔는지 모르지만, 믿음의 선배님들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존귀와 영광을 올려드리기를 다짐했으면 합니다.

 

오늘도 지난주와 변함없이 강설을 요약해 듣고 “에베소에서 일어난 소동”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을 통해 풍성한 은혜를 주실 것을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도착하여 같은 마음으로 회당에서 하나님 나라를 전했습니다. 그곳에서 세례 요한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사도 바울을 비방했습니다. 참된 예수님을 모르면 이와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멈추지 않고 그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가르쳤습니다. 한 달 동안 했습니까? 지난주 강설로 들었기 때문에 아실 줄 믿습니다. “두 해 동안”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도두 “주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하지만, 세상에 물든 기독교가 된 현실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예배를 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이 슬픈 현실입니다. 성경의 말씀을 바울처럼 강론하지 아니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에서 사역하는 동안 그곳만 아니라 주위 지역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러면 이 모든 일을 사도 바울이 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사도행전은 분명하게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나를 자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을 알 수 있도록 누가는 분명하게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는 것입니다. 바울을 통해 하나님께서 함께하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이런 증거를 보고 있던 마술사들은 자신들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악귀가 들린 사람에게 예수님의 이름과 바울을 이용하여 명령했습니다. 그 결과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누가는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라고 기록합니다. 제사장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오늘날 목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마술을 사용하여 물질과 명예 그리고 권력 등을 얻고자 하는 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하여 마술하려던 제사장의 아들들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넌 누구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음성은 악귀였습니다. 악귀는 바울도 알고, 예수님도 아는데 ‘너는 모르겠다’입니다. 제사장의 아들들은 악귀로부터 무시를 당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아들들은 바울이 전한 메시지의 참뜻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참되게 믿지 아니하는 신자들도 이와 같을 수 있습니다. 믿음의 생활을 한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럴 때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악귀를 이용해 자신들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제사장의 아들에게 악귀 들린 사람이 무엇을 했습니까? 제사장의 아들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긴 것입니다. 그런 후 그들이 벗은 몸으로 도망하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이용하여 하나님께서는 에베소 사람들이 알도록 했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주 예수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복음을 전하도록 하신 결과였습니다. 바울의 메시지를 들은 에베소 사람들은 자신의 부패성을 알고 자복함으로 회개했습니다.

 

일반인만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마술하던 자들은 자신들이 소장하고 있던 마술책들을 모아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불에 태웠습니다. 그 책을 오늘날로 환산하면 상상할 수 없는 금액입니다. 에베소에서 일어난 사건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20절을 보시면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놀라운 성장한 것을 기록할 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누가는 ‘주’를 강조하기 위해 ‘말씀’ 앞에 배치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주의 말씀’을 힘써 강조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힘이 있어 흥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귀들인 사건에 초점을 맞추는 분이 있지만, 사도행전은 늘 한결같이 ‘말씀’이라고 합니다. 사람에게는 기적이 우선이지만, 성경은 말씀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영광이 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에베소는 아데미 여신을 섬기는 문화이기 때문에 주의 말씀으로 성장하는 교회와 결국 대립하였습니다. 주의 말씀에 힘을 다하는 바울은 아데미 신상을 섬기는 사람들로부터 강력한 저항을 받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것에 대한 것을 강설로 듣도록 하겠습니다. 주의 말씀으로 흥왕하는 가운데 바울은 사역을 마무리한 후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경유해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그런 후 로마로 가고자 했습니다.(이 부분은 롬15장을 보시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21절을 보시면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바울이 전한 복음 때문에 에베소에서 교회는 흥왕했습니다. 온갖 우상과 마술과 쾌락과 탐욕으로 얼룩진 에베소에서 하나님의 공동체로 형성하여 힘있게 자라고 있는 가운데 다른 지역으로 이동을 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은 갑작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전도 여행을 통해 복음을 전했던 장소를 되돌아보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 자신만의 독단적인 마음이었습니까? 21절에서 ‘작정하다’라는 의미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말로는 바울이 결심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영으로 결정하다”입니다. 좀 어려울 수 있지만, 바울과 함께하시는 성령이 그곳으로 가도록 인도하셨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행20:22절에서 바울은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로 기록합니다. 바울이 이동한 경로는 성령이 인도하셨다는 증거입니다. 흥왕하고 있는 가운데 바울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오직 지상명령을 감당하고자 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 헌신했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전도 여행하는 바울은 먼저 두 사람을 보냅니다. 22절을 보시면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있으니라” 자신과 동행하는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마게도냐로 보내고 바울은 아시아에서 더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돕는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보낸 이유는 선교 즉 전도를 위해 준비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마게도냐에 올 수 있도록 사전에 준비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에베소에서 고린도에 대한 편지를 쓴 바울은 두 사람을 통해 전달하도록 했습니다.(고전16:10 참고) 저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부럽기도 합니다. 두 제자를 보낸 바울은 편안히 에베소에서 휴식하지 않았습니다. 에베소 주위에 있는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에베소에 조금 더 있으면 아데미 대축제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고전16:8-9) 해마다 5월에 열리는 아데미 축제는 각지에서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그 축제를 이용하여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필 그때 에베소에서 소동이 일어납니다. 아데미 우상을 이용하여 돈벌이를 하는 자들이 ‘자신들을 위한 소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23절을 보시면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우상을 만들어 생업 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믿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절박한 상황만 생각하며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작은 소동이 아니라 큰 소동이었습니다. 누가는 이 부분에 대해 자세히 기록합니다.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가? 우상을 만들어 돈벌이하는 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업이 중요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고민되는 부분이 많을 것입니다.

 

소동을 일으킨 자들의 주장을 보시면 좋겠습니다. 24-26절입니다.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더메드리오가 이렇게 말한 이유가 있습니다. 소아시아에서 최고의 신으로 칭함을 받은 아데미를 이용하여 돈벌이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소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데미 여신에 사용되는 의미를 보면 “가장 위대함, 가장 거룩한, 가장 분명한”이었습니다. 그리고 “복과 풍요를 가져다준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돈벌이를 해야 하는데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인하여 관심이 없었습니다. 우상을 만드는 사람 중에 ‘더메드리오’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노련한 선동가로 보입니다. 그가 한 말을 보면 대중적인 힘을 이끌어가는 연설가와 같습니다. 소동을 이용하여 사람을 선동하고자 했습니다. 기독교 선교를 저지함과 동시에 아데미 여신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더욱더 불러일으키고자 했습니다. 왜냐하면, 에베소만 아데미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많은 나라에서 신을 보고자 온 사람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을 이용하여 모조 은신상을 만들어 기념품이나 서원의 헌물 또는 호신용 등으로 생업을 했습니다. 아데미 여신상을 만드는 자들에게는 경제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묘한 방법으로 소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최선의 방법은 아데미 여신을 높이고 장려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더메드리오는 자신의 입장을 지지할 수 있도록 장식품만 만드는 사람만 아니라 아데미 여신상과 관계된 사람들을 선동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돈벌이가 중요했기 때문에 서로 연합할 수 있었습니다.

 

아데미 여신을 위한 축제가 열리는 5월이 다가왔기 때문에 더욱 선동은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27절을 보시면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 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더메드리오는 아데미 여신를 위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아데미의 탄생을 기념하는 행사는 큰 돈벌이기 때문에 더메드리오는 연설은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더메드리오의 주장은 올바른 것입니까? 데메드리오의 주장은 종교 즉 우상을 이용하여 자신의 부와 명성과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얄팍한 방법입니다. 이런 주장은 우상을 이용하여 생활하는 자들에게는 먹혀들었습니다.

 

아데미에 대한 자부심을 누리는 에베소 시민들에게는 종교적인 자부심이었습니다. 더메드리오의 말을 들은 자들은 어떠한 행동을 하였습니까? 28절을 보시면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사람들이 분노했습니다. 마음으로만 분노한 것이 아니라 소리를 내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고 했습니다. 사실감 있는 선동은 즉시 분노로 표출되었습니다. 더메드리오가 어디서 선동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에게 효과가 있었습니다. 29절을 보시면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왜냐하면, 바울이 에베소 주위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그와 함께 다니던 마게도냐 사람 가이와와 아리스다고를 붙잡아 연극장으로 데리고 간 것입니다. 바울이 있었다면 가장 먼저 잡아갔을 것입니다. 바울은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가 끌려갔다는 것을 듣습니다. 30절을 보시면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소문을 들은 바울은 연극장으로 들어가고자 했습니다. 바로 그때 제자들이 말리는 것입니다. 소동의 주된 목적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었습니다. 바울이 연극장으로 들어가면 위험에 처할 수 있으므로 제자들이 막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미 로마 총독인 갈리오 아가야로부터 자유로움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연극장으로 들어가고자 한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바울의 친구가 된 ‘아시아 관리’는 들어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은 임기가 정해진 선출직 관리였습니다. 이들은 로마 황제에게 충성하기로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메시지로 개종한 친구들이었습니다. 31절을 보시면 “또 아시아 관리 중에 바울의 친구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에베소에서 일어난 소동은 이런 친구들이 함께함으로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힘든 가운데 진정한 친구는 누구입니까? 이런 ‘아시아 관리’ 같은 사람 아니겠습니까? 하여튼, 그들은 바울의 메시지를 듣고 그리스도의 신자들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개종은 하지 않았지만, 바울을 염려하여 호의를 베푼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강설을 하겠습니다. 다음 주에는 이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는 아데미 중심으로 성장하는 도시였습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신이라고 생각하며 아데미 여신을 섬기는 것을 자랑했습니다. 27절에도 잘 설명하듯이 ‘아시아와 천하’에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인해 아데미 신전은 무시당하고 아시아와 천하로부터 위험도 떨어질까?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에서 바울이 전한 메시지는 큰 영향이 있었습니다. 마술사들은 자신들이 소중하게 가지고 있던 책들을 불로 태웠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여신상을 통해 돈벌이하는 자들은 생업이 어려워짐으로 소동하였습니다. 그 소동의 대표자는 더메드리오였습니다. 데메드리오가 바울을 공격한 동기가 아데미 여신에 대한 종교적 열성에서 기인한 듯이 보이지만 실상은 돈벌이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돈 아닐까 싶습니다. 과거나 오늘이나 같은 점은 자신을 위한 돈벌이 아닐까 합니다. 더메드리오를 따르는 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순례자들에게 아데미 신상이나 신전의 작은 모형을 기념품으로 팔아서 수입으로 생계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우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상을 섬기는 것은 진정한 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으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5:14-16절을 보시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세상의 것을 좋아하지만, 참된 신자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거룩한 교회로서 합당한 삶의 예배로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바울은 이런 것을 알기에 에베소에서 강론한 것입니다. 그 결과 초대교회는 ‘주의 말씀’으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있는가를 마음으로 생각하십시오. 만약 더메드리오와 같은 점이 있다면 주님께 기도함으로 돌이키기를 소망합니다.

 

기독교는 종교를 통해 자신의 부를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더메드리오와 같은 마음이 아닙니다. 세상의 우상을 통해 자신의 돈벌이할 수 있지만,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참된 믿음의 소유자는 바울처럼 신앙생활 하면서 시련과 역경을 이기며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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