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지팡이교회

오전예배강설

조회 수 259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10:16-23
강설날짜 2021-11-21

일꾼들은 미움을 받을 것이나....(마10:16-23절)

 

지팡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세상의 삶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으로 변화된 성도입니다. 과거는 사탄에 의해 지배를 받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생활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추수하는 일꾼의 삶을 생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성령께서 알게 하셨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믿음 안에서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회개한 신자들은 거룩한 공교회를 위해 사귐이 있는 교제를 하며 지상명령을 감당합니다. 지상명령을 감당한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아마도 알 것이라 믿습니다. 그런데도 성도는 사귐이 있는 생활을 하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쁨이 무엇인가를 알기 때문에 지상명령을 감당합니다. 이와 반대로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웃보다 자신을 사랑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사망의 삶에서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누리는 생활을 합니다. 추수하는 일꾼으로서 사명을 감당하고자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은 우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웃보다 형제가 더 나를 미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형제도 예수님의 사랑을 알면 우리와 같은 삶을 생활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로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므로 영광을 누리는 삶을 생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음으로 “신비적 연합”을 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만 알고 기쁨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도 그리스도 안에서 “신비적 연합”을 함으로 구원의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비적 연합”을 누리는 지팡이 교회는 말씀의 강설을 들음으로 사귐이 있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먼저 지난주 강설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맺은 언약을 위해 먼저 이스라엘에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약속이 이루어졌으니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셨습니다. 권능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은 파송을 받은 추수하는 일꾼입니다. 추수하는 일꾼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자의 마음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것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당신님을 믿으며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것은 어떠한 것입니까? 그것으로 유혹하면 넘어가기 쉬운 것들입니다. 그것은 금과 은입니다. 그 당시에 여행할 때 중요시 했던 것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를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일꾼에게는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먹을 것을 위해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이 제자들과 함께하심으로 일용할 양식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양식을 주시겠다는 것은 잃어버린 양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들을 수 있는 자를 찾음으로 먹을 것을 준비해 두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누가 믿는지 모르기 때문에 값없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 추수하는 일꾼입니다. 복음을 전하며 집에 들어갈 때 예수님께서는 “평안하기를 빌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은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심한 형벌을 받습니다. 이처럼 불신앙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지팡이 교회는 힘들더라도 복음을 전하는 자의 마음 자세가 필요합니다. 약할 때 강함 주시는 하나님께 추수하는 일꾼이 될 수 있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의 마음 자세는 예수님을 향한 마음이면서 이웃을 위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읽어보셔서 아시겠지만, 복음을 전하는 자의 마음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을 거부당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핍박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사탄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추수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추수해야 하는데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박해를 당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를 이리와 같은 자들에게 보내는 것 같습니다. 이리와 같은 험악한 세상에 우리를 보내심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추수해야 하는 세상이 열악하다 할지라도 지팡이 교회는 추수꾼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추수하는 일꾼들은 미움을 받을 것이지만 행복이 있습니다. 서로 상충하는 것 같습니다. 미움을 받는데 행복하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참되게 믿는 성도는 ‘그렇습니다’라고 동의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아는 것이 행복입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미움을 받더라도 행복한 마음으로 추수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도 우리들과 같은 사귐이 있는 공동체로서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 15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마음 자세는 양과 같습니다. 양과 같은 마음을 가진 추수하는 일꾼들을 보내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리가 양을 먹이로 생각하는 것처럼 전도자는 양과 같이 어려움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며 추수하고자 하는 성도는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는 것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추수해야 하는 성도의 길은 예사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굿 뉴스임에도 불구하고 죄로 인해 타락한 자들은 복음을 듣고도 영접하지 아니하며 이리와 같은 마음으로 공격한다는 메시지입니다. 이리와 같은 세상에 양과 같은 마음으로 나아가야 하는 교회는 사귐이 있는 공동체로서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을 소유한 성도의 본분입니다.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뱀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사용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라고 하십니다. 뱀은 지혜와 명철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것을 이용해 양과 같은 마음으로 추수할 때 성도는 뱀과 같은 지혜와 명철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에 속담으로 사용하던 이야기를 이용해 제자들에게 말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하십니다. 뱀과 비둘기는 서로 조화롭지 않은 것 같습니다. 비둘기는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추수하는 일꾼들에게 뱀의 좋은 이미지인 지혜와 비둘기의 순결함을 이용해 하나님 나라의 성도는 지혜로우며 순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혜와 순결은 이리와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하게 전할 수 있는 도구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지혜로우며 순결해야 하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입니다. 참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전도자는 자신과의 싸움도 쉽지 않다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추수하는 일꾼은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17절에서 박해에 대한 것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17절을 보시면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박해에 대한 경고 메시지를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사람들을 삼가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런데 삼가라고 하신 말씀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사람은 교회가 온 힘을 다해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이면서도 가장 조심해야 하는 대상이기도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교회는 이리와 같은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라는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뱀과 같이 지혜로워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는 거룩한 사귐의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순결해야 합니다. 실제로 17절은 사도행전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공회에 넘겨주었습니다. 그런 후 제자들은 회당에서 채찍질 당하였습니다. 공회는 이스라엘의 최고기관이었지만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을 예수님처럼 죽이고자 했습니다. 이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이리와 같은 “사람들을 삼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온전하게 전해야 하는 회당에서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을 채찍질하며 정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값없이 전하며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며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을 박해합니다. 이리와 같은 마음으로 정죄하며 채찍질합니다. 같은 민족으로부터 당하는 것도 힘든데 그들은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도록 합니다. 18절을 보시면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오히려 이런 일들은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함으로 복음은 온 누리에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복음을 먼저 유대인들이 받아들이고 전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들은 복음의 가치를 몰랐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이리와 같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추수하는 일꾼입니다.

 

이스라엘의 최고기관인 공회만 복음을 거절한 것이 아니라 총독과 임금도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제자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알지 못함으로 세상의 나라를 더 좋아했습니다. 제자들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예수님의 사랑을 알기에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전했습니다. 오히려 박해는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데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역 아니겠습니까? 박해를 받으면 사람은 도망쳐 숨어야 합니다. 하지만 추수하는 일꾼들은 순교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복음의 위대함과 진리를 전합니다. 왜 이렇게 해야 합니까? 사람의 생명 즉 몸과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알기에 자신을 희생하며 순교하더라도 하나님 나라를 전했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값없이 주님을 믿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박해를 받아야 하는 제자들의 현실을 알기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19절을 보시면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독려하십니다. 제자들은 학자나 정치가 등이 아니었습니다. 그리 좋은 신분과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힘을 믿지 아니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인도함을 믿으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제자들에게 “할 말”을 주셨습니다. 험악한 세상 중에 제자들을 홀로 두시지 아니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뱀과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결할 수 있도록 “임마누엘”로 함께 하셨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할 말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도록 하는 말씀입니다. 나를 점검할 수 있는 말씀이라 믿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감당하는 제자들에게 염려하지 말고 나와 같은 길을 걸음으로 구원의 기쁨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너희들과 함께하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이런 삶은 하나님 나라가 온 누리에 전해지도록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할 말”을 주시겠다는 것을 더 확증할 수 있도록 20절에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과 감정 등을 사용하여 입을 열도록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추수하는 일꾼들에게 함께 하시며 할 말을 하도록 하십니다.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함께하심으로 제자들은 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인 제자들과 함께하시며 힘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공회와 총독과 임금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두려워하지 않도록 믿음을 주십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담대함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 할 말을 하도록 하십니다. 성령은 예수님께서 고별 강설에서 말씀하신 대로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부터 마지막 때까지 함께 하시며 할 말을 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인 우리를 통해 복음을 전하도록 하십니다. 사귐이 있는 공동체인 우리는 감사함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세상의 학문과 지식 등을 의지하며 복음을 전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성령님께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며 삶이 예배가 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 공회와 총독과 임금들 즉 세상의 권세 자들로부터 박해만 받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들로부터 박해를 받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장 힘든 것은 가족으로부터 박해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21절에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이 즉 가족으로부터 박해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가족은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하지만 가족으로부터 더 깊은 상처와 고통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삼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까? 이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신13장6절에서 11절을 알아야 합니다. 모세의 율법에서 가족이 우상숭배 하면 돌로 쳐 죽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과 연결하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이 볼 때 우상숭배와 같습니다. 사도 바울도 같은 입장이었습니다. 나무에 달려 돌아간 예수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까? 하지만,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주님을 안후 새로운 삶을 생활했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변화되지 아니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는 제자들을 돌로 쳐 죽이고자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아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주신 계시인 성경을 바르게 알지 못함으로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의 참뜻을 아는 제자들은 세상의 권력자들로부터 그리고 가족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아도 신앙의 지조를 지키었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선배님과 같은 지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지조를 지키는 자들에게는 무엇이 있다고 하셨습니까? 22절을 보시면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이 있기에 지조를 지킬 수 있습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내가 구원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을 아는 우리는 인내로서 주의 길을 가야 하는 교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있기에 세상의 모든 사람으로부터 미움을 받지만 인내해야 합니다. 주님의 재림 때가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와있기 때문입니다. 고독한 길이라도 우리는 사귐의 공동체 생활을 하며 교제하는 성도입니다. 힘들 때 강함 주시는 주님만을 의지하기를 소망합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박해를 받더라도 인내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거절하는 동네가 있으면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23절을 보시면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박해를 당하면 받으라고 하시다가 지금은 동네로부터 박해를 당하면 피하라고 하십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박해를 두려워해서도 안 되지만 박해를 계속 받으며 그 동네에 있을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장소로 이동하여 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유대인 지역에서 박해를 받을 때 이방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기도 하셨습니다. 제자들도 훈련을 받는 중이기 때문에 옆 동네로 이동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교회를 세워야 하는 창립 구성원이기에 박해를 당할 때 피하라고 하신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각자 필요한 사명이 있습니다. 그리함으로 우리는 서로 섬기며 사귐의 공동체로서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때를 모르지만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일꾼들은 박해를 받으리라고 하시면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때 즉 재림의 날을 알 수 없지만, 사명을 감당하고 있을 때 오신다는 것입니다. 인자이신 예수님께서 마직 때에 재림의 주로 오실 때 심판의 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추수하는 일꾼들은 박해를 받더라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끝까지 인내하라는 메시지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추수하는 일꾼인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해야 합니다. 우리의 현실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지혜롭고 순결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전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라는 것입니다. 지혜와 순결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한쪽만 있으면 동전으로 사용할 수 없듯이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는 지혜와 순결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이리와 같이 악하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지혜와 순결이 있어야 합니다. 지혜와 순결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우리는 이리와 같은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리와 같은 세상이 우리를 박해하더라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십니다. 지팡이 교회는 주님을 의지하며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실망하며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통해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통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일꾼인 우리를 통해 사역하도록 하십니다. 우리가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연약하다는 것을 알기에 성령이 함께하도록 하십니다. 복음을 전할 때마다 “할 말”을 하도록 하십니다. 주님의 때를 기다리며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다 보면 주님께서 재림의 주로 오십니다. 그날을 알 수 없지만, 우리에게는 기쁨입니다. 그날의 환희를 알기에 박해를 받더라도 인내할 수 있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생명의 복음을 위탁받은 사명자입니다. 사명자는 추수하는 일꾼으로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해바라기와 같습니다. 지금은 전도할 때입니다. 추수해야 하는 때입니다. 농부가 열심히 일해 추수 때가 되었을 때 추수하지 아니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을 알고 있다면 힘을 내야 합니다. 이리와 같은 자들이 우리를 박해하더라도 오직 주님만 바라보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의 때를 기다리며 우리는 힘을 내야 합니다. 주님만 바라보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TAG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설교자 성경본문 강설날짜 조회 수
264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전은덕 마12:1-8 2022-02-20 426
263 예수님의 감사와 초청 전은덕 마11:25-30 2022-02-13 320
262 이 세대를 무엇에 비유할꼬 전은덕 마11:16-24 2022-02-06 376
261 성경이 말하는 성찬 전은덕 고전11:17-34 351
260 교회는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 전은덕 요4:1-26 332
259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 전은덕 마5:1-10 294
258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와 교회 전은덕 마1:1, 16:13-20 313
257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전은덕 마11:7-15 2021-12-19 494
256 예수님과 세례 요한 그리고 제자 전은덕 마11:1-6 2021-12-12 344
255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전은덕 마10:34-42절 2021-12-05 339
254 두려워해야 할 분을 두려워하라 전은덕 마10:24-33 2021-11-28 289
» 일꾼들은 미움을 받을 것이나... 전은덕 마10:16-23 2021-11-21 259
252 복음을 전하는 자의 마음 자세 전은덕 마10:9-15 2021-11-14 335
251 열두 제자를 부르사 전은덕 마10:1-8 2021-11-07 341
250 목자 없는 양을 위해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전은덕 마9:32-38 2021-10-31 337
249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전은덕 마9:27-31 2021-10-24 337
248 예수님께서 관리의 딸과 혈루증 여인을 고치심 전은덕 마9:18-26) 2021-10-17 346
247 금식 논쟁보다 신랑이 함께 있을 동안에 전은덕 마9:14-17 2021-10-10 401
246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 전은덕 마9:9-13 2021-10-03 336
245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전은덕 마9:1-8 2021-09-26 1101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17 Next
/ 17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