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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5:3-4
강설날짜 2021-02-14

심령이 가난한 자 그리고 애통하는 자의 뜻을 아는가?(마5:3-4)

 

 

 

지팡이 교회는 장로교단입니다. 장로교라는 명칭은 성경에서 유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할 것 같습니다. 영어 성경책을 읽어보면 장로교라는 말이 없습니다.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어 성경책에는 장로교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어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히브리어 그리고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구약성경을 기록한 히브리어도 BC 150년 정도부터 헬라어로 번역하여 기록했습니다. 헬라어로 번역되면서 “구약에서는 100회, 신약에서는 60회”가 번역되었다고 합니다. 번역된 단어는 바로 “장로”입니다. 헬라어로는 “프레스비테리안”입니다. 그러면 장로라는 뜻을 아십니까? 나이가 많은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장로에 의해 다스려지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장로회 또는 “장로교회”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장로교회라는 것은 장로가 교회의 주인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장로교회란 성도가 즉 신자들이 선출한 장로들에 의해서 교회가 통치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신약 시대에만 교회가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스데반은 구약 시대에도 교회가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스데반은 행7장에서 모세 시대 즉 광야 생활 때부터 “광야 교회”라 말합니다. 구약 시대 광야 교회에서는 장로들에 의해서 통치되었다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출3:16절과 민11:16절입니다. 그 외에도 많은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하실 것 같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교회는 서로 다른 교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서로 같은 교회이며 하나입니다. 구약과 신약 교회는 장로에 의해서 통치됐습니다. 지팡이 교회의 장로교 정치의 원리는 멀리 모세 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도 장로에 의해 통치되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타락되면서 교회는 카톨릭이 생깁니다. 카톨릭은 하나의 공동체 즉 하나의 교회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교회가 가장 타락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종교 개혁가들을 세워 성경이 말하는 교회로 돌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16세기 유럽의 칼빈주의적 개혁파 가운데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가인 존 녹스 중심으로 형성된 개신교 교파가 만들어졌습니다. 존 녹스는 칼빈의 제자이기도 합니다. 존 녹스는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종교개혁 사상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정착된 교회가 바로 장로교입니다. 유럽 지역의 교회는 칼빈의 신학을 이어받아 “개혁교회”라 합니다. 그러면 장로교와 개혁교회는 다른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서로 하나의 뿌리를 둔 교회입니다. 교회는 늘 개혁해 나아가야 하는 교회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잘 유지할 수 있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적은 신자들의 공동체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위해 우리는 늘 성경의 말씀에 충실해야 합니다. 지난주 강설은 “산상수훈 도입 그것을 알고 싶다”였습니다. 산상수훈의 도입은 1절과 2절만이 아니라 12절까지라고 했습니다. 산상수훈의 첫 시작은 마5:1절에서 마8:1절에서 마무리되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을 전해야 했던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버나움에 정착하신 후 하나님 나라를 전하시면서 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자들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은혜를 알고자 사람들은 이방인 지역과 사마리아를 제외한 이스라엘 지역에서 모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될 이 하나님 나라가 축복의 나라일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사역이 무엇인가를 알려주시기 위해 산에 올라갔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백성의 성품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하고자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차분하게 3절을 이해함으로 산상수훈이 담고 있는 깊이를 알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시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이 짧은 구절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하면 복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이 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복이 있다는 것은 외부에서 누가 복스러운 운명을, 좋은 운수를 가져다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복이 있다는 말은 사람 자신이 행복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기든 가난한 사람은 외적인 조건으로 보면 행복할 이유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가난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헬라어로 가난은 “구걸하다”입니다. 남의 도움이 없이는 생활할 수가 없는 구걸하는 사람 즉 걸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난하다는 좀더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비참하게 된 사람”을 의미합니다. 모든 의욕과 기력을 상실한 사람이며, 낮아지고 비천하여져서 위축되고 웅크린 사람입니다. 마치 재산을 모두 탕진하여 구걸할 수밖에 없는 걸인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재산과 돈이 없어서 가난한 자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심령’이라는 단어를 먼저 사용하셨습니다. 헬라어로 심령은 “영적인 면에 있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막연히 가난한 자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영적인 면에 있어서 가난한 자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5:3절은 영적으로 가난한 자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가난한 마음, 하나님을 향한 사모하는 마음,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마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백성의 성품과 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도움이 없이는 생활할 수 없는 백성입니다. 영적으로 가난으로 말미암아 비참한 자요. 영혼마저 절망과 기력을 상실한 자인데 주님께서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오늘날 신자들도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면 영적으로 가난하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신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의지합니다. 사람하는 성도님, 심령의 가난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입니까? 이것은 나와 다른 사람과의 돈과 지식의 비교에서 생기는 상대적인 가난이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은 오직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가난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 것은 나와 하나님과의 비교에서 생겨나는 절대 가난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신자들은 하나님의 영광, 거룩, 무한하심, 지존하심 등을 아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성도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지식으로만 아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당신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여 주심으로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서 괴롭고 슬프고 어렵고 고민스러운 세상과 행복이 없는 세상을 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항상 추구하며 복음을 증거 하고자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실천하고 있는 나를 보며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세상 속에서 고민하고 번뇌하는 모습을 보며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여 주실 것을 믿는 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구약성경에서도 가난한 자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사랑에 대하여 증거되어 왔습니다. 육체적으로는 가난한 분들을 위해 “추수할 때 떨어진 이삭을 거두지 말고 남겨두어 가난한 자가 먹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의와 공평으로 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는 대적에서 핍박받는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기억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육체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만 기억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능멸하고 부인하는 악한 자들의 교만과 탐욕에 고통당하면서 오직 하나님께 신원하여 주심을 기대하고 호소하는 영적 가난에 대해서도 구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늘 마음이 요동하고 불안한 가운데 아무 희망이 없이 신앙생활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참 평안은 이 세상의 평안과 다른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성도는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행복이 존재합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이번에는 4절을 보셨으면 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개인적인 문제로 슬픔이나 억울함을 겪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죄와 무게와 영적 파산을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은 오직 탄식으로만 응답할 수 있습니다. 애통은 단순한 슬픔을 넘어선 것입니다. 애통은 창자를 끊는 듯한 아픔과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을 동반한 슬픔입니다. 신자들은 자신의 죄 많은 처지를 슬퍼하며 자신의 영적 가난 때문에 애통해하는 자가 위로받을 수 있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영적 가난을 슬퍼하며 목마르게 바라던 의로 채움 받은 이후에 겪게 되는 변화에 대하여 애통하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따르는 무리에게 전하시는 내용이라는 것은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는 천국 백성으로서 이 세상에서 삶으로 나타내야 하는 축복받은 성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이웃을 긍휼히 여기며 애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애통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이웃에게 애통하는 마음으로 긍휼을 베풀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긍휼한 마음으로 애통하며 베푸신다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것을 하나님께 대가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주시는 능력으로 살아가는 내가 스스로 그리스도를 위해 대가를 요구하는 행위의 삶이 아닙니다. 공덕을 쌓는 행위의 삶이 아닙니다.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공로 사상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의 긍휼을 베풀어 주신 것처럼 우리도 같아야 합니다. 애통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입니다.

 

 

세상 사람만을 애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생각하며 애통하는 마음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생활하면서도 자신의 영적 가난을 슬퍼하며 애통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애통하는 성도를 예수님께서는 복되다고 하십니다. 자신의 영적 가난을 슬퍼하며 통곡하는 자가 위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위로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신의 영적 가난으로 말미암는 고통을 슬퍼하며 통곡하는 자에게 위로가 주어지는 나라라는 말입니다. 세상에서는 위로를 바랄 수 없는 이런 자도 천국에서는 위로를 바랄 수 있고 또한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애통함은 어느 때 알 수 있는 것입니까? 애통함은 죄가 무엇인가를 알 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생기는 것이 바로 죄가 무엇인가?이기도 합니다. 애통함은 죄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 때 생겨납니다. 죄에 대한 바른 관점을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 죄의식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참으로 오묘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죄의식이란 세상의 법정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식은 예수 그리스도 아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나는 죄인이라는 것을 한탄하며 회심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자 애통하며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참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에게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우리의 삶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죄에 대한 애통함은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는 생겨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죄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해 무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도리를 가르치심으로 각자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 것은 예수님이 지시는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에게 주어진 각자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십자가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어느 누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질 수 있겠습니까? 갈보리의 십자가는 사람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 교회는 예수님의 공효를 입은 신자로서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갈 때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성령은 우리의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이것이 은혜중에 은혜요 오직 감사만 있는 영광이기도 합니다. 애통하는 성도는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지며 하나님 나라의 삶을 생활함으로 복음이 증거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하실 수 있습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라는 것은 반드시 공생과 희생이라든지 고통만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십자가라는 이미지를 생각하면 마치 골고다 언덕을 지나며 죽음의 길로 가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떠 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십자가를 생각할 때 고생과 희생 등이 떠 오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십자가가 고생 자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질 때 그래 너희도 죽도록 고생하며 희생하라고 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십자가를 지라고 할 때 고생하면 하나님 나라를 주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믿을 때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십자가를 질 때 고생하면 믿음이 위대해지고 마치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돈과 권력 등으로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없는 말들에 속아서는 안됩니다. 성경을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자들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해 거룩한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지팡이 교회가 하나님 말씀을 따를 때 제자가 되는 것이고,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길은 우리의 삶의 열매입니다. 그럴 때 세상 사람도 우리를 보고 그리스도인 또는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을 알고 믿음을 소유하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가기 위해 즉 보상을 받기 위해 신앙 생활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미 천국이 주어진 성도입니다. 성도는 세상 사람과 구별되어 주님을 믿는 교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그럴 때 주어지는 것이 위로입니다. 위로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우리는 유대인들의 풍습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유대인들은 남이 슬퍼하고 괴로워할 때 그 사람에게 위로를 한다고 자기는 좋은 데서 평안하게 살면서 남이 괴로워하고 어려워서 어쩔 줄 모르는 데에 가서 냉정하게 “아, 울지 말고 진지 많이 잡수시고 마음 평안히 잡수시오” 한다면 아무 위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위로가 되려면 나도 그 사람의 슬픔을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공감이 있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나도 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나도 그 사람과 함께 슬퍼하고 괴로워하며 애통하는 것입니다. 함께 슬퍼하는 애통할 때 그 사람과 나도 함께 위로를 받습니다. 이런 마음을 품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세상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세상의 그릇된 것과 잘못된 것 등으로 인해 압박을 받고 고통을 받고 그것 때문에 슬퍼할 때가 참 많습니다. 슬퍼하는 일들이 많으면 그리고 고통이 크면 탄식이 나오고 애통이 나오는 것입니다. 탄식하며 애통하는 성도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위로해 주십니다. 위로를 받는 성도는 기쁨으로 생활하며 주님의 나라를 전하고자 애쓰는 삶을 생활합니다. 그러면서 적극적인 삶을 생활하며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길을 향해 나가면서 탄식하며 생활하는 자들에게 복음이 심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는 성도입니다. 그와 반대로 세상의 삶을 좋아하는 자들은 애통하지 아니하며 자신의 힘을 가지고자 애쓰는 삶을 생활합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주어지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위해 슬퍼했습니다. 고린도 성도의 신앙생활에서 타락하고 뒤로 물러나서 거기에 어두운 것이 그냥 끼어 있다는 사실을 볼 때 답답하고 괴로워서 슬퍼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모르는 자들을 위해서 바울은 자신의 삶을 헌신했습니다. 여기서 헌신을 주님을 위한 모든 삶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힘든 삶 가운데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울며 씨를 뿌리는 교회는 기쁨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이런 교회야말로 심령이 가난한 것이고 애통하는 교회입니다. 그럴 때 천국이 우리에게 있는 복이고, 위로를 받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말씀하신 가르침을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우리에게 복되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백성이기에 복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주 반복되는 것이 복되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복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축복의 나라이기에 우리는 심령이 가난하며 애통하며 기뻐하는 삶을 생활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그리고 애통하는 자의 뜻을 아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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