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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6:16-18
강설날짜 2021-06-20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W_MGM8CtuQs

외식으로 금식하지 말라(마6:16-18)

 

저번 주 6월 14일은 지팡이 교회가 속한 합신 교단의 40주년 기념일이었습니다. 저는 이상규 교수님께서 합신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상규 교수님은 고신대학교에서 35년간 역사신학을 섬기시다가 은퇴하셨습니다. 지금은 백석대학교 석좌교수로 섬기고 있습니다. 이상규 교수님께서는 합신 교단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교회 전통 계승”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이런 말을 하셨을까?라는 고민을 해 보았습니다. 합신 교단은 중세 교회가 개혁을 한 것처럼, “바른 신학, 바른 생활, 바른 교회”를 위해 세워졌습니다. 이것은 결국 “교회 전통 계승”을 위한 길이었습니다. 바른 교회는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과연 교회입니까? 주님의 교회라면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과거보다 미래로 갈수록 복음을 전하기는 절대 쉽지 않습니다. 현시대는 신자들이 급감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급감하는 시대에 신자들은 노령화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권형록 목사님은 “큰 교회들도 앞으로 5년, 10년 후에 급감한 교인수로 재정과 조직과 주일학교 등에서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지금 주일학교를 운영하지 않는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사실 이것이 현실입니다.

 

교회가 바른길을 가지 않음으로 결국 교회는 급감하는 현실에 놓여있습니다. 합신 교단도 예외가 아닙니다. 신자들이 11%가 줄었습니다. 10대의 복음화율은 5% 미만이라고 합니다. 제가 모교에(고등학교) 강의하러 갔을 때 교회에 다니는 학생은 거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것이 현실이니 참으로 애처롭고 슬픕니다. 이런 시대에 이상규 교수님의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 정치에 대한 경각심을 통해 바른 교회의 이상을 보여주었다. 합신 교회는 한국교회에 건실한 많은 인재를 양성했다. 개혁주의 신학의 확산에 기여하였다.”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도 하였습니다. 합신 교단이 출발할 때 총신의 교수직을 버리고 신학교를 세웠습니다. 학생들은 학위를 포기하고 무인가 학교를 선택했습니다. 이것은 희생과 헌신이었습니다. 바른 교회를 세우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이런 정신을 이어받은 교회입니다. 바른 교회를 세우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가 쇠퇴하고 급감하는 시대에 우리는 지상명령을 감당하며 바른길로 가고자 힘써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존재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존재하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잘 드러냄으로 존재하는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람에게 보이려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교회이기를 소망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애쓰는 교회가 아니라 성경에 있는 말씀을 잘 따라가는 교회로 존재하며 지상명령을 감당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우리가 누구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믿음과 신뢰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하나님께서는 지상명령을 감당하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고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지만, 기도하도록 하는 이유는 일용할 양식이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고 있다는 것을 매일 알도록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생활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알도록 함으로 당신님의 뜻과 사랑을 늘 기억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통해 주기도문의 참뜻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번 주일에 주기도문의 마지막 말씀을 들으며 강설을 마무리했습니다. 제목을 기억하실 것을 믿습니다. 제목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그리고....”였습니다.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이유가 있습니다. 마귀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없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교회의 사명을 다하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마귀는 혼자 지옥에 있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사람들을 지옥으로 유혹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마귀의 시험과 유혹에 넘어가지 못하도록 합니다. 우리를 영원한 안식처로 구원하기 위해 주님께서는 주기도문을 통해 마귀로부터 이기도록 하셨습니다. 우리가 마귀를 이기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볼 때 교회는 마귀와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마귀로부터 승리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있다는 것을 알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 즉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생활할 것을 믿기에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삼위일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며 고백하는 교회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을 바르게 알고 있는 지팡이 교회는 “외식으로 금식하지 말라”를 강설로 듣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설하신 산상수훈은 긴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산상수훈의 연상 선에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마6:1-8절을 생각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하는 이유”로 구제에 관한 것과 “왜 은밀하게 기도하라고 하는가?”는 골방에서 은밀하게 기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후 주님께서는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산상수훈을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의 행복 추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나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금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금식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이야기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 오늘 본문 16절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금식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것을 매우 심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심각하게 문제를 제기했습니다.(마9:14-19, 막2:18-22, 눅5:33-39)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유대인들은 금식을 경건의 필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금식에 대해 바른 이해를 할 수 있도록 오늘 말씀을 통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6장 초반부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제와 기도에 대해 바르게 가르쳐 주셨던 것처럼 금식도 같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일용할 양식 즉 음식은 생명을 유지하고 건강한 생활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금식합니다. 금식한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입니다. 음식을 일시적으로 먹지 않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먹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으므로 금식은 일정한 기간 먹지 않으며 기도하며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금식은 이런 점이 있으나 세상 사람들의 금식은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중대한 일이나 어려움을 당할 때 식음을 전폐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금식은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유대인들은 금식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것입니까? 온전하게 알 수 없지만 구약 말씀에 나오는 금식에 관한 이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중에 에스더와 연결된 것 같습니다. 에스더는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도 왕에게 나아가 동족 유대인을 구원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에게 자기와 함께 사흘 동안 금식할 것을 부탁합니다. 에스더가 한 말은 “내가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며 죽는 것도 두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후대에 오면서 금식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전에는 금식이 없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레16:29절과 23:27-32절을 생각하면 속죄일에 금식했습니다. 속죄일에 금식하도록 하심으로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는 날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금식은 우리가 누구이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경건한 자들의 금식기도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내리시기로 작정하신 것을 내리지 않았습니다.(요3:5-10)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사울의 시체를 찾아온 후 장사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7일 동안 금식했습니다. 그들이 금식한 이유는 사울 왕이 암몬의 손에서 구하여 준 사건 때문이었습니다.(삼상11:1-11) 다니엘의 금식기도 즉 회개를 위한 기도도 있습니다. 다니엘이 이렇게 기도한 이유은 빼앗긴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며 기도하며 회개한 것입니다.(단10:1-21) 하나님 앞에서 더욱 겸비해지기 위해서(느9:1-22, 시35:13) 그리고 헤어날 수 없는 큰 번민이나 위기 또는 절망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행해졌습니다(삿20:26, 삼하1:12)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유대인들은 포괄적인 이유로 금식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금식은 매우 중요했는데 예수님께서는 금식할 때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방인과 같은 마음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금식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금식은 하나님과 나와의 신뢰요 간절한 마음을 아뢰는 것입니다. 금식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같은 마음으로 금식하며 이웃에게 내가 금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속죄일에 금식하도록 한 것은 단순히 염려와 불안과 두려움에서 슬퍼하는 것으로 멈추거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적극적으로 바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금식을 자주 하는 바리새인들은 정기적으로 일주일에 두 번 했습니다. 금식을 공개적으로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금식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매고픔을 느낍니다. 배고프면 자신이 금식하고 있다는 것을 이웃 사람들에게 과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이용해 자신들을 드러내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받기 위해 금식했습니다. 금식을 통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알아야 하는데 오히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더 중요시했습니다. 이것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금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금식은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영혼을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금식은 자신의 신분을 낮추어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금식에 대해 바른 이해를 하고 있지 않았던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멸망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에게 잘 보이는 금식함으로 물질과 명예는 행복하며 자기 상을 받을지언정 사망의 그늘에 있는 자였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과 같은 마음으로 금식하면 절대 안 됩니다. 그들과 같은 금식은 사망의 길 즉 지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길을 가고 싶습니까? 지팡이 교회는 절대 그 길을 선택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임마누엘로 함께하심으로 승리하는 좁은 길을 가기를 소망합니다.

 

외식하는 이방인처럼 기도하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17절에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기름을 바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기름 바름을 뜻하는 즐거움을 상징합니다. 금식을 보이기 위해 하지 말고 다른 날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금식을 즐거움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기름은 상징적인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진짜로 머리에 기름을 바르며 하라는 의미보다 즐거움으로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지 말고 깨끗한 얼굴로 금식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얼굴을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도 상징적 의미로 기쁨과 행복으로 금식하라는 것입니다. 금식할 때 문자적으로 이해하지 마십시오. 금식할 때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게 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금식할 때 몸을 단장하고 하라는 의미입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항해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금식을 금지하지 않으시며 금식을 통해 참된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기도 그리고 유대인들이 하는 금식에 관해 이야기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누구를 위해 하라고 하셨습니까? 18절을 보시면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금식은 하나님과 나와의 내밀한 관계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며 칭찬과 격려를 받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과 같은 마음이 아닙니다. 이방인과 같이 금식하며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의 금식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었습니다. 자신들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들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까?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의로움을 듣고자 했던 자들은 호들갑스럽게 금식했지만, 성경을 알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만 보이려고 즐거운 마음으로 금식하는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금식은 자기를 부정하며 영적인 교제를 위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신뢰의 교제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금식은 나의 의로움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를 부정하며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금식은 인간의 욕망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갖 세상 욕망과 혈기를 죽이고 더욱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위해 금식하며 간구하는 것입니다. 금식은 세상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통해 나의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믿으며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금식을 통해 지팡이 교회는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금식할 때 평상시보다 더 단정한 모습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금식하며 자신의 신분을 알며 죄악과 슬픔과 회개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에 금식할 때도 은혜를 주시며 주의 길을 가도록 하십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분명할 때 하나님께서는 지상명령을 감당하도록 하시며 영원한 안식처로 구원하십니다.

 

하나님과 바른 교제를 하는 교회인 성도는 결코 사람에게 보이려는 바리새인과 같은 마음으로 금식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처럼 잘못된 동기와 목적으로 금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믿는 지팡이 교회는 몸을 더 단정히 하며 사람들에게 금식하지 않는 듯하며 금식합니다. 타락한 세상 속에서 신앙 생활하는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금식처럼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며 멸망의 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금식하라고 하셨는가를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금식이 무엇인가를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오른 본문을 오해하여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을 기억하며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는 말씀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상징적 의미라는 것을 알며 바르게 금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만 ‘나의 마음을 아시지요’ 하며 간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금식은 하나님 앞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귀한 것이 있습니까? 바리새인들에게는 세상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있어야 바리새인들은 부를 추적하며 즐거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팡이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금식은 횟수가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며 모든 영광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금식할 수밖에 없는 피조물이지만 영원한 안식처인 그 나라에서는 더는 금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날을 소망하며 주의 길을 가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가 생활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예수께서는 금식하고 있는 자들에게 자신들이 금식 중에 있다는 표시조차 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의 칭찬을 얻으려는 욕심이 더 앞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금식의 근본적인 목표는 완전히 무용지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금식에 대해 바른 이해를 하며 하나님만 바라보며 간구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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