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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계3:7-13
강설날짜 2020-09-13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_lJnRtuFvyI

승리한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내는 말씀(계3:7-13)

 

오늘은 전장원 목사님의 글을 가지고 왔습니다. 한국교회의 이원론의 원인에 대한 짧은 생각은, 신학에 대한 교회의 몰인식과 부재에 있으며 또한 아직까지 남아있는 잘못된 동양적 기복 사상의 내재에 있다고 본다. '신학으로는 목회가 안된다'는 생각이 대부분의 목회자에게 고정 관념처럼 지배하게 되어 '신학 없는 목회'라는 모순을 낳았고, 이는 결국 잘못된 신앙의 기대로 지나친 개인주의가 되었으며, 거룩한 공교회를 무너뜨리고 개교회주의와 교단 중심의 집단 이기주의를 만들어 내고 말았다. 이에 따라 교인들 역시 바른 신앙에 대하여 뚜렷한 주관을 가지지 못하고 엉뚱한 이단 사상에 미혹되어 지고 오히려 교회를 무너뜨리는 세력으로 자라나고 말았다. 어쩌면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것은 그동안 우리 교회가 지나친 율법주의 아래 있었던 게 아닌가 돌이켜 보게 된다. 바른 신학으로 신앙을 교육하고 가르치는 일은 결코 이론적 틀 안에 가두어 두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삶과 행동과 사고를 결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영향력을 결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교회는 지나친 독선주의와 권위주의가 너무 강하다. 교권과 율법주의적 권위와 위협적 구조가 교회를 지배하고, 획일화된 교조주의가 교회의 분위기를 조성하게 된다. 그 결과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게 되어 작게는 교회의 분열이 일어나고, 크게는 교단의 분열이라는 아픔의 역사를 갖게 되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또 다른 세상, 곧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고 이제 그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그 일이다. 다시 교회가 이 세상 속에서의 역할과 사명에 대한 바른 인식으로의 전환이 있었으면 좋겠다. 나아가 바라기는 사도로, 선지자로, 복음 전하는 자로, 목사와 교사로 삼은 것에 대한 마땅한 도리가 되며 그 이유가 되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2)"는 소명을 결코 잊지 말아야만 할 것이다. 전장원 목사님을 글을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힘들더라도 신학이 있는 목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귀도 드 브레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벨기에가 네델란드로부터 독립하기전 그 지역에서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분이 귀도 드 브레입니다. 그는 종교개혁 시대 중요한 개혁자였습니다. 성경의 말씀을 지키고자 젊은 나이인 45세에 순교한 사역자였습니다. 젊은 나이에 순교를 감당하고자 한 이유는 개혁교회의 신앙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시작된 것임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카톨릭이 가장 타락한 시대에 성경의 말씀을 따르고자 타협하지 않고 순교로 입증한 위대한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귀도 드 브레의 순교가 있어도 계속해서 많은 순교자가 있었습니다. 순교자의 피 값은 결국 유럽 지역에 많은 개혁교회가 설립되도록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어떠합니까? 타락한 교회는 무너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한국 교회의 현실과 같습니다. 초기의 마음과 같은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순교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귀도 드 브레의 편지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등가죽이 벗겨지고, 혀가 잘리고, 온 몸이 불속에 던져지는” 등 온갖 핍박을 당하여도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만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승리한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내는 말씀”처럼 승리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귀도 드 브레의 신앙처럼 순결한 성도의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 말씀을 통해 반석과 같은 마음이 되기를 부탁드립니다. 반석과 믿음으로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은 승리한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승리한 빌라델비아 교회는 서머나 교회처럼 책망할 것이 없는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이 세상의 교회 중 완벽한 교회는 없지만, 주님께서는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빌라델비아 교회를 증오하시지 않았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그릇된 사실이 없고 거기에 관여된 가르침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몇 사람이 장차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 와서 굴복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빌라델비야 교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요 주님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이 부러워할 만한 교회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그런 교회이기도 합니다. 빌라델비야 교회가 어떤 교회이기에 주님으로부터 칭찬만 들었는가를 오늘 말씀을 통해 들으므로 승리하는 지팡이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빌라델비아 도시는 포도를 재배하는 작은 도시였습니다. 포도가 잘 자란 이유는 도시 북쪽은 화산 평원이 펼쳐져 있어 비옥한 평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라델비아는 작은 도시라 할지라도 “동방의 관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유는 동방으로 가기 위해 가장 먼저 들러야 하는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로마와 아시아를 연결하는 아주 중요한 통로가 되는 상업 도시로 발전한 빌라델비아였습니다. 이처럼 농업과 상업이 발전한 도시이기에 풍요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헬라 문화와 언어를 퍼뜨릴 목적으로 세워진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진이 빈번하게 일어나 피해를 보는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주후 17년에 대지진이 일어나 로마의 도움을 받아 도시를 재건하기도 했습니다. 지난주 배운 사데 교회와 같은 형편이었습니다. 로마의 도움을 받다 보니 로마를 더 칭송했으며 황제를 새 황제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도시는 더 발전하면서 나중에는 “작은 아테네”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농업과 상업으로 발전해서 그런지 유대인들이 많이 생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유대인들로부터 교회가 박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빌라델비아 교회는 많은 열매를 맺는 주님의 교회였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가장 나중에 세워진 교회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보십시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님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거룩하고 진실’하다고 하십니다. 거룩은 하나님에게 붙여진 성품입니다. 진실은 구약의 아멘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님을 신실하며 믿음직함으로 빌라델비아 교회에 소개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구약에서 하나님에 대한 칭호로 사용된 것을 주님께서는 당신님에게 적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에게 적용하여 신성과 메시야 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당신님이 참된 메시야로서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구원자라는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당신님을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로 소개합니다. 당신님께서 문을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계1:8절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즉 사망과 음부의 열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영원한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사를 제어하는 권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행복이지만,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는 두려운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가진 열쇠는 ‘다윗의 열쇠’로 이렇게 표현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22:22절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이사야 22장에 나오는 전후 맥락은 이렇습니다. 히스기야의 국고를 맡은 궁내 대신 셉나가 앗수르의 포위망이 좁혀지는 상황에서 민족의 위기에 처했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를 위하여 높은 곳 왕실 묘지에 웅장한 묘실을 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셉나 대신 내 종 엘리아김을 세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김에게 22절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열쇠는 권리와 관리권을 의미합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다윗의 열쇠의 상징은 메시야의 왕권을 암시하는 것으로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이 하늘 나라의 주관자라는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 열쇠를 하늘 문을 닫고 열 수 있는 분이 당신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열쇠를 강조하신 것입니까? 당시 유대인들만 다윗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이 잘못된 이야기라는 것을 여기서 확인하여 주신 것입니다. 절대적인 열쇠는 이 세상 그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선지자라고 아브라함이라도 베드로와 바울이라도 소용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가지고 있는 열쇠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에게도 열쇠를 주셨습니다. 내가 어떻게 신앙생활 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을 믿도록 하는 열쇠입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마16:19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부분은 홈페이지에 올려져 있습니다. 하늘 문을 여닫는 열쇠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믿음 생활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생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지진 열쇠는 생명을 살리고 죽일 수 있는 것입니다. 8절을 보시면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주님께서는 당신님의 열쇠를 교회 앞에 두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열린 문’의 의미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님께서 가지신 열쇠와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신 열쇠는 선교의 문이 열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열쇠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를 성경을 통해 가르칠 수 있는 열쇠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삶의 열쇠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열쇠는 신자들에게 전도의 기회입니다. 영혼 구원을 할 수 있는 시간의 기회입니다. 재림의 주로 오시는 날까지 성도가 전도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 유일하게 열쇠을 받은 교회는 빌라델비아였습니다. 빌라델비야 교회는 적은 능력으로 주님의 말씀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오직 주님을 믿으면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의 길입니다.

 

빌라델비아 도시는 상업과 농업이 발달한 도시였지만, 교회는 경제적으로 약했습니다. 교회 규모 즉 인원도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사데 교회와 반대로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공격이 있었습니다. 공격을 받으면 상처받고 신자들이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사데 교회와 반대로 빌라델비아 교회는 살아 있는 교회였습니다. 거기다 책망도 없으니 참으로 놀랍기도 합니다. 참된 신앙인의 길은 부유하거나 가난함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가 주님을 참되며 의지하며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가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님의 능력을 믿으며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었던 것은 적은 능력이었습니다. 우리 지팡이 교회도 적은 능력이라도 있기를 소망합니다. 적은 능력이라도 해바라기처럼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입니다.

 

적은 능력으로 주님만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9절을 보시면 어려움을 당하도록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9절을 보시면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사탄의 회당’이라고 하셨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만 있었던 사탄의 회당이 아니라 서머나 교회에도 있었습니다.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면서 교회를 훼방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훼방하는 자들이 오히려 빌라델비아 교회 즉 너희들에게 와서 굴복하고 절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외적으로는 혈통과 종교적으로 자칭 유대인이라도 참 유대인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자칭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아도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자칭 유대인들이 거짓말하며 자신들의 권리와 요구를 앞세우며 교회를 대적하지만, 빌라델비아 교회는 진실과 참됨으로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모습입니다. 지금은 비록 유대인들로부터 빌라델비아 신자들이 멸시와 핍박을 당하지만,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대상이 된 성도는 주님의 재림 때에 변호하시며 구원의 면류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면류관을 왜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까? 그것을 10절에서 잘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빌라델비아 교회는 인내의 말씀을 지키었습니다.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좀더 부연 설명한 것이 10절입니다. 약간의 힘을 가지고도 주님을 믿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인내의 말씀을 지키었다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지팡이 교회도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시험과 고난 등을 당하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인내와 담대함으로 지혜롭게 대처하며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인내의 말씀을 잘 지킨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하신 말씀은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좀 어려운 해석일 수 있습니다. 당장 당하는 고난을 면하게 해주겠다는 의미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종말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재림할 때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 주님께서 시험을 당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보호하신다는 선언입니다. 그러기 위해 지팡이 교회는 인내의 말씀을 잘 듣고 이해하며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11절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주님께서 아무도 모르게 도적같이 속히 오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백성들에게 당신님을 끝까지 잡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끝까지 잡으려면 교회는 믿음을 지속해서 공고히 해야 합니다. 주님의 때는 성도가 기다리고 있는 영광의 날입니다. 그 영광의 날은 지체함 없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면류관입니다. 주님께서 오심으로 성도에게 주어지는 영광입니다.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도록 교회는 지속해서 인내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핍박과 고난이 다가와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실 초지일관으로 승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완전무장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며 주님을 믿고 애통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성도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만을 믿고 의지하며 기도하는 성도와 함께하십니다. 지팡이 교회는 미래의 면류관을 바라보며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12절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12절을 보시면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이 말씀은 빌라델비아 교회가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말씀하셨습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에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기둥은 안정과 버팀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새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는 것입니까? 당연히 새 예루살렘에는 눈에 보이는 즉 구약의 성전과 같은 것이 없습니다. 새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것은 구약 성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이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성전 이미지를 사용하여 빌라델비아 교회에 적용하신 것입니다. 성전의 기둥이 된다는 것은 완전하게 성취된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복을 의미합니다. 기둥이 안정과 버팀인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자리를 차지할 것을 의미하는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구원은 이 세상의 모든 고통 등을 마무리하는 기쁨의 날입니다. 이기는 자에게 안전이 보장될 것을 삼중 서명으로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이고,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고, 그리스도의 새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하늘 나라의 백성과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의 이름은 새 예루살렘의 시민권을 회복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마지막 그리스도의 새 이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들만이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과 소망에서 우리는 하늘로서 온전하게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힘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마지막 13절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은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자들로부터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과 가르침대로 충실했습니다.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을 믿으며 생활했습니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사탄의 회당이 고묘한 수를 사용해도 교회는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사랑하시는 주님게서는 앞으로 닥쳐올 어려움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책망할 것이 없음에도 권면으로 칭찬하셨습니다. 이기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있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사탄의 회당이 괴롭히지만, 나중에는 그들이 오히려 절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하셨습니다. 적극적으로 핍박하는 자칭 유대인들이 나중에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를 알고 신자들 앞에서 절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빌라델비야 교회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연약하다 할지라도 주님을 믿으며 인내하는 성도에게는 주님께서 함께하시며 승리하도록 하십니다.

 

신실한 성도는 시험의 때를 무사히 통과하게 하심으로 교회를 보호하십니다. 주님의 날은 아무도 모르지만, 성도는 그날을 기대하며 기쁨으로 생활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주님께서는 참된 교회에 위로의 말씀을 통해 당신님의 약속이 무엇이 있는지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처럼 교회를 사랑하시고 계십니다. 이기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기둥이 되게 하십니다. 구원의 면류관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는 우리 소원에 부합하는 그런 교회입니다. 왜 빌라델비아 교회는 권면의 칭찬만 들었을까? 빌라델비아 교회는 어떠했기에 격려의 말씀과 약속들로 가득 찬 편지를 받았을까? 지팡이 교회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목회자가 강설한 것을 생각하며 그리고 성경의 말씀을 읊조리며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을 위해 수고하며 눈물을 흘리며 지상명령을 감당하는 자들에게 구원의 면류관을 약속하셨습니다. 모든 교회가 주님의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인내의 말씀을 배우며 승리하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교회의 행위의 삶은 거룩한 열매를 맺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삶의 생활도 충실했습니다. 교회가 구원을 받음에서는 어떤 행위를 근거로 내세울 수 없습니다. 구원을 누리는 데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열매가 성도에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으며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이기는 자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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