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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6:24-29
강설날짜 2021-07-04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7UV0VvB5kVg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는 의미를 위해 이야기하신 것들....(마6:24-29)

 

오늘날 일부 교회이기는 하지만 교회를 대물림 하는 목회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교회 대물림”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장로교 목사라면 알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도 베드로든 그 외의 사도이든 ‘대물림’, ‘계승’, ‘세습’을 했습니까? 그들에게는 복음이 중요했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사업체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세우신 것을 잘 알기에 제자들은 사명을 감당하고자 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임을 감당하기 위해 교회를 세우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제자들은 교회를 오늘날과 같이 “대기업”처럼 만들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세상과 싸우며 인내했습니다. 인내는 교회를 세우도록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지팡이 교회도 주님의 제자들처럼 교회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성도이기를 소망합니다.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주님의 때를 기다리며 하늘에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때를 기다리며 교회를 세우기 위해 지상명령을 감당해야 합니다. 지상명령을 감당하기 위해 우리는 삶이 예배가 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마지막 시대일수록 마귀는 시험하고 유혹하며 지옥의 길로 인도하고자 합니다. 주님의 재림 때가 다가오면 올수록 산모의 진통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출산을 앞두고 진통을 하는 것은 아기가 출생할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재난의 시작이라는 것은 주의 재림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산모가 진통이 왔다고 해서 바로 지금 아기를 출산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더욱 진통을 심하다는 것입니다. 종말론의 시대에서 생활하는 우리는 출산을 앞둔 산모처럼 진통을 당하지만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주님이 있습니다. 코로나 19로 어려운 시대에 지팡이 교회는 주님의 제자들처럼 인내하며 주님의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죽음과 부활로 승리하셨습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하나님께 “모든 순종”을 하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의 삶은 오직 우리를 위한 삶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보물을 쌓아 두고자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보물을 쌓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에 보물을 쌓지 않으시며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지난주 말씀을 통해 사람이 평생 살아가는 것을 보물 쌓기에 비유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람은 보물이 있어야 삶이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법을 어기며 자신들이 좋아하는 보물을 모아두고자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나눔의 생활을 하며 섬기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이 세상에 보물을 쌓으며 편안한 삶을 생활하고자 하십니까? 그와 반대로 하늘에 보화를 쌓으며 예수님처럼 섬기는 삶을 생활하고자 하십니까?

 

땅에 보물을 쌓고자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땅에 보물을 두고자 하는 사람들은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 한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삶에서 보물을 쌓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임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성도의 삶은 이 세상에서 목표와 목적이 분명합니다. 땅에 보물을 쌓고자 하지 않으며 안전한 하늘 나라에 보물을 쌓고자 하는 삶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으면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 당하지도 않습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은 성도는 불안해하지 않으며 오직 복음을 감당하고자 하는 지상명령의 삶의 생활을 합니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성도는 하늘에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에 마음이 있도록 오늘 말씀을 통해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는 의미를 위해 이야기하신 것들....”의 의미를 강설로 들으며 은혜의 기쁨을 누리도록 하겠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 24절에서 사람들이 신뢰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노예의 그림을 선택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의 삶의 목표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땅의 것을 좋아하면서 하늘의 것도 좋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섬긴다’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말로는 섬김에 대한 여려가지 해석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원어로 보면 이렇습니다. 헬라어로 “툴레오”라는 말은 피고용인이 아닌 노예의 일을 의미합니다. 노예는 한 주인의 독점적 재산이므로 주인만 섬겨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라고 이야기하는 지팡이 교회는 당연히 주님께 순종하며 섬겨야 하는 종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오직 주님의 길을 따라가며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6:16절에서 우리가 죄의 종이 되어 사망에 이르든지 또는 순종의 종이 되어 의에 이르든지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하실 것 같습니다. 보물, 돈 등은 모두 악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재산 즉 보물과 돈 등을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그것들을 모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으며 추구하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을 가지고 이웃을 위해 섬김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정당하게 모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사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25절에서 “그러므로”로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는 “이로써”라는 말과 같은 것으로 보물과 돈 등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25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고 하셨습니다. 죄로 타락한 사람은 누구나 염려와 걱정거리가 있습니다. 생계의 문제는 늘 우리를 불안하게 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하는데 어떠합니까? 우리는 세상에 대해 걱정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하지 말며 하나님만 믿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세상 재미도 보고 하나님의 은혜도 누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님께서는 그것을 알기에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삶을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에 소망을 두라고 하는데 이 세상의 것을 추구하지 않고 생활하는 삶은 무엇인가를 25절에서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다시 한번 25절을 읽어 보았으면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여기서 목숨이라는 단어를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말로는 목숨이라고 간략하게 번역을 했지만, “생명을 가진 영, 존재, 생명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 중에 오직 사람에게만 있는 독특한 생명을 가진 생명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창2:7)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고 하셨습니다. 생령이라는 것은 “살아 있는 영” 또는 “생명을 가진 영”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음식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음식을 위해 있는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위해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몸과 영혼을 주셨다면 당연히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생활하는데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통해 기도함으로 나의 신앙을 늘 점검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의 삶의 목표가 땅의 보물을 위한 것이기에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에 초점이 있다면,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목표는 하늘에 소망을 두며 염려를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만 믿고 따를 수 있도록 26절에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고 하셨습니다. 25절에서 말씀하신 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두 가지 예화 가운데 첫 번째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사랑을 나타내는 맥락 가운데 “하늘 아버지”라는 표현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기다리는 것을 옹호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얻기 위해 책임을 스스로 감당하면서 염려하는 것을 막으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공중의 새를 먹이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화로 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화로 들면서 세 개의 동사를 사용하셨습니다. “심다, 거두다, 모아들이다”입니다. 이것들은 사람이 물질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새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라는 메시지 속에는 심지도 거두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탈 없이 살아가는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주시기 때문에 새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사람은 하나님께서 생령을 주신 존재인데 너희를 먹여 살리지 않으시겠는가?입니다. 새가 존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새도 자신이 노력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까?입니다. 이렇게 오해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양식을 마련하여 주지 않으면 어디서 양식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노동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만물 중에 사람이 가장 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 받은 존재가 사람입니다. 사람이 죄로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셨습니다.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 지팡이 교회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된 귀한 존재입니다.

 

27절에서는 두 번째 예화를 들지 않으셨습니다. 일반적인 염려에 관한 광범위한 모습과 그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삶과 죽음에 관련되어 아무 힘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죽음 앞에 누구나 아무런 힘이 없이 이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이것이 죄로 타락한 결과입니다. 27절을 보시면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키”라는 것은 “목숨”을 의미합니다. 성경책을 보시면 각주에 설명해 놓았습니다. 헬라어로 “헬리키안”이라는 단어는 “키, 나이, 목숨” 등으로 사용되지만, 문맥을 고려할 때 “목숨”이 가장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람이 아무리 좋은 것을 먹으며 과학적인 생명을 연장할지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염려한다 해도 생명은 끝이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섭리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무능력한 존재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무능할 뿐이요 결국 하나님께서 너희를 먹여 살리시는 것이라면 왜 이런 것들을 위하여 과도하게 염려하는가? 먹고 입는 일에 집착하고 매달리고 불안해하며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얽매이어 사는가?”라고 지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각하도록 하셨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후 28절에서는 두 번째 예화를 통해 25절에 대한 핵심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말 번역에는 백합화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이 꽃이 정확히 어떤 꽃인지 알려지지 않습니다. 하여튼, 매우 아름다운 꽃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사람은 음식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다음으로는 의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관심사는 이처럼 의복을 통해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들의 백합화를 통해 당신님의 섭리 가운데 자라는 꽃을 보라는 것입니다. 쓸모없이 보이는 꽃조차 하나님께서 입히신다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꽃의 성장을 면밀하게 보라는 것입니다. 보잘것없는 존재의 꽃이라도 하나님께서 보살피십니다. 26절에서는 공중의 새를 통해 28절에서는 땅의 꽃을 이용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번의 예화는 우리에게 깊은 생각을 하도록 합니다. 그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29절에서 솔로몬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왜 솔로몬을 이야기하신 것입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엄청난 부와 영광을 이야기할 때 솔로몬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스라엘 왕 중에 가장 부유하고 화려한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부와 영광을 생각하면 솔로몬이라고 말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솔로몬의 부와 영광이 꽃 하나만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29절을 보시면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입니다. 독자들은 이 말씀을 읽으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찮은 꽃이 솔로몬 왕보다 귀하다고 하니 놀랐을 것입니다. 들의 백합화의 찬란한 아름다움은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없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입니다. 들의 백합화가 솔로몬의 누린 부와 영광보다 더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아무리 좋은 것으로 옷을 입어도 백합화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치장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꽃의 아름다움을 우리의 옷에 이야기하심으로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염려와 걱정거리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 고민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마도 먹고 입는 문제 아니겠습니까?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누구나 같은 문제로 고민할 것 같습니다. 부자는 부를 유지하며 신분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식이 있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가난을 지나치게 의식함으로 어떻게 하면 부자처럼 생활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고민에 빠지면 마귀는 그것을 이용하여 유혹하고 미혹하여 넘어지도록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고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은 이상적인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죄로 타락한 사람의 삶은 걱정거리가 늘 있습니다. 그런데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이상적인 세계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염려하지 아니하며 생활할 수 있습니까? 걱정한다고 고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나의 마음이 슬픔에서 기쁨으로 변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들의 백합화와 공중의 새를 돌보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인 교회를 돌보지 아니하겠습니까?

 

근심과 고난 등이 우리의 사방에서 우리를 위협하는 것을 막을 수 없지만, 우리는 그런 것들에 포로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기에 하나님께 맡기어야 합니다. 신앙인은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를 받은 사람은 그 어떤 만물보다 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영과보다 더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솔로몬이 누렸던 부와 영광을 부러워합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는 진실하게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는 이방인들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지상명령을 감당하기 위해 삶이 예배하는 생활입니다. 비록 좌로 인해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얻어야 하는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통해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십니다. 단지 우리는 믿고 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 주 강설을 통해 듣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의 생활은 이 세상에 보물을 쌓아 두고자 하면 안 됩니다. 하늘에 쌓아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늘 기억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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