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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28:17-31
강설날짜 2020-07-12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CwhMgFkoF3U

로마에 도착한 바울의 마지막 여정(행28:17-31)

 

 

“지란지교”를 아십니까? 지초와 난초는 둘 다 향기로운 꽃입니다. 향기로운 꽃처럼 지란지교는 맑고 깨끗하며 두터운 벗 사이의 사귐을 일컫는 말입니다. 지란지교를 생각하면 성경에서 다윗과 요나단의 빛나는 우정이 떠 오릅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마음이 무엇인지 잘 가르쳐 주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우정은 지란지교처럼 인생의 우정과 친구의 우정을 향기로 뿜어내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힘들 때 친구처럼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지란지교처럼 예수님께서는 맑고 깨끗하며 참된 벗으로 그리고 사귐으로 동행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함께하는 성도는 이 세상에서 지란지교처럼 맑고 깨끗한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교회는 지란지교처럼 되어야 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더욱 향기를 발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지란지교처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마지막 여정을 강설로 듣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지란지교는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와 일행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지역에서 마음으로 함께 하는 신자들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바울의 마지막 여정이 승리하도록 하셨습니다.

 

 

인생 여정의 마지막 길이 될 수 있는 바울은 로마에 입성했습니다. 입성하는 길은 쉽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고비가 있었는데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로마로 가야 하는 것을 알기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지란지교라고 할 수 있는 일행도 같은 마음으로 함께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광풍으로 어려움을 당한 후 알렉산드리아 배에 있었던 276명은 멜리데 섬으로 수영하여 모두 구출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생활하던 원주민 즉 이방인으로부터 환영을 받았습니다. 이런저런 사건이 있었지만, 바울은 그곳에서 안전한 보호를 받았습니다. 바울과 일행은 멜리데 섬에서 3개월 동안 겨울은 보냈습니다. 이 시기에 항해하는 것은 죽음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겨울을 보낸 바울은 죽음의 여정이 될 수 있는 로마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 배는 알렉산드리아 곡물 선이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곡물 선은 수라구사와 레기온을 거쳐 보디올에 도착했습니다. 보디올에서 신앙생활 하고 있던 신자들과 바울은 일주일 동안 교제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제하도록 하심으로 로마에서 신앙생활 하고 있던 신자들이 더 든든한 교회로 성장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런 후 바울은 로마로 발걸음을 옮기었습니다. 바울이 로마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형제들은 마중하러 왔습니다. 로마에서 바울이 오기를 기다려도 되지만, 형제들은 먼 거리까지 찾아왔습니다. 형제들이 마중하러 온 장소는 압비와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였습니다. 바울은 형제들과 교제를 하며 로마로 가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승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지란지교와 같은 형제였을 것입니다.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백부장의 도움으로 일반 주택에 머물면서 생활했습니다. 생활에 필요한 경비는 형제들로부터 후원을 받았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바울과 일행은 아르바이트하며 경비를 충당했을 것입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은 “로마에 도착한 바울의 마지막 여정”을 통해 사도행전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을 첫 강설한 후 오늘 107번째입니다. 2년 정도의 긴 여정이었습니다. 바울 선교의 긴 여정을 마무리하는 장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바울의 여정을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았으면 합니다. 바울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사역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푯대를 향하여”,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를 믿었습니다.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만을 의지했습니다. 주님께서 바울과 함께하신 지란지교였습니다. 로마에 도착한 바울이 무엇을 했습니까? 로마에서 생활하고 있는 유대인 지도자들을 초청했습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보시면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그들이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준 바 되었으니”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자신의 왜 로마에 왔는가를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지도자들은 황제 앞에 송사하는 바울에 관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초청에 응했던 것입니다. 초청을 받고 온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바울은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준 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변호하려는 목적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로마에서 신앙생활 하는 신자들에게 이야기해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자기에 대한 어떤 소식을 전해 들었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야 황제의 법정에서 바울은 변호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 지도자들에게 계속해서 18절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유대 율법의 죄도 범하지 않았음에도 예루살렘에서 자신을 로마인의 손에 넘기었기 때문에 나는 심문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의 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나를 석방하려고 했습니다. 법정에서 로마인들은 바울이 누명을 쓴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총독의 법정에서 그들은 무죄를 알고 있었지만,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베스도는 도리어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재판받을 것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왜 로마 황제에게 상소한 것입니까? 유대인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아서 그렇습니까? 19절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유대인들이 나를 고발했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황제에게 송사했지만, 악한 감정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을 고발하지 않고 로마로 온 것은 복음을 위해 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죽이려고 한 유대인을 죽이거나 고발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모습은 예수님을 떠 오르도록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자들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중점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자신이 오해받으며 쇠사슬에 매인 죄인의 모습을 20절에서 말합니다. “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이 무엇이었습니까? 구약에서 말씀하신 메시야에 대한 소망이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이 기대하던 메시야가 오셨다는 것을 전 했습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지금 쇠사슬에 매였다고 합니다. 바울은 약간의 자유는 있었지만, 유대인들이 원하는 장소에서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중점으로 말한 것입니다. 아마도 긴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는 단지 몇 마디로 요약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메시야를 알기 때문에 예루살렘 공의회에서도, 벨릭스와 베스도 총독 그리고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 같은 마음으로 증언했습니다. 바울은 무엇을 믿고 있는가를 복음으로 증명한 것입니다. 오신 메시야를 통해 부활이 무엇인가를 복음으로 전했습니다. 구약에서 말씀하신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바울은 비록 유대인으로부터 오해를 받아 죄인의 신분으로 연금되어 있지만, 두려움 없이 자신이 전해야 할 본분에 충실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을 위한 메시야로 만들었지만, 바울은 참된 메시야가 누구인가를 전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바울은 쇠사슬에 매인 죄인으로 로마에 와 있었습니다.

 

 

바울의 이야기를 들은 로마에서 생활하는 유대 지도자들은 21절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전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바울 당신과 관련된 일을 편지로나 인편으로나 보고를 들은 바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당신의 형편과 사상을 들었으니 우리 나름대로 판단 내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에 관한 소식을 들었지만, 이스라엘으로부터 공식적인 그 어떤 편지와 누가 와서 이야기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유대 지도자들은 22절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기 때문이라 하더라” 로마인들은 황제 숭배 사상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유대 종교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유대인 지도자들은 로마에 와 있는 바울을 통해 듣고자 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사상을 듣고자 한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기회였습니다. 자신의 사상을 이야기함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과 유대지도자들은 날짜를 정하여 바울이 유숙하는 집에 모였습니다. 그때 바울은 무엇을 이야기했습니까? 23절을 보시면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유대 지도자들이 정한 날짜에 바울이 잠시 집으로 사용하는 곳에 왔습니다. 그럴 때 바울은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강론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에게 주신 구원의 성취를 의미합니다. 구원의 성취를 위해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잘 알 수 있도록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전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곳이라면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특히 로마서와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바울이 한 강설은 23절과 같습니다. 바울은 핵심적이고 정확한 증거로 전했습니다. 복음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 나라이며 그 하나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고 죽음과 부활을 통해 확증되었습니다. 다시 오실 재림으로 완성될 것임을 바울은 전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바울이 전한 메시지에 유대 지도자들은 24절에서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이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복음을 듣고 믿는 자도 있지만, 믿지 않는 자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믿지는 않았지만, 바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2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바울은 사6:9-10절을 인용하여 성령에 의한 영감 된 사실임을 말했습니다. 바울이 인용한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용하시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이사야의 글을 통해 선민사상으로 가득한 유대인들이 영적인 소경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고의로 부인하는 자들에게 너희 마음이 어떠한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와 같습니다. 복음을 들어도 진실한 마음으로 믿지 않고 외식하며 믿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26절에서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말함으로 사람의 마음이 완악함을 표현했습니다. 이사야가 말을 전했지만, 믿지 아니함으로 바벨론의 포로가 된 것처럼, 오늘날 복음을 듣지 아니하는 것은 영원한 지옥으로 가는 포로가 됩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27절에서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복음을 거부함으로 그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은 구원이 없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돌이킴으로 구원에 참여하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시기와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삶에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주신 성경의 말씀을 듣고 수용함으로 고통에서 상처가 치유되고 참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합니다.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그때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팡이 교회는 지상명령을 감당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28절에서 복음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유대인에서 이방인에게로 전도 대상을 전환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은 모두 지옥으로 가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시되었으나 그들이 거부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구원은 이방인들에게 보내어졌습니다. 바울은 언제나 유대인에게 먼저 복음을 전한 후 이방인에게로 향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거절했으나 이방인은 믿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 수 없지만 놀라운 일입니다. 구약의 말씀을 잘 알고 있는 자들이 믿어야 하는데 오히려 이방인이 믿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본에는 29절이 없습니다. 구원받은 후 바울 아니면 누가에게 질문해 보시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본에는 “저가 이 말을 마칠 때에 유대인들이 서로 큰 논쟁을 하며 물러가더라”가 있기도 합니다.

 

바울은 스스로 경비를 부담하며 집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30절을 보시면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바울의 재판을 서둘러야 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스스로 경비를 부담하며 자신에게 오는 자들을 다 영접했습니다. 그 일을 2년 동안 했습니다. 2년 동안 로마에서 복음이 전파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구원의 복음이 퍼지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에서 고소한 자들이 승산이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황제가 주관하는 재판에 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고발한 자들은 자신들이 불리하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구체적인 증거가 없이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면 자신들이 오히려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특히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바울의 재판은 길어진 것 같습니다. 하여튼 바울은 2년 동안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지만,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도행전의 마지막 31절을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바울은 어디든지 자신이 있는 장소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누가는 이 말씀을 가지고 마무리하며 승리의 개가를 불렀습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담대하게 전함으로 그 누구도 막는 자가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전체에서 이어져 오던 “하나님의 말씀의 승리”에 관한 종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에게 주어진 소명과 주님께서 말씀하신 약속이 성취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며 사도행전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누가는 로마에 있는 동안 로마 사람 신자들과 만난 이야기를 기록하지 않습니다. 로마에서 신앙생활 하는 신자들 즉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기록합니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무며 복음을 전한 내용을 기록합니다. 로마에 있는 유대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같이 이야기를 합니다. 그들은 바울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는 기독교 복음의 총 요약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만이 아니라 모든 성경이 같습니다. 그러면 바울의 메시지를 듣고 모두 믿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믿는 자도 있었지만, 그 반대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이 이방인에게 선교가 되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있는 동안 옥중서신으로 잘 알려진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기록했습니다. 이 서신을 기록하며 바울은 예수님을 증거 했습니다. 필요한 경비를 감당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늘날 복음 듣는 것을 거부하는 시대에 바울은 더 힘을 주고 있습니다. 삶의 체험을 느끼면서 바울은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로마에서 기록한 서신은 사도 바울의 경륜에서 나온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의 마지막 일생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온전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일부는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초의 정통 기독교 문헌을 보시면 바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주후 95년에 기록된 문서에 의하면 바울은 “서쪽 끝”에서 전도했다고 합니다. 서쪽 끝은 스페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울이 가고자 했던 지역이기도 합니다. 역사가인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바울은 1차 투옥에서 풀려 난 후, 2차 투옥에서 순교했다고 기록합니다. 우리는 바울에 대한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2차 투옥할 때 처형을 기다리며 마지막 편지인 디모데전후서를 기록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바울 자신도 디모데전후서를 기록하며 죽음을 예상한 것 같습니다.(딤후4:6-8절) 그리고 전승에 의하며 바울은 모라 성문 바깥쪽에 있는 오스티안 도로에서 참수되었다고 하기도 합니다. 하여튼, 바울은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이었습니다. 어떠한 위기 상황에서도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의지하는 사도였습니다. 위기에서도 바울의 신앙은 반석이었습니다. 오히려 바울을 통해 복음이 전달되었습니다. 바울은 성령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일꾼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구원을 선물로 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 했습니다. 이렇게 증거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나라를 믿기에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경의 말씀에 따라 신앙인으로 생활하는 신자들에게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류의 역사 위에 하나의 구체적이고 능력 있는 현실로 이미 임해 있습니다. 그 나라를 위해 우리는 어떤 마음을 품어야 하겠습니까? 우리 인생의 주도권은 나에게 있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주도권으로 당신님의 나라로 인도하십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구절이 31절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으며 승리하는 것으로 마무리합니다.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사탄도 방해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지팡이 교회도 같다는 것을 믿으며 사도행전의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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