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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요한계시록2:12-17
강설날짜 2020-08-23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RjKTXWrwHUk

분별없는 관용주의 버가모 교회에 보내는 말씀(계2:12-17)

 

지팡이 교회는 주 안에서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요 충성스러운 일꾼이요 청지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기 위해 우리는 서머나 교회에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서머나 교회를 통해 본문의 해석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전후 문맥을 보아야 본문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에게 각자 필요한 은사를 주심으로 지상명령을 감당하도록 하십니다. 지상명령을 감당하기 위해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로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 지팡이 교회는 서머나 교회에 하신 말씀 중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입니다. 한국 교회에서 좋아하는 성구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저를 어릴 때 교회에서 가르쳐 주던 전도사님 비문에도 같은 성구가 있습니다. 이처럼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은 성도에게 뜨러운 마음이 들도록 하는 귀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본분에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알았으면 합니다. 서머나 교회는 약간의 힘을 가진 상태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환난을 받고 궁핍하지만 실상은 부요한 자”였습니다. 환난을 통해 서마나 교회는 실제로 순교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도 요한의 제자요 서머나 교회의 목사인 폴리갑입니다. 그가 한 유명한 말은 저번 주 강설을 보십시오. 폴리갑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순교를 택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를 죽였던 것입니까? 역사적인 배경이 중요합니다. 서머나는 로마가 세계를 정복하기 전부터 협력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서머나는 부유한 도시였기 때문에 자신들의 부를 시키고자 했습니다. 향료와 무역과 아름다운 항구 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구도 20-30만 정도였습니다. 지금도 발전하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지키기 위해 서머나는 황제숭배를 했습니다. 황제숭배를 하면 증명서를 발급해 주었습니다. 증명서가 없으면 서마나 교회처럼 순교와 고난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일을 잘 알고 있는 주님께서는 끝까지 인내할 수 있도록 서머나 교회에 위로의 권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서머나는 주위 환경에 의해 어려움을 당했지만, 주님으로부터는 부유한 자라고 칭찬받았습니다. 교회 안에서만 열심히 해서가 아니라 일반적인 생활에서 든든한 믿음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로 모범을 보이는 성도였습니다. 지팡이 교회도 서머나 교회를 통해 나를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처음 듣는 분이라면 저번 주 강설을 보시면 좋습니다.

 

오늘은 분별없는 관용주의 버가모 교회를 통해 주님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각 신자에게 필요한 은혜의 말씀을 통해 구원으로 인도하여 주시리라 믿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사도 요한이 감독하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통해 각 서신의 중요한 부분을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의 현실을 바르게 인식함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입니다. 외국인이 한국에 오면 자신이 가고 싶은 지역을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도 버가모에 대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버가모 교회의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버가모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가장 북쪽에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감독하기에 먼 거리이기도 합니다. 버가모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세 번째로 번영한 도시였습니다. 에베소와 서머나는 항구가 발달하여 상업적으로 번창했습니다. 그와 반대로 버가모는 항구보다는 문화적인 측면에서 발달하였습니다. 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해안으로부터 23km 거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유명한 도서관이 있었습니다. “페르가몬”(버가모) 도서관으로 당시 20만 권이 있었습니다. 손으로 모든 것을 만들어 기록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것입니다. 참고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은 50만 권을 소장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입니다. 버가모 도서관이 유명한 이유는 세계 최초로 “양피지”를 발명한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버가모에 대한 이름을 알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헬라어로 페르가모는 “이중”이라는 뜻이고, 가모스는 “결혼 그리고 연합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을 합치면 이중 결혼 또는 이중 연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버가모는 이처럼 세상 권력과 연합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분별없는 것입니다. 버가모는 황제숭배로 꽃을 피운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머나가 황제숭배의 싹을 낸 것을 확장하여 꽃을 피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버가모는 서머나와 달리 주전 130년경에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버가모로부터 대략 100km에 있으며, 로마의 식민지가 되면서 아시아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그만큼 로마에는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왜냐하면, 버가모는 아시아와 로마의 속주를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버가모는 원뿔꼴의 높은 산이 있어서 그곳에 “언덕 위의 도시”를 세웠습니다. 언덕 위의 도시에서 산 아래 주위를 보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경치가 좋았습니다. 버가모는 도서관으로도 유명하지만, 신전과 황제숭배 그리고 유명한 고대 병원도 있었습니다. 오늘날 군 의무대의 마크에서 뱀 두 마리가 엉켜 올라가는 형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버가모와 관련된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버가모는 의학의 도시로 유명하기 때문에 의학의 신 또는 치유의 신인 아스클레피우스 즉 뱀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뱀 신과 연결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신전 안에는 의과 대학도 있었습니다. 버가모에 언제 복음이 들어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들었던 사람들이 돌아와서 교회를 세웠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버가모에도 거룩한 교회가 있었고 거기도 한때는 부를 누린 장소이며 오늘날까지도 번영한 도시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슬람으로 배교한 도시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를 두심으로 영원한 형벌이 아닌 구원으로 인도하시고 있습니다.

 

지팡이 교회도 남은 자와 같은 신앙인으로 성장하기를 소망합니다. 굳건한 반석과 같은 신앙으로 든든히 세워져 가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해 주님께서 버가모 교회에 하신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라고 하셨습니다. 날선 검이라고 하면 왠지 두렵기도 합니다. 검은 상징적으로 권위와 능력을 갖춘 심판을 의미합니다. 버가모는 외부로부터 오는 핍박을 이기었지만, 유혹을 물리치지 못했습니다. 핍박은 강인한 정신으로 이기고자 하는 마음이 들 수 있지만, 유혹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검’이라는 표현은 30회 정도 사용되었습니다. 그중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고 있는 “화염검”이 있습니다. 검은 이처럼 심판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좌우에 날선 검이라는 글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버가모는 다른 도시와 달리 자체적으로 사형집행권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사형집행을 할 수 있도록 로마 황제는 버가모 총독에게 “정의의 검”을 지급하여 마음대로 처형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날에도 버가모 유적지에서는 작은 검을 기념품으로 판다고 합니다. 이것과 연결하여 생각하면 버가모 교회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로마 황제가 준 정의의 검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지시고 행하시는 좌우의 날선 검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가지신 검은 권위와 능력을 가진 심판의 메시야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공의를 분명하게 시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당시 그리스도인은 재림의 주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지팡이 교회도 같은 마음입니다.

 

좌우에 날선 검이신 주님께서는 13절에서 버가모 교회의 상태와 상황을 묘사합니다.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우리는 어떠한 생각이 떠오르십니까? 버가모 신자들이 황제숭배와 우상숭배의 세계에서 신앙생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버가모는 서머나처럼 상업적으로 발달하지는 않았지만, 역사나 정치적으로는 능가한 도시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버가모도 황제숭배 즉 우상숭배로 가득했습니다. 왜냐하면, 버가모는 그 당시 행정의 수도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버가모 교회 신자들에게 너희가 어디에 사는지 나는 알고 있다고 합니다. 우상숭배로 가득한 도시에서 버가모 교회는 신실함을 지키었다는 표현입니다. 우상숭배 하는 장소에서 너희는 믿음을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탄의 권좌에서 믿음을 지키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버가모 교회는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았습니다. 행정의 중심지요 황제숭배로 가득한 도시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당하는 고난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은 당연합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눈에는 신자들이 당하는 고난이 애처로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고난 당하지만, 믿음을 지키고 있는 버가모 성도를 보며 대견하다고 했을 것 같습니다.

 

사탄이 버가모를 통치하고 있는 곳을 상징적으로 이야기하시는 주님께서는 버가모 교회를 사랑하시고 있었습니다. 버가모는 당시의 사회 구조와 시스템 자체가 사탄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도시에서 정금과 같은 신앙을 지키는 것은 힘들었을 것입니다. 사탄이 한자리에만 있지 않습니다. 어느 때에는 여기에 있고 어느 때에는 저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타락한 천사는 어느 장소에든 있지만, 더 관심이 있는 지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버가모에 서신할 때는 사탄의 권좌가 버가모에 있었습니다. 사탄을 미워하는 우리는 주님만 의지하며 순결성을 지키어야 합니다. 사탄은 굶주린 짐승처럼 성도를 잡아먹고자 집중적으로 일을 합니다. 그런다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남은 자를 보호하십니다. 버가모에 사탄의 권좌가 있어도 주님께서 구원하신 남은 자를 이길 수 없습니다. 버가모 성도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네가 내 이릉을 굳게 잡아서’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현재 능동태로 신자들은 계속해서 늘 주님만 바라보며 잡았습니다.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한 교회였습니다. 버가모 교회이든 지팡이 교회이든 즉 어느 시대이든 사탄의 능력과 영향력이 만연한 곳에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같습니다. 오직 주님의 날이 오기까지입니다. 재림의 주가 오시기까지 믿음을 지키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을 지킬 수 있도록 13절에서 ‘충성된 증인 안디바’를 이야기 하십니다. 주님의 충성스러운 증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안디바였습니다. 버가모가 낳은 순교자였습니다. 여기서 증인이라는 단어는 순교자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증인을 바로 하려고 하면 순교를 해야 합니다. 버가모는 행정의 수도이면서 정의의 검으로 악한 일을 했습니다.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자들을 정의의 검으로 죽였던 것입니다. 검은 정의여야 하는데 누구를 위해서 사용했습니까? 정의가 아닌 로마를 위한 검이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버가모는 반석과 같은 마음으로 신앙 생활했습니다. 순교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고난 겪기도 쉽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 이처럼 신자들은 자기가 누릴 수 있는 유익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단이 필요합니다. 버가모 신자와 같아야 합니다.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며 충성된 증인 버가모 교회였습니다.

 

여기까지는 주님으로부터 좋은 칭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14절에서는 책망하십니다. 왜 그런지 14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칭찬을 멈추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버가모 교회를 통해 사탄의 기묘한 작용을 주의하고 깨우침으로 지상명령을 감당하기를 소망합니다. 버가모 교회는 순교자가 있었고 순교자 반열에 동참한 교회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주님께서는 자만과 오만을 경계하도록 책망하십니다. 고전10:12절을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입니다. 버가모는 교회 밖으로부터 오는 고난을 감당했지만,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에베소 교회와 다른 점이기도 합니다. 에베소는 발람의 교훈을 막고자 애셨지만, 버가모는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발람의 교훈은 “이렇게 하는 것이 좋지 않으냐? 비교적 간단하지만 그런 것이니라하고 인생의 하늘의 뜻을(천리) 터득한 것같이 이야기하는 것”를 의미합니다. 이런 영향은 상식적으로, 점진적으로, 지적으로 미침으로 버가모 교회는 분별력을 상실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발람이 누구입니까? 애굽을 떠나 출애굽 하며 광야를 디니던 이스라엘이 모압 평지에 도착했을 때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 맞은편에서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있었습니다. 요단강만 넘으면 약속하신 지역이었습니다. 그때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을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소문을 들어도 이스라엘을 막은 나라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발락은 메소포타미아에 살고 있던 발람이라고 하는 선지자를 초청합니다. 돈을 주고 데리고 와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했습니다. 발람은 소를 잡아놓고 제사를 지내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주하려고 해도 발람의 입에서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장소가 좋지 않다고 생각한 발람은 이스라엘의 꼬리만 보이는 장소로 옮기어 저주를 했지만 결과는 똑같았습니다. 저주가 아닌 축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끄실 때는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 없었습니다. 발람의 뜻은 “백성을 정복하라”입니다. 놀랍게도 16절에서 나오는 니골라 당과 같은 뜻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했지만 축복한 발람은 다른 방법을 동원합니다. 바람은 이스라엘이 바알을 숭배하기 시작하니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음행을 하도록 함으로 스스로 넘어가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발람의 이야기를 들은 발락은 모압 여인을 이용해 유혹하고 음행하도록 했습니다. 이방인과 결혼하도록 함으로 우상의 음식과 음행을 하게 했습니다. 발람의 속임수에 이스라엘은 분별하지 못하고 넘어갔습니다. 이스라엘은 영적인 불신앙이 생기었고, 여사제들과 음행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서는 발람을 이단자의 상징적인 이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같은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이단자들을 말하는 것으로 버가모는 우상숭배는 하지 않았지만, 이단자를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우상숭배는 하지 않았지만, 우상의 제물과 행음을 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단을 분별해야 했지만 그들과 타협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생활과 이방인의 문화적 관습은 조화로울 수 없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에베소 교회와 반대였습니다. 에베소는 이단자를 잘 분별하며 바른 교리와 바른 성경, 바른 예배로 주님을 믿었습니다. 이런 점은 성공했지만, 첫사랑을 잃어버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버가모는 주님을 향한 순교와 사랑을 지키고자 했지만,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발람 즉 이단을 분별하지 못하고 음행했습니다. 인생에서 관용해야 할 때도 있지만, 버가모는 불관용을 관용으로 넘어갔습니다.

 

15절을 보시면 발람이라고 말하는 이단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기록합니다.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주님으로부터 서신을 받은 버가모는 읽으면서 니골라 당이 누구인지 알았을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발람을 이단으로 인식했던 것처럼 15절의 첫 시작은 ‘이와 같이’이기 때문에 같은 이단이었습니다. 버가모는 니골라 당으로부터 어려움을 당하며 분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당시 현실을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교부들의 글에서 니골라 당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니골라당 무리는 안디옥 출신으로 일곱 집사 중 한 분이었습니다. 니골라 당은 참된 신앙의 길을 가지 못하도록 하는 이단이었습니다. 발람의 교훈은 사상적 차원에서 근본적인 신앙의 문제였다면, 니골라 당은 소아시아 일대의 신자들을 음행과 향락주의와 영지주의 그리고 혼합주의 등으로 믿음 생활을 못 하도록 했습니다. 서로 같은 점은 ‘이와 같이’처럼 서로 밀접한 관계는 하나님의 백성을 타락하도록 합니다. 도덕성이 부패하도록 함으로 세속에 물들도록 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 있는 버가모 교회에 주님께서는 16절에서 답을 주십니다. 돌이킬 기회를 주셨습니다. 16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이 말씀은 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훈에 빠져있는 버가모 교회에 대한 권면과 그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의 경고 메시지입니다. 권면의 메시지는 ‘회개하라’입니다. 회개는 기독교에서 가장 근본입니다. 회개가 없이 회심은 없습니다. 회심한 성도도 끊임없이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는 힘이 있습니다. 버가모는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사탄의 올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처럼 분별하며 고난을 극복해야 합니다. 사탄은 버가모 교회가 무너지도록 발람과 니골라 당의 가르침을 이용하여 타락하도록 했습니다. 물질과 혼합주의 등을 통해 서머나 교회를 좀 먹도록 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도 주님께서는 버가모 교회를 사랑하시기에 권면하며 칭찬하시고 책망하십니다. 음행과 우상숭배 등으로 타락하는 것은 기독교의 진리가 아닙니다. 세상을 향해 성경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이웃을 사랑함으로 하나님께서 누구신가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회심한 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입니다. 이렇게 하려면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기독교인만 거룩해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거룩해야 합니다. 하나님 형상으로 회복하고 싶습니까? 기초는 성경의 말씀을 믿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기초를 아시는 주님께서는 버가모 교회에게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15절에서 회개하라는 신앙의 회복을 이야기합니다. 그런 다음 ‘내가 네게 속히 가서’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지금 그리스도께서 임하고 있다는 긴급함입니다. 그러면서도 ‘내 입의 검’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보호하시면서도 타락한 자들은 말씀의 검으로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심판을 알기에 하나님의 이끄심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떠나지 않습니다.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떠날 수 없습니다. 버가모 교회이든 지팡이 교회이든 주님의 몸에서 벗어나면 죽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부와 성공을 위해 모이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가 타락하는 현실에서 지팡이 교회는 작은 불씨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참된 신앙을 유지하며 세상에서 등불과 같은 역할을 하며 사람을 구원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회개를 명령하신 주님께서는 17절에서 이기는 자에게 보장된 약속을 말씀 하셨습니다. 오늘 강설도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교회들에게 신자들에게 성도에게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신자이고 성도의 공동체입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에게 이길 것을 권면합니다. 그럴 때 약속된 축복이 있습니다. 17절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여 승리한 자들에 주시는 약속이니다. 이기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소용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기는 자들에게는 주시는 17절을 보십시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감추었던 만나’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만나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유지할 삶의 능력 즉 영의 양식을 먹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상 제물과 먹을 것을 위해 생활하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은 영의 양식을 먹도록 함을 구원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알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영의 양식인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도 같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날을 소망하며 어떻게 신앙생활 하고 싶습니까?

 

영의 양식을 먹는 그리스도인에게 이제는 새 이름이 기록된 ‘흰 돌’입니다. 해석하기 어렵지만, 당시에 경기에서 승리한 선수에게 이름을 새겨 주었던 흰 돌을 의미합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버가모 교회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승리했을 때 주어지는 구원의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귀로 듣고 마음으로 돌이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떡이십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 자는 절대 주리지 않습니다. 영의 양식을 먹게 하심으로 든든하게 하십니다. 영의 양식을 먹음으로 구원을 믿고 지상명령을 감당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만나를 먹고 싶습니까? 지금이 바로 회개할 때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성경에 있습니다. 이상한 사이비와 이단에 있지 않습니다. 사탄은 올무를 놓아 신자들이 타락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참된 신자에게는 소용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강력하신 하나님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주위 환경이 좋지 않았습니다. 나쁜 환경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안디바라는 순교자가 있었습니다. 안디바는 충성된 증인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로서 모범을 보인 성도요 교회였습니다. 이러한 점은 칭찬받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버가모 교회를 책망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상의 제물과 발람과 니골라 당 즉 이단들을 용납했습니다. 사탄은 올무를 놓아 교회가 무너지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주심으로 남은 자를 구원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나 자신을 기쁘게 하고 내 자신의 행복을 얻고자 그리고 세상의 부귀영화를 얻고자 신앙생활 하지 않을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좌우에 날선 검이신 주님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검은 사랑의 검이요 정의의 검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것과 다릅니다. 오직 주님의 검만이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신앙을 지키고 싶습니까? 주님을 믿고 싶습니까? 회개하라는 주님의 메시지를 들으십시오. 그럴 때 신앙의 승리자들에게 주어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감추었던 만나와 흰 돌입니다. 구원자에게만 주어지는 상입니다. 이 상을 받는 귀한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권면을 통해 칭찬하시고 책망하시는 말씀을 귀담아들으십시오. 지팡이 교회는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우리도 주님의 증인입니다. 증인은 보고 들은 것을 사실 그대로 증거 하는 성도입니다. 귀한 성도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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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말씀 전은덕 계3:14-22 2020-09-20 516
195 승리한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내는 말씀 전은덕 계3:7-13 2020-09-13 436
194 자기 만족주의 사데 교회에 보내는 말씀 전은덕 계3:1-6 2020-09-06 520
193 악을 간과한 타협주의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말씀 전은덕 걔2:18-29 2020-08-30 417
» 분별없는 관용주의 버가모 교회에 보내는 말씀 전은덕 요한계시록2:12-17 2020-08-23 396
191 고난 중에 승리한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말씀 전은덕 행2:8-11 2020-08-16 478
190 사랑을 잃어버린 정통주의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말씀2 전은덕 계2:1-7 2020-08-02 461
189 사랑을 잃어버린 정통주의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말씀1 전은덕 계2:1-7 2020-07-19 459
188 로마에 도착한 바울의 마지막 여정 전은덕 행28:17-31 2020-07-12 636
187 드디어 바울이 로마에 입성하다 전은덕 행28:11-16 2020-07-05 543
186 사도 바울이 구조된 멜리데 섬 전은덕 행24:1-10 2020-06-28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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