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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20:7-12
강설날짜 2019-11-17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5j_MPAG5KaE

사도 바울이 드로아에서 말씀을 전함(부제목:유두고가 다시 살아남)-행20:7-12

 

“복음”이란 글자 그대로 “좋은 소식”입니다. 영어로는 “굿 뉴스”입니다. 오늘도 지팡이 교회는 말씀 강설을 듣고 있습니다. 들으므로 좋은 소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복음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지팡이 교회를 통해 좋은 소식을 전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소식의 핵심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라는 것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아주 특별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성도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가르치고 따라가는 교회입니다. 그러면서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노력하는 교회이기도 합니다. 또한, 영적으로 임한 하나님 나라를 믿음으로 주의 길을 가는 교회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급하면 “엄마” 또는 “오 마이 갓”이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소리를 내는 것은 자신을 살려달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은 결국 죽음입니다. 이 죽음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종교도 없습니다. 그것들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종교입니다. 하지만 참된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면 됩니다. 하지만, 타락한 사람들은 어떠합니까? 시편 기자는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53:1a절을 보시면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라고 했습니다. 타락한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모릅니다. 다시 회복해야 할 필요성을 모르면서 생활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통해 구원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신자들입니다. 건물은 예배당입니다. 용어를 바르게 사용함으로 교회의 가치를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세상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믿음을 고백할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지난주 강설을 생각해 보십시오. 에베소에서 3년 동안 사역을 마무리한 후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갔습니다. 마게도냐에서 사역할 준비를 위해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먼저 보낸 장소입니다. 그곳에 도착한 바울은 여정의 휴식도 없이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이미 복음을 전했던 장소였기 때문에 제자들을 더 굳건한 반석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다음 헬라 즉 아가야로 이동했습니다. 헬라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린도 도시가 속해 있는 장소입니다. 3개월 동안 사역을 한 후 ‘수리아로 가고자 할 때’입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기로 공모한 것입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암살 계획을(필사적인 음모) 안 사도 바울은 배를 타지 않고 마게도냐로 이동을 했습니다. 수리아도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암살 계획으로 인하여 바울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바울의 메시지를 듣지 못한 것은 불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누가는 바울과 동행 하는 사람 이름과 지명을 기록합니다.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왜 이렇게 기록하는 것입니까? 누가는 이방인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구제 헌금(헌상)한 것을 가지고 가는 대표자를 기록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동행하는 분들은 위험을 알고 먼저 이동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바울은 무교절 때문에 드로아에서 이레를 더 머물렀습니다. 그러면서 무교병 즉 누룩이 없는 떡을 먹으면서 절기를 지키었습니다. 사실 절기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주일에 모든 의미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오늘날 주님을 믿는 신자들은 유대교의 절기를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구원하여 주신 날에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무교절을 통해 주님의 오심과 고난 그리고 부활을 생각하며 보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기도하며 사명을 감당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오늘은 “사도 바울이 드로아에서 말씀을 전함”을 통해 교회가 가야 할 길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7절을 보십시오.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신약 성경에서 최초로 ‘그 주간의 첫날’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주일 예배에 대한 첫 번째 언급입니다. 바울은 자신과 동행을 하던 신자들과(구제 헌금을 전달하는 교회의 대표자들) 주일날 ‘떡을 떼며’ 모였습니다. 떡을 떼는 것은 식사를 의미합니다. 이 의미는 애찬을 나누며 성찬을 했다는 의미입니다.(고전11장 참고) 신자들은 매주 마지막 날이(안식일) 아니라 주님께서 부활하신 주일날에 예배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강림하신 날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안식일에서 주일날로 변화되어 가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을 통해 강설로 들어서 아실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가를 말씀하여 주셨습니다.(마태복음 강설을 보십시오. 홈페이지 참고)

 

바울은 주일을 보낸 후 월요일 아침에 여행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밤늦게까지 강론 즉 강설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의 달력을 따른 방식이 아니라 로마식 달력을 따랐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누가는 ‘이틀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부흥회가 아닌 사경회였습니다. 사경회는 말씀을 강설하는 것으로 오직 복음만을 전했습니다. 또한, 신사도운동도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일부 교회는 세상에 물든 기독교가 되었고, 맘몬주의에 빠졌습니다. 이런 시대에 지팡이 교회는 바울과 같은 말씀을 들으며 주의 길을 가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의 열심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을 위한 삶이었다면, 랍비와 로마 신분으로 부와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풍전등화와 같은 복음 전도 여행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의 일생을 알고 있는 우리는 어떠한 길을 가야 하는지 자신에게 질문하여 보십시오.

 

바울이 강설한 집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윗다락에 모였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8절을 보시면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입니다. 누가는 놀랍게도 자신이 목격한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저녁 늦게까지 강설한 장소는 윗다락으로 초대교회의 예배 장소로 사용된 개인 집의 공간입니다. 우리나라의 다락방과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른 모습으로 공간은 엄청 넓습니다. 이처럼 개인 집을 신앙 공동체의 목적을 위하여 제공하는 것을 보면 신자들은 하나의 공동체 즉 교회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여튼, 바울의 강설은 오랫동안 우리가 생각하는 집회 시간을 넘었습니다. 사경회 즉 집회가 잘 될 수 있도록 다락방에 많은 등불을 켜 놓은 이유가 있습니다. 학자들은 대체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신자들이 모이면 이상한 행위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등불을 밝힘으로 오해하는 자들에 대해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다른 이유는 모임을 위한 것으로 바울의 모습과 신자들의 안전을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신자가 다락방에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등불에 대한 것을 온전하게 알 수 없지만, 집회의 필요성을 위해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등불을 많이 켜 놓았지만, 안전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9절을 보시면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다락방에서 어떠한 청년이 떨어져 사망한 것입니까? 누가는 사실이라는 것을 기록하기 위해 실명을 말합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유두고’였습니다. 바울의 강설이 밤늦도록 이어지자 사망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다락방 창문에 걸터앉아서 말씀을 듣던 유두고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진 것입니다. 그때 신자들은 놀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집을 지나가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면 기독교인들은 살인자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여튼, 긴 집회는 졸음이 쉽게 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통해 초대교회가 성장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습니다.

 

유두고의 뜻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럭키 즉 “행운”입니다. 그리고 “운 좋은, 다행스런”의미도 있습니다. 이 사건을 보면 ‘뭐가 행운입니까?’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차분하게 읽어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유두고는 바람이 잘 통하는 창문에 걸터앉아 바울의 강설을 듣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강설이 길어지면서 졸게 되었습니다. 졸음으로 결국 떨어져 사망했습니다.(어떤 분들은 유두고가 말씀을 잘 듣지 않았고 건방졌기 때문에 사망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바울의 강설을 듣고자 모인 신자들로 보아야 합니다.) 유두고는 말씀을 듣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다락방에 모인 많은 사람으로 인하여 탁해진 공기 때문에 잠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졸음을 이기지 못한 유두고는 실수로 창문에서 떨어진 것입니다. 유두고를 살리기 위해 사람들은 밖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렇지만 유두고를 일으켜보니 사망한 것입니다.

 

바울도 유두고가 떨어진 것을 알고 그가 있는 장소로 갔습니다. 그때 바울은 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당연합니다. 세상 사람이 생각할 때 바울은 미친놈이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구원을 믿는 백성입니다. 자! 그러면 차분하게 강설을 들어 보십시오. 바울은 신자들과 함께 빨리 뛰어 내려갔습니다. 유두고의 모습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마도 저라면 기도하면서 왜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라고 할 것 같습니다. 아니면 놀라서 기절했을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담대했습니다. 바울은 사망한 유두고 위에 엎드려 몸을 안았습니다. 유두고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껴안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연인도 아니었고 혈연으로 연결된 가족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교회였습니다. 사고를 당한 신자에 대한 깊은 연민과 긍휼의 마음이었습니다. 바울은 긍휼한 마음의 심정으로 유두고를 안고 ‘떠들지 말라’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황당한 것입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듣고 갑자기 조용해진 것입니다. 바울의 말은 엄숙한 분위기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생명이 유두고에게 있다’고 한 것입니다. 모두 사망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가운데 생명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을 향해 할 말입니까? 하지만, 바울은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유두고를 진정한 마음으로 안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다시 살려주셨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소생된 것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알기에 믿음으로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자유주의 학자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유두고는 사망한 것이 아니라 기절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을 믿습니다. 사망한 유두고를 바울이 연민과 긍휼한 마음으로 껴안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살리신 것입니다. 바울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이 되돌아오도록 하신 것입니다.

 

유두고가 다시 생명력을 유지한 것을 본 신자들은 다락방에 올라갔습니다. 그런 후 11절을 보시면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기적을 알고 있는 신자들은 바울의 강설을 더 듣기 위해 다락방에 올라간 것입니다. 바울의 강설은 길었기 때문에 ‘떡을 떼어’ 먹었습니다. 밤에 야식을 먹으면서 새벽이 오기까지 대화를 했습니다. 바울의 강설을 가지고 대화를 했을 것입니다. 주제는 아마도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초대교회가 가지고 있던 복음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같은 마음으로 대화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신자들은 땅과 집을 투기하는 방법으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모습이 아닙니다. 하지만, 다락방에 모인 신자들은 교회에서 해야 할 교제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의 교통이 있는 교제를 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사용해 고백하는 것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을 보고자 합니다. 12절입니다.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여기서 살아난 청년은 바로 유두고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락방에서 목격한 드로아 신자들은 기적이 일어난 감격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 날 밤은 바울이 전한 메시지를 가지고 오랫동안 나눔을 했습니다. 짧은 것 같지만 긴 강설을 한 바울은 드로아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을 했습니다. 드로아에서 일어난 기적 사건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간접적으로 경험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고별의 강설을 함으로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지팡이 교회는 은혜를 받았을 것입니다. 오늘 들은 것을 생각하며 집에 가서도 주보를 통해 다시 읽어 보십시오. 다락방은 유대인들에게 휴식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공간에서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바울의 강설은 유대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강설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을 통해 오신 메시야를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한 유대인들은 지금까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으니 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자신들이 죽인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처음 된 자가 나중에 된다는 말씀이 떠 오르기도 합니다.

 

유두고라는 청년의 사망은 놀라운 결과가 있도록 하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사도들을 통하여 기사와 표적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진 이적들이 많이 생겨났으니 이로써 예수님과 초대교회의 연속성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다락방은 예배하는 장소의 핵심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믿음을 증가시키기 위해 모일 때마다 강론을 들었습니다. 또한 애찬과 성찬을 함께 함으로 성도의 교제를 하였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초대교회는 독특한 삶의 원칙을 가지고 신앙생활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알고 있는 성도는 삶으로 구현해 나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미래성과 현재성은 오후에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 사건을 통해 신비주의로 해석하여 집회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유두고를 살리신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당신님이 누구신가를 알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초점을 맞추어 해석해야 합니다. 오늘 사건은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입니다. 바울이 간절함으로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살리지 아니하면 소용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유두고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겨자씨와 누룩처럼 펴져 나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개인의 행위에 역점을 둔다면 이 사건을 통해서 말씀하시려는 성경의 메시지를 놓칠 수 있습니다. 언제나 말씀은 사람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의 말씀에 충실했습니다. 어느 장소에 가든 늘 말씀으로만 강설했습니다. 카리스마적인 대화법이 아니었습니다. 기교와 화려함이 아니라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 결과 유두고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영광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 예수님만 전했던 것입니다. 지팡이 교회도 오직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주의 길을 가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아래에 있는 글은 예배가 끝난 후 한 번 읽어 보십시오.

 

종교개혁가인 칼빈은 삶의 원리는 오직 성경이었습니다. 갈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제 성경이 가지고 있는 이 독자적인 능력은, 인간의 그들이 아무리 기교 있고 세련되었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로부터 명백하다. 데모스테네스나 키케로를 읽어 보라. 플라톤이나 아리스토렐레스 또는 이 부류의 다른 사람들의 책들을 읽어 보라. 나는 그것들이 당신을 사로잡고, 당신을 기쁘게 하고, 당신을 감동시키고, 당신을 놀라울 정도로 황홀하게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들에서 벗어나 이 거룩한 독서에 집중해 보라.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당신을 깊이 감동시키고, 마음을 찌르며, 당신의 골수에까지 새겨지는 그 깊은 인상과 비교할 때, 웅변가들이나 철학자들의 활력은 거의 사라져 버리게 될 것이다. 결국, 성경에는 인간의 노력으로 얻는 모든 재능과 미덕들을 훨씬 능가하는 성스러운 어떤 것이 발산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잇을 것이다.”라는 칼빈의 말처럼 우리도 성경의 원리에 충실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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