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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22:12-21
강설날짜 2020-02-09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Yu2DiOivZO4

사도 바울이 아아니아를 만난 이야기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 계기(행22:12-21)

 

신자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자신의 삶은 로또를 맞은 것처럼 인생역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시편을 보시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모든 상황이 내 맘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어려움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늘 운수대통합니까? 오히려 믿음으로 인하여 고난 속에서 주님의 나라를 증거 합니다. 좋은 환경은 아니지만, 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고백합니다. 메시야로 고백하는 신자들의 특권은 아이러니하게도 고통받는 특권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 특권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도록 하는 원천이 됩니다. 그 사랑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신 선물을 통해 신자들은 하나의 거룩한 공교회로 성장할 수 있도록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거룩한 공교회의 표지는 말씀 강설과 성례 그리고 권징 즉 기도입니다. 이것을 잘 드러내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전진하는 교회이기도 합니다. 복음을 가지고 생활하는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해 지팡이 교회는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말씀은 신자들에게 쉼을 얻도록 하는 힘이 있습니다. 슬프거나 기쁘거나 늘 내 안에서 예수님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 가운데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교회를 위해 오늘도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이 충만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가 풍성해질 수 있도록 지난주 말씀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죽음의 위기에서 천부장의 도움으로 구출 받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바울은 헬라어를 사용하여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자들에게 변론할 기회를 달라고 합니다. 바울이 다소 시민이라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천부장은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기회를 얻은 바울은 “부형들아”라고 한 이유가 있습니다. 연설하기 위한 정중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천부장에게는 헬라어로 말했지만, 소동을 일으킨 자들에게는 히브리어를 사용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소동을 일으킨 자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기 위한 것입니다. 히브리말로 변론하는 바울에게 관심이 있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때 바울은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라고 소개합니다.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분명하게 소개함으로 그들의 마음이 되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소동을 일으킨 자들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을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증인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법에서도 증인이 중요한 것처럼 유대법으로도 중요했습니다. 증인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자신이 유대교를 위해 얼마나 열심인가를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메섹 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던 중 놀라운 체험이 있었습니다.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라고 함으로 강한 광채였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는 음성을 바울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놀라운 체험을 당하면서 “누님 누구시니이까”라고 했습니다. 두려웠기 때문에 주님이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통해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경험으로 인하여 주님을 위해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세상의 삶과 자신의 열심을 되돌아보며 주님을 향한 마음이 돼야 합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후 주님께서는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메섹에서 누구를 만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까?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 아나니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다메섹에 아나니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나니아에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왜, 입니까? 아니니아는 모든 유대인으로부터 칭찬을 듣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아나니아의 영향력은 대단했다는 간접증거기도 합니다. 바울의 음성을 들은 사람들은 아마도 더 관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경건한 자였기 때문에 모든 유대인으로부터 칭찬받았다는 것입니다. 흠 없고 온전한 신앙을 지닌 아나니아와 자신의 회심의 과정을 강조함으로 소동을 잠재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전한 복음은 가짜가 아니라 진실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아나니아를 만난 바울에게 그는 형제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12절을 보시면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입니다. 행9장에서 아나니라에 대한 설명을 자세하게 기록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간략하게 기록합니다. 유대인들에게 긴 설명을 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아나니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간략하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바울의 곁에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는 것입니다. 다시 보라는 것은 시력을 회복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바울은 아나니아를 쳐다보았습니다. 어두움에서 새로운 빛을 봄으로 바울은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고 새로운 시력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사도의 부르심은 받은 바울은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자들에게 회심에 대한 것을 유대인식으로 설명합니다. 14절을 보시면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참으로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바울이 알 수 있도록 먼저 주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다음으로 보게 하셨고, 이제는 음성으로 듣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알고 있는 바울은 변론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이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를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회심과 소명을 잘 설명한 후 폭력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차분한 마음으로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고 복음의 증인 자가 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통해 당신님의 뜻을 알게 하시고 신앙인이 되도록 사역자로 세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역자로 부르시면 모든 것이 운수대통이 아니라 이처럼 고난을 겪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영광을 위한 감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더욱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위로하심과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신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은 더 담대함으로 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즉 하나님께서는 나를 택하여 당신님의 백성에게 뜻을 알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보고 들은 것은 전해야 하는 사명자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같은 것입니다. 믿음의 선배님들을 통해 성경이 말하는 것을 들은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전해야 하는 사명자입니다.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것이 이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목회자로 부르든, 신자로 부르든 누구나 다 같은 하나님 나라 시민권자의 사명이 있습니다. 지팡이 교회도 사명이 있습니다. 이 사명을 위해 서로 협력하는 신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바울에게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제 겨우 눈을 회복한 바울에게 주저하는냐?입니다. 바울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주저하지 말고, 담대함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16절을 보시면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바울아 너는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죄를 씻으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세례를 했던 것처럼 바울도 새로운 새 사람으로서 세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죄 씻음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보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눈에 보이는 외적인 방식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를 함부로 받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죄 씻으므로 이어지지만, 세례는 이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음으로 운수대통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사람을 속일지언정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더 큰 심판을 당할 수 있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신자의 죄는 예수님의 피로 즉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이 구원에 대한 확신을 세례를 통해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구원받은 백성의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알기에 변론을 통해 증거 하는 것입니다.

 

다메섹에서 회심한 바울은 어디로 왔습니까?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17절을 보시면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예루살렘에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입니다. 기도할 때 바울은 황홀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마도 이사야의 소명(사6:1-13)을 떠오르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통해 자신이 성전에서 즉 거룩한 땅에서 체험한 것으로 격상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환상을 받은 경건한 신자라는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거룩한 땅 성전에서 받은 것에 대한 시비를 막고자 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 황홀함은 세상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였습니다. 이러한 체험은 바울이 가야 할 사명을 더욱 분명하게 인도하시는 은혜입니다.

 

황홀한 중에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이었습니까? 18절을 보시면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원문을 좀 더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원문에는 “티오티”로 사용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새 사람으로 변화된 것으로 유대인들이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단순하게 듣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라 너를 용납하지 않고 죽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메시지를 준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바울을 예루살렘에서 떠나게 하심으로 이방인의 사도로 인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행9:15절에서 잘 드러나 있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합니다. 만약 저라도 그렇게 할 것 같습니다. 바울은 19-20절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자신의 과거를 보니 참으로 부러웠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방인 세계로 간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진실하게 하나님께 고백한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돌이킨 신자의 마음입니다.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는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의 말을 보시면 알 수 있듯이 스데반이 피를 흘리며 죽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회심한 사람은 이처럼 자신의 부끄러움을 아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야기를 들은 하나님께서는 왜 떠나야 하는가를 다시 확인하여 주십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예루살렘을 떠나야 했던 것은 주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 때문에 떠나야 했던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야 했던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기 때문에 가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바울은 자신의 고집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에서 순교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것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떠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이든 누구든지 신자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사도로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또한, 지팡이 교회 신자들을 구원으로 부르시고 증인 자로 인도하셨습니다. 다메섹에서의 체험을 통해 바울은 새로운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새사람이 된 바울은 죽도록 충성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떠나도록 하심으로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고, 그의 생명을 유지하도록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처럼 당신님의 영광을 위해 크고 자비하신 경륜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알고 순종했습니다. 순종함으로 자신의 임무를 다했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우리는 부끄러운 마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이 아나니아를 만난 이야기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 계기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습니다. 바울은 충실하게 양심적으로 사역한 일꾼이었습니다. 자신을 위한 열심히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예루살렘을 떠나게 하심으로 이방인의 증인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다메섹의 체험으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되돌아보며 늘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이방인의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자신의 몸을 돌보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헌신한 일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히려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어느 지역을 가든 바울이 전한 복음을 훼방하고자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은 랍비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바울을 신뢰했습니다. 바울은 사람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는 대상이었지만, 다메섹의 사건 이후 그들의 눈으로 볼 때는 완전히 배반자로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으로 회심을 한다는 것은 오히려 세상 사람으로부터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주의 길을 가야 하는 성도입니다. 바울의 이야기를 통해 지팡이 교회는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며 굳건한 반석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며 예루살렘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변론한 것입니다. 자기 죽음보다 더 귀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하나입니다. 하나의 생명이라도 오직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자 하는 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아나니아를 만난 이야기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 계기를 통해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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