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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8:1-4
강설날짜 2021-08-15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마8:1-4)

 

개신교는 구원의 종교입니다. 개신교라고 표현한 이유가 있습니다. 기독교 안에는 이단들도 함께 있어서 개신교로 표현했습니다. 개신교는 프로테스탄티즘이라고 부릅니다. 개신교는 16세기 유럽에서 종교개혁으로 인해 생겨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카톨릭이 가장 부패했을 때 성경의 말씀대로 회복하기 위해 일어난 개혁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새로운 종교가 탄생한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로 회복하기 위해 일어난 개혁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기 위한 정신이었습니다. 성경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삼위일체를 고백하는 것이며 구원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개신교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신 일을 전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1:21절에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19:10절에서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구원받은 성도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지상명령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고후5:18-19절을 보시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말씀은 복음이기 때문에 “화목하게 하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가지고 화목하게 하는 직분으로 교회를 섬기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해야 할 사명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인격과 성품으로 각자 생활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우리는 하나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섬기어 주셨습니다. 화목제물이 되어 주심으로 우리를 주님의 몸이신 교회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화목이라는 의미는 갈등을 겪고 있는 것을 하나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삶에서 갈등하지 않고 화목제물이 되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하나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니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며 썩지 아니할 생명의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지팡이 교회는 부르심을 받은 성도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지팡이 교회는 화목을 위해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지난주 강설을 다시 기억해 보며 오늘 강설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설하신 것 중에 가장 긴 것이 산상수훈입니다. 그만큼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나라를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을 들은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듣고 행하는 자가 진정한 제자라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이 없으니 너희는 나의 말을 듣고 삶으로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한계를 알고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심령이 가난해지며 의에 주리며 하나님만 바라보는 애통해하는 성도입니다. 많은 무리가 산상수훈의 말씀을 듣고 놀랐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자들은 선택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할 것인가? 아니면 반대의 삶을 살아갈 것인가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성도입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않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교회입니다. 그 반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둘의 공통점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자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아니하면 가라지와 같은 자들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주신 성경의 말씀을 듣고 순종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지상명령을 감당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본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우리는 오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를 통해 강설을 듣으며 순종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강설을 들은 자들은 산에서 내려 왔습니다. 1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산에서 내려 온 자들은 수많은 무리였습니다. 그들은 산상수훈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여기서 의문점은 진실하게 믿고 따랐는가에 대한 것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여튼,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 많은 무리가 따르는 가운데 누가 절하며 주여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고 했습니까? 2절을 보시면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입니다. 주여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고 한 사람은 “나병환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통해 예수님의 기적은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신적 권위가 있다는 것을 알리신 사건입니다. 신적인 기원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눈으로 확인하도록 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나병환자는 간절했습니다. 예수님께 절하며 자신을 고쳐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당시에 나병환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당한 자로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고칠 수 없는 병으로 생각하며 공포와 혐오의 대상으로 생각했습니다. 나병환자와 접촉하는 것은 누구나 부정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나병환자는 건강한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있어야 했습니다. 건강한 사람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소리치며 오지 말라고 경고를 해야 하는 환자였습니다. 이런 나병환자는 어쩌면 목숨을 걸고 예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찾아와 주여라고 했습니다. 부정한 자가 건강한 사람에게 찾아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신의 병을 고쳐주실 것을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이 사건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산상순훈의 강설을 하신 후 나병환자를 고치신 사건은 매우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막1:40절은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간구했습니다. 눅5:12절에서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나병환자는 절실했습니다. 절박한 가운데 믿음으로 찾아왔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는 분들은 나병환자처럼 절실하고 절박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2절을 다시 읽어 보아야 합니다.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나병환자는 절박한 가운데 자신의 처지를 막무가내로 아뢰지 아니했습니다. 저같으면 당장 낫게 해 달라고 옷자락이라도 잡았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병환자는 억지를 쓰지는 않았습니다. 차분하게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고 했습니다. 공손한 마음으로 우회적으로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적인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며 간구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사용된 주여는 단지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아니라 신적인 존재를 암시하는 메시야적 호징을 사용했습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병을 고쳐주실 것을 믿음으로 순종하며 주여라고 한 것입니다. 단지 관건은 주님께서 나병환자의 병을 고쳐주실 것인지 그렇지 아니하실 것인지에 있습니다.

 

나병환자는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구원하여 주신 것을 믿으며 주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얼마든지 고칠 능력과 권세가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한 것이 주여입니다. 나병환자는 공경과 겸손으로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는 말을 간곡하게 했습니다. 복음서를 종합해 볼 때 나병환자는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고할 때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가족과 이웃에게서 멀리 떨어져 홀로 생활해야 하는 나병환자였습니다. 홀로 생활해야 한다는 것은 홀로 생을 마무리해야 하는 삶이었습니다. 참으로 불쌍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하는 말에는 삶의 회복이며 복음이 심어지도록 하는 믿음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병환자는 목숨을 걸고 자신이 생활하던 지역을 떠나왔습니다. 자신의 지역을 떠났다는 것은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는 현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놀랐을 것입니다.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왔다는 자체가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은 예수님과 나병환자에게 모였습니다. 사람들은 나병환자처럼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메시야만이 죽음의 병에서 고쳐주실 것을 믿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은 예수님이 메시야인가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었을 것입니다.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3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었습니다. 나병환자를 손으로 만지셨습니다. 사람들은 화들짝 놀랐을 것입니다. 나병환자를 만지다는 것은 부정한 자로 취급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면서도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거리낌 없이 나병환자의 손을 만지시면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말로도 능히 병을 고칠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손을 대심으로 병자에 대한 친절한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친절한 사랑은 섬김이 무엇인가를 알리는 경종이 되었을 것입니다. 나병환자가 말한 대로 예수님께서는 손으로 만지시면 응답하셨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이 하실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예수님의 답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였습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의 믿음에 대한 것을 아시고 고치심으로 긍휼히 여겨 주셨습니다. 긍휼히 여기심으로 나병환자는 산상수훈의 마음으로 더 절실하게 알았을 것이라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고침으로 율법을 지배하셨습니다. 율법의 주인이 누구신가를 알리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율법의 주인이신 당신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나병환자를 손으로 만지면 부정해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구약에서 예외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사장을 병자를 고칠 때 접촉을 해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감당하시는 분이며 대제사장으로 오셨기 때문에 부정한 자에게 손을 대심으로 부정해진 것이 아니라 당신님의 권능을 행사하심으로 신적인 귄위가 있다는 증명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해하기 쉽습니다. 병을 고친 것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을 고치기 위해 이곳저곳 다니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진실한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병만 고칠 수 있다면에 초점이 있습니다. 나병환자를 보아도 우리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즉 믿음이 있었습니다. 병만 고치기를 원했다면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모습이라도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보십니다.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는 것보다 마음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외모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마음이라는 것을 우리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간절한 믿음으로 자신의 처지를 아는 나병환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며 홀로 생을 마감해야 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몸에 손을 댄다는 것은 가장 가깝고 친밀한 표현으로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사랑하셨습니다. 버림받은 자를 예수님께서는 말로 치유할 수 있었지만 많은 사람이 보고 있는 가운데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섬김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진정한 사랑이 담긴 손으로 치유하시면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심으로 사람들은 산상수훈의 가치를 더 깊이 알았을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가르침에는 여러 개가 있지만, 그중에 섬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의 정신이며 열 가지 언약 중에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대로 나병환자는 정결함을 받았습니다. 사람들도 그것을 알기에 트집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4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입니다.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고 하는 것은 율법의 정결 규례를 지키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병 나은 것에 대한 증거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제사장에게 보이게 하심으로 선지자들이 말한 대로 메시야가 왔다는 소식을 알리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제자들을 훈련하기 위해 치유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하실 수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이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들은 자이든 듣지 못한 자이든 기적을 행하신 분으로만 오해하는 것을 막고자 한 것입니다. 기적을 행하시는 분으로 오해하면 계속해서 찾아와 기적을 행하실 것을 외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나병환자처럼 믿음이 중요한데 사람은 믿음보다 자신의 외모가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외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세상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것입니다.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백성의 본분입니다.

 

오늘 말씀을 각자 정리해 보십시오. 저는 이렇게 하고자 합니다. 나병환자는 육체적으로만 고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흉악하고 무서운 죄로부터 정죄당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예수님의 신적인 권위로 치유 받음으로 믿음이 무엇인가를 증거 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본질을 우리는 산상수훈으로부터 알았던 것처럼 사람을 섬기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산상수훈으로부터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나병환자처럼 같은 믿음을 소유한 백성입니까? 아니면 어떠한 마음으로 신앙생활 합니까? 나병환자와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은 유대인들의 생각을 넘어선 것입니다. 나병환자와 접촉한다는 것은 부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만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믿음을 보시고 긍휼히 여겨 주셨습니다. 누구나 나병환자와 같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주님만이 나를 죄에서 깨끗이 해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병고침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인 죄부터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나병환자가 고침을 받은 것에만 관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나병환자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을 메시야로 영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관인 교회를 통해 오늘날도 복음이 심어지고 있습니다. 복음을 듣는 자들은 누구나 나병환자와 같은 마음으로 주를 믿어야 합니다. 그럴 때 놀라운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나병환자와 같은 마음이 있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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