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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21:10-16
강설날짜 2019-12-29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 바울2(행21:10-16)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당연히 “하나님 말씀”이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렇습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면서 다른 것을 바라보며 신앙생활 하고 있다면 나는 과연 ‘그리스도인입니까?’라고 질문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이든 아직 하나님을 잘 모르는 분들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성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참되게 믿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의 역사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이라라는 나라를 이해하기 위해 역사책은 많은 도움을 주는 것처럼 성경도 역사책으로 생각하면 하나님 나라를 아는 데 큰 힘이 됩니다. 성경은 66권으로 연결된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독특하게 연결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역사책입니다. 이 역사책 안에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은혜의 말씀 즉 역사가 들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사랑하심으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셨습니다. 이 세상 왕이라도 그 누가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도 우리를 사랑하여 주셨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사랑을 하나의 역사책인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과 하나님 나라의 영토 등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인 성도를 위해 준비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가 될 수 있는가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을 핍박하고 살인까지 했습니다. 이런 사악한 사울을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다메섹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안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전도 여행을 했습니다. 자신을 헌신하고 희생하며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전파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사도행전을 통해 배우며 잘 알고 있습니다. 지팡이 교회 성도에게도 사도 바울과 같은 마음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지난 주일에는 성탄절에 대한 강설을 들었습니다. 모든 주일이 성탄과 같은 마음이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모든 주일이 부활절과 같은 마음으로 신앙생활 하기를 부탁드립니다. 오늘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 바울2”을 강설로 듣도록 하겠습니다. 그 전에 강설을 요약하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아니하며 구제의 봉헌 즉 헌상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과 작별하는 것은 마음이 찢어지도록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들과 작별을 한다는 것은 순교까지도 감당하겠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들과 작별한 바울은 고스, 로도, 베니게를 거쳐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 상륙했습니다.

 

두로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짐을 풀고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틀을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신앙생활 하고 있던 제자들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려 준 것입니다. 지팡이 교회도 아시겠지만, 바울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힘들지만, 더 힘을 얻어 예루살렘으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우리는 이해하실 것입니다. 두로에서 여러 날을 보낸 바울은 처자들로부터 전송을 받았습니다. 전송을 받으며 다 같이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신뢰의 교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합니다’라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들과 작별한 바울은 둘레마이를 거쳐 가이샤라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 잠깐 가이사랴를 좀 더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기억하시고 있습니까? 가이샤라에 누가 있었다고 했습니까? 빌립이었습니다.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했던 빌립이 가이사랴에서 네 명의 딸들과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여러 날을 함께 머물렀습니다. 아마도 빌립과 바울은 많은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에게는 딸들이 있었습니다. 그녀들은 결혼하지 않고 처녀로 예언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요엘이 전한 내용 중에 여자들도 예언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구약의 말씀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책인 성경을 알 때 신약의 말씀도 알 수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은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역사입니다. 빌립은 초대교회 집사로서 믿음 생활을 잘 했다는 것을 딸들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두 주 전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빌립의 딸들은 교회사에 큰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아시아에 있는 히에라폴리스의 감독이었던 파피아스의 말에 의하면, 빌립과 딸들은 몇 년 후 소아시아의 히에라폴리스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 딸들 가운데 오랫동안 생존하여 초기 기독교 시대에 있었던 사건이나 인물들에 관한 자료들을 전달해 주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바울은 선한 싸움을 한 위대한 사도요 사역자요 일꾼이었습니다. 선한 길을 달려간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던 것이고, 자신의 인생의 종착지가 어디라는 것을 삶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쇠퇴하고 있으며 다른 삶으로 타락해 가는 모습을 보면 슬픈 현실입니다. 하지만, 참되게 믿는 신자들에게는 주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알고 있는 신자들과 아직 복음을 모르는 사람을 위해 주님의 위로가 무엇인가를 위해 선한 싸움의 길을 간 참된 신자였습니다. 선한 싸움의 종착지를 위해 바울은 더 힘을 내어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가이샤라에서 빌립과 그의 딸들과 있던 중에 누가 찾아 왔습니까? 오늘 본문 10절을 보시면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누구였습니까? ‘아가보’입니다. 아가보는 행11장에서 유대에 닥칠 기근을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학자들은 구약 시대에 활동하던 선지자가 계속해서 하고 있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면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의 선지자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구약 시대는 대체로 하나님의 선지자를 통해 직접 계시를 하셨습니다. 선지자는 사람들에게 행동으로 알리는 사역을 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아가보는 행동은 구약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 시대의 선지자는 성령에 감동되어 하나님의 계시를 성경 말씀을 통해 청중에게 가르치고, 위로하고, 죄를 알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구약과 신약은 서로 차이점이 있습니다. 아가보는 선지자로서 유대 즉 예루살렘으로부터 내려와 바울과 깊은 교제와 나눔을 통해 어떠한 길을 가야 하는지를 알려 주었습니다.

 

아가보가 예언한 내용을 11절에서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입니다. 아가보는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바울이 지금까지 들었던 예언보다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구약 선지자처럼 강한 이미지였습니다. 구약 시대 선지자는 종종 예언을 행동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면 당신 즉 바울은 이러한 일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바울의 고난을 예언하는 아가보의 예언이 온전히 성령의 감동으로 됐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누가는 아가보의 예언이 장엄하고 위대한 선한 싸움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님의 가야 할 길을 아는 것처럼 바울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사랑은 온전한 헌신이었고, 오직 푯대를 향해 선한 싸움의 길이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마음이 오늘날에도 있기를 소망합니다.

 

아가보의 예언을 행동으로 보고 있던 일행들은 놀랐습니다.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바울 일행은 어떻게 말했습니까? 12절을 보시면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입니다. 아마도 바울 일행과 함께하고 있던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도 반대한 것 같습니다. ‘사울이여 당신은 여기에서 목회해도 됩니다. 아니면 수리아 안디옥 그 외 당신이 눈물로 사역한 에베소에서도 사역해도 충분합니다.’라고 했을 것 같습니다. 만약 저라도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는 길을 멈추도록 했을 것입니다.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죽음보다 복음이 더 중요했습니다. 이런 분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는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사랑을 안 후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지 아니하며 오직 주의 길을 위해 선한 길을 갔던 진정한 사도였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던져주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가보의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들은 바울을 막고자 힘을 다했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바울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3절을 보시면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바울은 인간미가 넘치는 심정으로 그러지 말라 당신들이 그러면 나는 마음이 상해서 슬퍼지고 마음이 힘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이제는 슬퍼하지 마십시오. 사도 바울은 진정한 사도요 일꾼이었음을 일행을 통해 잘 알 수 있기도 합니다. 바울은 일행의 마음을 알기에 책망이 아니라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더 알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가지고 있는 사역자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요 사도로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자신도 기꺼이 바치고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의 교회로 연합하도록 했던 것처럼, 바울은 이 진리를 바르게 알 수 있도록 순교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이끄심을 받았던 것처럼 마지막까지도 그러했습니다. 바울과 베드로를 잠시 비교하고자 합니다. 두 분은 기독교에 있어서 위대한 분임을 당연합니다. 제가 그분들의 이름을 거론한다는 것도 죄송하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 잡히신 후 도망하였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과 사랑을 안 후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주의 길을 같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마음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누가의 마음은 사도 바울에 대해 간절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도 순교를 각오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14절입니다.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바울이 일행의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며 이제는 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 사람을 통해 성령은 바울에게 예언했지만, 바울은 자신에게 보여준 성령을 믿었습니다.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령은 바울이 끝까지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경고했지만 그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 바울의 강한 의지와 순교의 각오는 신성한 동기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일행은 막지 못할 만한 어떤 크고 강력하고 신성한 목표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위한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어느 누가 자신을 위해 죽고자 하는 마음이 있겠습니까? 바울의 신성한 목표는 주님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자신의 희생으로 복음이 전파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희생은 결국 로마가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초석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의지는 자신에게서 출발한 마음이 아니었기에 복음이 확장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여러 날을 가이사랴에서 보낸 후 어디로 갔습니까? 당연히 예루살렘입니다. 15절을 보시면 “이 여러 날 후에 여장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입니다.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기는 110킬로미터 거리에 있어서 그리 멀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군인이 백키로 행군을 며칠이면 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아마도 일주일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여튼 바울은 오순절 전에 도착하고자 했기 때문에 약간의 휴식을 한 후 출발한 것입니다. 바울이 그토록 도착하고자 했던 예루살렘이 손에 잡힐 듯이 가까워진 것입니다.

 

가이사랴에서 출발한 바울은 그곳에서 또 다른 제자를 데리고 갑니다. 그 이유를 16절에서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 그가 누구입니까? 구브로 사람 나손이었습니다. 나손을 데리고 갔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하면 나손의 집에 머물고자 했던 것입니다. 참고로 나손에 대해 누가는 ‘오랜 제자’라고 기록했습니다. 이런 점을 추측하면 오순절 성령 사건 후 12명의 제자 중 한 명으로 생각됩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적인 믿음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전파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복음을 믿지 아니해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명령을 하신 것을 충실히 따르는 사도요 일꾼이었습니다. 세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관람자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삶으로 보여주는 진정한 성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질문에 사도 바울은 충실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어떠한 길을 걷고 있는가를 조용히 질문해 보십시오.

 

바울의 삶은 역사가 증명하여 주고 있습니다. 교회사에서 바울은 주님의 참된 일꾼이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나라를 위해 쓰임 받는 일꾼이어야 합니다. 바울과 같은 삶은 아니더라도 주님의 부르심에 충실해야 합니다. 바울은 학문도 높았고, 높은 지위 등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나는 어떻게 따라갈 수 있는가입니다. 바울은 뛰어났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함께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혼자 힘으로 사역을 이룬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을 발견한 바나가가 있었고, 선교할 수 있도록 파송한 안디옥 교회가 있었습니다. 또한, 바울과 함께한 일행도 있었습니다. 그 외 많은 사람이 그와 함께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면 바울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와 함께 가는 일행을 보면 부럽기도 합니다. 오늘날 교회도 목회자 중심이 아니라 다 같이 함께 운영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든 오늘날 신자들은 같은 십자가의 삶을 따라가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자신을 희생하고 순종하며 하나님 나라를 삶으로 표현하는 백성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가야 할 사명을 알기에 예루살렘으로 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여 주신 은혜를 알기에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교를 각오했던 것입니다.

 

순교의 각오를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바울은 4차 전도 여행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희생함으로 복음의 문이 열리도록 한 것입니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이제는 그것을 통해 복음이 로마의 길을 통해 온 누리에 전해지도록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행21:13절 말씀처럼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입니다. 과거나 이 시대나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그러면서도 바울은 주님을 만난 후 도덕적인 성격 즉 인격도 뛰어난 사역자였습니다.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여 주신 것처럼 심령이 가난한 바울은 자신을 희생하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그 거룩한 도리에 의해서 바울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도 거룩한 교제 즉 성도의 교통이 있는 일꾼이었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삶은 결국 복음이 확장되도록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성령께서 함께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훈련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계신 낙원에 가기까지 늘 훈련입니다. 우리는 배우는 신자입니다. 우리를 교관과 같이 훈련 시키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우리는 훈련을 통해 십자가의 길을 가는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교회입니다. 그 길을 참되게 가는 성도님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사랑이 있기를 소망하며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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