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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26:13-23
강설날짜 2020-05-24

아그립바 왕이 바울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다2(행26:13-23)

 

인류 역사에서 가장 소중한 책을 선택한다면 무엇이라고 생각되십니까? 신자들은 당연히 성경이라고 해야 합니다. 성경이 없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신자들이 구월의 길로 안내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구약에서 시작된 성경의 기록은 사도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한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이렇게 마무리하는 것은 신자들에게 필요한 만큼 주신 것입니다. 구원을 이룰 수 있도록 성경을 주심으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가족 공동체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재림으로 오실 때까지 성령께서 보호하여 주십니다. 지금은 가라지와 알곡이 함께 있지만, 재림의 날에는 거짓 신자와 불신자는 심판을 당합니다.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함께 하시고 있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아도 하나님께서는 참된 일꾼을 통해 교회가 바른길로 가도록 하셨습니다. 구약에서는 선지자 등을 통해 바른길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신약에서는 사도와 일꾼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종교개혁 시대는 종교개혁가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부끄러울 뿐입니다. 새로운 종교개혁이 필요한 시대라고 합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교회는 회복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참된 길을 가지 아니하면 가족 공동체인 교회가 무너져 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온라인 교회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온라인 교회는 마치 묻지 마 신자들을 만들어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의 역사를 생각해야 합니다. 구약과 신약 그리고 종교개혁의 시대를 생각하십시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공동체로 예배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예배하는 경우는(?) 없다고 생각합니다.(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일시적으로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오직 구원의 주만 바라보았습니다. 세상이 점점 더 타락해도 지상명령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일꾼이 일하도록 하심으로 교회인 신자들을 보호하십니다. 신자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교회가 지상명령을 감당 하도록 하십니다. 유일한 구원자이신 주님께서는 지금도 끊임없이 교회를 통해 구원을 이루시고 계십니다. 지팡이 교회는 주님의 백성으로서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역사를 이룰 수 있도록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가장 악한 자라고 할 수 있는 바울을 교회로 부르신 것입니다. 교회로 부르심으로 구원의 역사를 만들어 가도록 하셨습니다. 자신의 죽음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로마로 가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여러 번의 재판이 있었습니다. 베스도의 재판은 로마로 가도록 하는 마지막 판결이었습니다. 로마로 보내야 하는 베스도는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 분봉왕인 아그립바 왕과 여동생 버니게가 찾아 왔습니다. 베스도로부터 사도 바울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아그립바 왕은 사도 바울을 만나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그립바 왕은 사도 바울이 자신을 변명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바울을 손을 들어 정중하게 인사한 후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습니다. 재판이 아니라 청문회와 같았기 때문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변론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바울은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고 했습니다. 성장 배경이나 삶의 방식을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지금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조상에서 약속하신 부활을 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만들어낸 복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생각하는 부활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했습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정치적이고, 폭동 등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 문제라는 것입니다. 유대교의 권력자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종교로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 부분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지팡이 교회도 사도 바울처럼 같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이것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믿음은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지 아니하면 종교지도자들처럼 될 수 있습니다. 바울도 과거 그러했다고 했습니다.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서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기도 하였고, 죽일 때는 찬성했다는 것입니다. 살인자라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보다 과거 자신의 삶은 더 악랄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 이방인의 사도로 헌신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헌신 된 자로 지상명령을 감당합니다. 이것이 새로운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신자의 본분입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3절을 보시면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아그립바 왕이여 내가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비쳤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 광채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잘 모르기 때문에 해보다 더 밝은 빛으로 이야기 한 것입니다. 다메섹으로 가고 있는 길이었습니다. 가장 해가 강한 시간에, 해를 능가하는 빛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아그립바와 청문회로 모인 자들은 놀랐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때 너무 놀라서 땅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사람이 할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보습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잡기 위해 강행군하고 있던 바울에게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주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광채를 이야기하면서 관심을 하나님께 돌리도록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사도 바울이 주인공이었지만, 하나님께 돌림으로 왜 믿게 되었는가를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광채는 나만 안 것이 아니라 함께 가던 자들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광채가 임하고 있는 가운데 유대인이 사용하는 히브리어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14절을 보시면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주님께서는 유대식 이름인 ‘사울아 사울아’라고 부르셨습니다. 바울이라는 로마식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사울이라고 하는 이유는 유대인 조상에게 약속하신 분이 당신님이라는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울에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나를 박해하느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가시채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만 등장하는 가시채는 로마인과 헬라인에게 잘 알려진 속담입니다. 뜻은 이러합니다. “신이 정해 준 운명을 거스르는 것은 아무 유익이 없다”입니다. 가시채는 바울에게 있어서 인생의 전환점이 되도록 하는 신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전의 삶에서 이방인의 사도가 되도록 밀어붙이시는 하나님의 광채를 거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 스스로 양심과 싸우는 상태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것을 양심으로 거부할 수 없습니다. 신을 대적하는 행동은 어리석은 것임을 당신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모한 것이고 불가능한 것입니다. 나의 삶을 되돌아보면 어리석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며 신자들을 체포하고 살인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습니다. 주님의 뜻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지팡이 교회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바울과 같이 거부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자의 믿음입니다.

 

곧바로 바울은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위임 명령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부르시는 것과 매우 흡사합니다. 15절을 보시면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바울은 직감적으로 신적인 존재임을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변론하면서 개인적인 경험보다 다메섹 도상에서 주어진 주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바울은 아그립바와 청중들에게 자신의 회심에 대한 신적 정당성과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집중적으로 증거 하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이 주님이라고 말하자 즉시 주님께서는 나는 네가 박해라는 예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바울은 자신이 지금까지 믿고 있었던 믿음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어떻게 메시야가 될 수 있는가에서 이제는 참된 믿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일어서라고 하시면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여기에는 바울을 부르신 이유가 있었습니다. 16절을 보시면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바울을 부르신 목적은 종과 증인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처럼 바울은 지금 주님께서 부르신 목적으로 복음의 증인으로 서 있습니다. 바울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심으로 구원하시기 위한 섭리였습니다. 바울은 아나니아를 만난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아나니아가 중요했지만, 이방인에게 전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에게 불가항력적인 주님을 이야기하는데 중심을 두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바울에게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에스겔과 예레미야의 소명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더 강조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증인으로 삼으려 함이니 말씀처럼 바울은 자신을 변호할 기회도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17절과 18절에서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여 주신 이 말씀은 눈먼 자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셨던 예수님의 사역과도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울을 부르신 목적인 이스라엘과 이방인 모두를 구원하시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들의 어두운 눈을 뜨게 하는 것입니다. 사탄으 권세에서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로마로 가는 길은 죽음의 길과 같았지만, 주님께 향한 마음으로 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 전도에 게을리하지 않고, 헌신한 일꾼이었습니다. 바울은 전도 여행을 하면서 여러 번 죽음의 위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나,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는 변질되지 아니하는 신앙이 있습니다. 어두움에서 헤매고 있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여 빛의 세계로 인도해야 하듯이 바울도 사람들의 소경 된 영안을 뜨게 하는 사명을 주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의 세계에서는 죄의 지배를 받으나 하나님의 지배 아래서는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업을 얻게 됩니다. 이처럼 바울의 사명은 선지자와 예수님께서 사역하셨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같은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사역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바울은 자신이 사명을 따라 부끄럽지 않고 충실하게 생활해 왔다고 19절에서 말합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알기 때문에 삶에서 거스르지 아니하며 충실한 삶을 생활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 지금 돌이킬 수 있는 길로 부르시고 있습니다. 그러니 나의 말을 믿으라는 것과 같습니다. 지팡이 교회 성도님, 신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이나 의지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부르심으로 나는 고백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우리의 삶을 불가항력적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돌이킨 후 자신의 삶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20절을 보시면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입니다. 자신이 해 왔던 사역의 고백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이었습니다. 약장수처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부활 메시지는 마치 세례 요한을 상시키시는 것 같습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또한 예수님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이 바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억지로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이미 구원하여 주신 신자는 삶에서 자연스럽게 예배하는 생활을 합니다. 자연스러운 예배의 삶을 통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길은 주님께서 함께하심으로 열매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유대에서 사마리아로,사마리아에서 땅끝까지 점진적으로 확대되어 전파된 것을 따라 바울은 순종하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제 바울은 자신이 어떠한 경험을 예루살렘에서 당했는지 21절에서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바울에게서 그 어떤 죄를 산헤드린 공회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찾으라면 성전을 모독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억지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일들을 이야기하지 않고 대신에 그는 자기가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한 일과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이려 했던 일을 연관 지어 설명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적 핵심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죽이려 했던 보다 궁극적 이유는 그가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구원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그것을 실천한 까닭입니다.(행22:21-22). 아그립바 왕은 유대인들의 배타적 선민의식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그립바는 바울의 소명 즉 유대인에 게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것을 들었을 때 유대인들이 왜 그토록 바울을 죽이려 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해 왔던 사역을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22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여러 번 죽음의 위기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도우심으로 내가 지금 청문회에서 서 있습니다. 바울의 삶은 여러 번 구사일생의 생활이었습니다. 복음을 위해 이렇게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높고 낮음을 넘어서 누구에게나 전파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이 지위에 상관없이 전파되는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복음을 믿음으로 받야 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혜택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바울은 23절에서 변론을 마무리합니다.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우리가 잘 알고 사53장을 아실 것입니다. 고난받는 종에 대한 것으로 예수님의 고난을 예언한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메시야이신 예수님께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메시야는 고난받을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왕처럼 오셔서 이방인을 무릎 꿇게 하고 자신들이 분봉왕과 같은 신분으로 세상을 통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 겪는 메시야는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메시야는 영웅적 존재로서 옛 유다 왕국의 영광을 재건하여 하나님의 공의로 통치할 정치적 인물로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자기 생각으로 성경을 해석하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어두운 눈을 뜨게 하려고 고난을 당하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여 잠자는 성도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죽음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이런 주님을 믿으십시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바울의 회심은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영원한 죽음이었습니다. 새로운 생명을 안 바울은 영원한 삶을 위해 헌신한 일꾼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바울이 하늘에 나타난 그 영광스러운 광경을 거부하며 부귀영화를 탐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주님의 뜻대로 예루살렘에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로마로 가는 길은 죽음의 길과 같아도 두려움과 떨림 없이 가고 있습니다. 담대한 마음으로 세상의 중심지로 가고 있었습니다. 믿음은 이처럼 담대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도우셨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청문회에 모인 자들은 바울의 말을 듣고 회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말은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아그립바 왕은 고급스러운 의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약간의 자유가 있었지만 죄수였습니다. 둘은 대조적이었지만, 그들은 바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복음의 메시지에는 의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심장으로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요합니다. 바울은 다메섹 경험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알았습니다.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 것을 주님의 현현으로 이해했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는 말씀에 자신의 과거를 돌이키고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에 헌신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과 예루살렘은 물론이고 유대와 이방에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감당했습니다.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사역을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이 구약 성경의 선지자들과 같은 맥락에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구원 역사의 연속성을 증거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인생 행복 즉 세상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마치 로또를 맞은 것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삶과 종교개혁가들의 삶을 생각하십시오. 고난에 동참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이기 때문에 약속하신 기업을 상속받았습니다. 이 세상의 삶을 끝낸 후 영원한 낙원 즉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 것을 바라본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같았습니다. 부활의 소망을 모르는 유대인들은 비난하고 협박하며 죽이려 하고 대적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을 대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 어떠한 마음이 드십니까? 오늘 강설을 개인적으로 정리하며 주님의 길을 가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께서 바울과 동행하여 주신 것과 같이 지팡이 교회와 함께하시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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