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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계3:14-22
강설날짜 2020-09-20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HOa2vfJHOeY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말씀(계3:14-22)

 

 

코로나 19는 한국 교회의 현실을 잘 드러나도록 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한국에 들어왔을 때 어려움 속에 교회는 성장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술과 담배를 하지 않고 새로운 사람처럼 된다고 사람이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처음에 들어왔을 때 오늘날처럼 좋은 예배당이 아니라 천막에 모여서 예배를 해도 사람들은 열심히 모였습니다. 제가 유아 시절에 찍은 사진을 보면 판자로 만든 예배당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아마도 이런 예배당은 없을 것입니다. 그때만 해도 교회에서 전도하면 사람들이 믿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교회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한국 사회에서 호감을 잃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습니다. 각자 생각해 보십시오. 한국 교회가 언제부터 세상 사람으로부터 이상한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까? 세상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교회가 교회론을 가르치지 아니함으로 교회가 무엇을 하는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단지 예배와 기도만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이상한 가르침으로 인하여 교회는 기복신앙과 번영신앙으로 물들어 버렸습니다. 경제적인 성장과 함께 교회는 맘몬숭배로 물들어 버렸습니다. 또한, 교회는 세상의 기업과 같은 모습이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교회가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교회론부터 배우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래야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알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참다운 모습을 회복할 때 세상을 이끌고 인도할 수 있습니다. 더는 세상으로부터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그런다”라는 소리를 듣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니 그렇지”라는 말도 듣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서 세상 사람은 좋은 성인으로 생각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님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삶의 생활을 보고 그러는 것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삶도 좁은 길을 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 뜻대로 생활하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삶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를 지상명령으로 가르치는 효과가 있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나눔을 통해 이웃 사랑이 무엇인가를 드러내야 합니다. 코로나는 교회가 무엇인가를 알게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코로나는 누구나 힘들게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이웃 사랑을 드러내야 합니다. 교회가 코로나 극복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함으로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나도 그럴 것을 믿는 것입니다. 성도가 영원히 사는 것은 이 세상의 삶의 사명을 다한 후 죽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빈손으로 온 것처럼 죽을 때고 빈손으로 가는 것입니다. 빈손으로 가지만 주님께서 계신 낙원으로 가는 것입니다. 당연히 참되게 믿고 신앙 생활한 성도만 가는 낙원입니다. 그날은 우리가 그토록 기대하던 부활의 날입니다. 부활을 소망한다면 교회가 해야 할 일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지팡이 교회는 오후 모임에 교회론을 배우고 있습니다. 홈페이지에 올리고 있으니 읽으면서 자신의 현재 모습을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오늘은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말씀”을 강설로 듣겠습니다. 사데 교회와 같이 한국교회의 모습을 닮은 것 같은 라오디게아 교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좋은 것이 좋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미지근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라오디게아 교회에 마지막 편지를 보냈습니다. 다른 교회와 다르게 칭찬도 없이 책망만 있는 교회였습니다. 다른 교회보다 가장 심각한 책망을 듣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간절한 호소와 약속을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현실을 강설로 들음으로 교회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14절을 보십시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먼저 우리는 라오디게아 도시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사적인 배경을 알아야 그 교회의 상황을 좀 더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이름은 주전 3세기에 안티오쿠스 2세가 세운 성입니다. 안티오쿠스는 자신의 아내 이름을 사용하여 도시 이름으로 사용했습니다. 동쪽으로는 지대가 높은 골로새가 있었고, 북쪽으로는 석회 온전으로 유명한 히에라볼리가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관광지로 유명한 지역으로 빠묵깔레라는 이름으로 사용합니다. 라오디게아는 부유한 도시로 상업 중심지이며 의학과 섬유 산업의과 금융업이 번성하였습니다. 특히 에베소에서 동방으로 통하는 중요한 무역로의 요충지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자급자족이 되는 도시였습니다. 얼마나 부유했는가를 잘 나타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진으로 큰 피해가 있었을 때 로마가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거절했습니다. 거절한 이유는 부유한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도움도 없이 라오디게아는 자체적으로 도시를 재건하였습니다. 아무리 부유한 도시라도 물 사정은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히에라볼리로부터 수로를 이용해 공급받아야 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도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육적으로는 풍요로울 수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진정한 부와 소망의 근원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누가 설립한 것입니까? 그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골4장12절과 13절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13.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언하노라” 골로새서에 근거하면 에바브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편지를 쓴 것입니다. 골4:16절을 보시면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고 했습니다. 16절에 근거하면 바울이 편지를 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쉽게도 편지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편지가 있다면 라오디게아에 대한 것을 자세히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라오디게아에 대한 상황을 알았을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여섯 교회에 편지를 보낸 것처럼 라오디게아 교회에게도 편지를 쓰면서 당신님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라고 하셨습니다. 아멘은 문자적으로는 “아멘하는 자” 즉 “진실로 그렇습니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멘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칭호 즉 하나님께서 창조의 근본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리의 하나님”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해 당신님께서 확정자이며 최종 판결자라는 것입니다. 이 명칭이 예수님에게 사용된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 성취 자이시며 보증이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을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나님은 진리이며, 신실하시며, 언약을 지키시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충성되고 ㅊ참된 증인’이라고 하심으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경고하시는 메시지입니다. 교회는 진실해야 하는데 너희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진실로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하기 위해 어떠한 삶을 생활했습니까? 온전한 순종과 충성이었습니다. 모든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몸도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의 극치입니다. 계속해서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의 최고의 근원이 되심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창조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재창조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 수 없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만큰 알 수 있습니다. 거기까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나중에 구원받은 후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날을 소망하며 믿음 생활 잘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주님께서는 라이디게아 교회를 잘 아시기 때문에 곧바로 칭찬하지 않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15절을 보시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주님께서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가장 신랄하게 책망을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교회의 내적인 현실을 잘 알기에 라오디게아 교회의 행위를 안다고 하신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마음도 같이 아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미지근한 교회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미지근하다고 하는 말에 신자들은 자신의 현실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미지근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가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도시는 물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히에라볼리에서 수도를 놓아 물을 사용했습니다. 히에라볼리는 멀리서 보면 하얀 색깔로 보이는 석회수 온천입니다. 온천물은 뜨겁습니다. 하지만, 물이 히에라볼리에 도착했을 때는 미지근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의 자연적인 상태를 이용하여 교회의 전반적인 영적인 상태와 생활이 어떠한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풍요로운 생활을 했기 때문에 현실에 만족하며 신앙생활 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과 달라야 하는데 같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과 열정은 사라지고 미지근한 마음으로 신앙생활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뜨겁다는 것은 영적인 열정과 열심입니다. 차갑다는 것은 냉랭하여 복음에 대해 거부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둘 중의 하나가 아니라 미지근한 교회였습니다. 영적으로 교회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상태였습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믿습니다라고 하지만 실제의 신앙생활은 세상 사람과 같았습니다. 교회는 자신의 신분을 알고 말씀을 사모하며 좁은 길을 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좁은 길보다 넓은 길을 좋아했습니다. 회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한 교회였습니다. 현실에 만족하며 풍요로운 생활을 좋아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보아도 풍요로운 생활을 위해 기복신앙과 맘몬주의 그리고 번영신학 등에 물들어버린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런 현실인데도 신자들은 입술로는 주님을 믿습니다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칭찬하겠습니까? 책망하시겠습니까? 나 자신은 잘 알고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미지근한 상태였습니다. 그것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는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는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차라리 복음에 대해 냉정한 불신자처럼 되든지 그것이 싫다면 하나님을 믿으며 뜨거워지라고 하신 것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사도 바울이 하신 말씀이 떠 올라야 합니다. 고후12:10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약할 그때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하여졌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육체적으로 어려울 때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세 번이나 간절하게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온전하게 알 수 없지만, 바울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던 이유는 복음을 끝까지 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만 믿고 좁은 길을 갈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사도 바울과 같은 몸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소아시아 교회처럼 황제 숭배와 이단과 우상 숭배를 강요받지 않았습니다. 신앙생활 하기에 좋은 것 같지만, 오히려 미지근한 마음이 되도록 했습니다. 비슬리 머리라는 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정직한 무신론자가 자기 만족적인 종교적인 사람보다 주님을 받아들이기가 더 쉽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종교적인 사람은 그의 양심이 무디어져서 회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이르는 길은 바리새인보다 일반 평민들이 더 쉽다”고 했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오늘 말씀을 통해 나는 주님을 믿으며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16절에서도 책망하셨습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참으로 라오디게아 교회는 영적인 상태가 무기력하고 무익한 신자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역겨운 물을 뱉어내듯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교회를 토하여 내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내신 편지를 읽고 있는 신자들은 빨리 돌이켜야 했습니다. 경고의 메시지를 들어야 했습니다. 라오디게아 도시 사람들은 물에 대한 이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먼 지역으로부터 끌어온 온천수가 라오디게아에 도착하면 미지근한 물로 변합니다. 식수로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하여 물을 마시면 토하여 버렸습니다. 사람이 물을 마시기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는 미지근한 상태로 정체되어 있으면 안 됩니다. 물도 고여있으면 썩습니다. 교회도 미지근한 상태로 있으면 신앙은 죽습니다. 풍요로운 생활보다 어쩌면 풍요롭지 아니하더라도 주님을 믿는 것이 더 좋습니다.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신자들을 토하여 내시기 직전이지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책망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온화하고 사랑이 많은 분이십니다. 그렇다고 영원히 기회를 주시지는 않습니다. 미지근한 영적인 상태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토하여 내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태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책망하신 것입니다. 책망은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말하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어떠한 말을 했는가를 17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그들은 나는 부자라고 했습니다. 부자이기 때문에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가난한 교회가 아니라 부자교회였습니다. 너무 풍요로운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무지와 빈곤이라는 것과 결핍이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부자이기 때문에 이웃에게도 자랑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부자와 나사로가 떠 오릅니다. 부자는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현실에 만족하고자 하는 것은 더 이상의 발전도 원하지 않고 미래에 대한 비전도 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라오디게아 교회가 가지고 있던 미지근함이었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지 못하고 부자라고 한 것입니다. 현실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분들은 그들을 부려워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그것을 잘 드러내는 것이 부자와 나사로였습니다. 참된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부자는 낙원에 갈 수 없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자였습니다. 그들을 사랑하시기에 돌이킬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주님께서는 누구나 구원으로 인도하시고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메시지를 읊조리며 생각해야 합니다. 영적인 힘이 사라지면 자기 성찰이 없는 교회로 끝이 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빈곤을 생각하며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서머나 교회는 외적으로는 가난했지만, 영적으로는 부요했습니다. 그와 반대인 라오디게아 교회는 영적으로 풍요로운 신자가 될 수 있도록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중심을 보고 계십니다. 신실한 자들은 힘들더라도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의지할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잘 보여주었습니다. 작은 공동체라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의 모욕과 공격 속에서도 주님께서 약속하신 소망을 바라보며 신앙생활 했습니다.

 

 

빌라델비아와 반대로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의 모습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교회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을 듣는 신자들은 어떤 마음이 있었을까 하는 고민을 해 봅니다. 주님께서는 영적인 문제를 육적인 비유로 설명했기 때문에 교회는 자신의 모습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영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을 아는 성도와 무지하며 풍요로운 생활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 자들로 나누어졌을 것 같습니다. 내가 만약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영적인 것을 알지 못하고 미지근한 신앙인으로 머물고 있을 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말씀으로 무장을 하지 아니하면 해이해질 수 있습니다.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면서 생활할 수 있습니다. 현실 만족주의는 이처럼 위험한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정리하며 마무리하겠습니다. 다음 주에 마지막 부분을 생각하며 소아시아 교회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했습니다. 그들의 행위를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편지를 한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름뿐이고 자기 만족적인 교회의 전형인 사데 교회와 비슷하기도 합니다. 외적인 영향력이 없는 부요한 교회였습니다. 사데 교회는 그래도 신앙을 보존하고 있는 소수의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라오디게아 교회는 소수의 신앙인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책망만 길게 하신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물질적으로 풍성했기 때문에 영적인 신앙생활에 치명적인 영향을 받았습니다. 치명적인 영향을 받는 교회에 주님께서는 당신님이 누구신가를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변화지만 나는(예수님)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형편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신자들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우리들과 함께 하시기 위하여 두드리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앙을 절날하게 말씀하심으로 너희는 내가 사랑하는 백성이라는 것을 확인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교회는 자신의 결핍이 있으면 사실을 인정하고 문을 열어야 합니다. 마음의 문을 열 때 주님께서 함께하시며 동행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동행하는 신자들을 보호하여 주십니다. 내가 스스로 보호하는 것보다 주님께서 보호하시는 것이 안전합니다. 교회가 갖추어야 할 참된 부요함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교회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너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고 하시는 메시지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신자가 있다면 참으로 애처로울 뿐입니다. 주님을 믿지 않고 현실에 만족하며 나는 부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이기는 자에게 주셨던 말씀을 기억하며 참된 신앙의 길을 가기를 소망합니다. 다음 주 시간에는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책망하시는 말씀을 강설로 듣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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