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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10:34-42절
강설날짜 2021-12-05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phWbeg8tVWI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4-42)

 

오늘은 합동대학교대학원 조직신학으로 섬기시는 이승구 교수님의 “종교개혁에 비추어 본 한국 교회 예배개혁의 과제” 중 일부를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땅의 예배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예배는 엄격히 말해서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존해 삼위일체 하나님께 하나님으로 바로 알고서 그 영혼을 숙여 경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개혁교회는 첫째, 다른 모든 바른 교회들과 함께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만 드려질 수 있는 예배는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그 영혼을 숙여 경배하는 것이므로 구속의 근거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삶과 십자가의 구속에 의존해서만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는데, 이는 오직 성령에 의존할 때만 가능한 일이라고 하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구속함을 입은 성도들이 그들의 구속의 근거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해서 성령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둘째, 참된 예배는 “진리 안에서” 드려져야 한다. 개혁파적 예배 이해는 바로 이점에 가장 큰 강조점을 둔 이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개혁파 선배들은 진리로 받아들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보증이 있는 예배의 요소들만 사용하고, 성경적 근거가 있는 말씀의 공인이 있어야만 한다는 원칙에 충실했다. 신학과 교리에서만 아니라 예배에서도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덧붙여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칼빈은 “나는 성경에서 도출된, 따라서 전적으로 신적인 하나님의 권위에 근거한 인간의 제도들만을 시인할 뿐이다”라고 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은 예배에 관한 문제를 양심의 자유 문제로 파악했다. 인간의 양심은 그 누구도 규제할 수 없고 오직 양심의 주님이신 하나님께서 내신 법에만 매일 수 있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지 않으신 것을 행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의 개혁파 선배들은 특히 신약에 나타나고 있는 규정과 모범을 따라서 그에 따라 예배하려고 했다. 과거 개혁파 교회와 장로교회의 예배 개혁은 예배가 ‘제사’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일로부터 시작됐다.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제사장임을 강조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사는 것이 거룩한 산제사를 드리는 것이며,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에 근거해서 주께 드릴 진정한 제사 행위라고 본 것이다. 그 외에도 있지만 여기서 멈추도록 하겠습니다. 홈페이지에 이승구 교수님의 글이 있으니 참고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제자들을 이리와 같은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제자들은 추수하는 일꾼으로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들만이 아니라 오늘날 교회도 같은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추수밭의 상황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사롭지 않은 세상에서 추수하는 일꾼은 “끝까지 인내”하라고 하셨습니다.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까지 일꾼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날까지 끝까지 인내하는 지팡이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일꾼은 미움과 핍박을 받을 것을 말씀하여 주신 예수님께서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어려움을 당할 때 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부심이 들어야 합니다. 반대로 세상과 타협하면 결국 최후의 심판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두려워해야 할 분을 두려워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우리는 주님의 제자로서 선생님이신 예수님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한없는 은혜 아니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종이 어떻게 주인보다 높을 수 있겠습니까? 인생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미움과 핍박 그리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당하신 길을 우리도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길은 쓸쓸하지 않습니다. 임마누엘이신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주인이신 예수님과 함께하는 길은 영광스러운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부정하는 자들은 “바알세불”이라고 했습니다. 귀신의 왕이라고 하며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이런 세상에 우리도 주님과 같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두려워해야 할 분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세상 사람을 구원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추수밭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에 이리와 같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창조부터 감추어진 비밀을 전하기는 절대 쉽지 않습니다. 죄로 인해 타락한 자들은 감추어진 비밀을 듣기는 더 쉽지 않습니다. 복음은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온누리에 복음이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고 예사롭지 않은 추수밭에서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교회입니다. 몸과 영혼을 능히 죽일 수 있는 하나님을 전해야 합니다. 이리와 같은 자들은 몸은 죽일 수 있을지언정 영혼은 죽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리와 같은 자들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생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험악한 세상에서 이리와 같은 자들에게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시인하며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마지막 날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나를 시인하여 주십니다. 미움과 핍박 그리고 끊임없이 닥치는 환난에서 주님은 동행하여 주시는 것만 아니라 최후의 심판대에서 나와 함께 하시며 시인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주님께서 시인하여 주시지만 반대로 이리와 같은 자들은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고 하십니다. 이처럼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니 ‘두려워해야 할 분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늘 주님을 시인하며 주의 길을 가기를 소망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필요한 은혜를 주실 것을 믿습니다. 추수밭은 정말로 예사롭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하여 주시지 아니하면 복음을 전하기는 절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세상에 예수님께서는 3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수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그리고 34절만 보면 우리를 당황하도록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 전체 문맥을 보면 이해할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34절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하는 메시야가 하시는 말씀이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말씀은 놀랍기도 합니다.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화평을 위한 것임을 성경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서로 상충하는 것 같습니다. 검을 생각하면 화평의 반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검의 또 다른 이미지는 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검을 이야기하신 이유는 이리와 같은 사람과 하나님의 백성을 분리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검을 주러 왔다고 하심으로 사탄과의 전쟁을 의미합니다. 사탄과 전쟁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34절에서 말씀하시는 ”화평“은 어떠한 뜻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일반적으로 화평은 사람이 가지는 내적인 평안을 의미합니다. 자신만의 내적인 화평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평화로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죄로 인해 사람들은 서로 화평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검을 주러 오심으로 사람들이 화평을 누리도록 하십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서로 상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평화의 왕 예수님께서 분열과 전쟁을 통해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는 것을 믿고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심으로 하나님과 신뢰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단, 진실하게 믿는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재림의 주로 오실 때까지 악한 자들은 복음을 거부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이 많아도 한 알의 밀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검을 주러 오심으로 결국 화평을 이루십니다. 온전한 화평히 이루어지는 그 날을 소망하며 주의 길을 가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성도는 가족으로부터 어떻게 된다고 하셨습니까? 35절과 36절을 보시면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입니다. 이 말씀은 어디선가 읽어본 것 같지 않습니까? 21절 보시면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말씀하여 주셨지만, 제자들에게 다시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다시 말씀하신 이유는 이웃으로부터 고난보다 가족으로부터의 고난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가족과 원수가 된다는 것은 가장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불화라고 하면 그리 좋은 이미지가 아닐 것입니다. 불화라는 것을 원어에 가깝게 번역하면 ”둘로 나누다“입니다. 마치 불과 물은 서로 반대 이미지처럼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둘로 나누겠다는 것입니다. 둘은 서로 연합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가족으로부터 심각한 갈등과 분열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힘들더라도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 힘을 쏟아야 합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주의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죄로 인해 타락한 자들은 마귀에게 속아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마귀는 하나님과 대적하기 위해 죄로 인해 타락한 자들에게 속삭입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이용해 세상을 더 좋아하도록 합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믿지 아니하도록 하며 세상을 좋아하도록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 가족의 관계에서도 서로 나누어지고 갈등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37절과 38절을 보시면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보다 가족을 더 사랑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족을 더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가족을 위해 예수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태가 일어나더라도 예수님을 부인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몸과 영혼의 부활이 있습니다. 참된 진리를 믿고 힘들더라도 끝까지 인내하기를 소망합니다. 참된 제자는 늘 우선순위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명심하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지 않는 것도 당신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체가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십자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배하는 삶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는 삶은 십자가의 삶입니다.

 

그런데 위의 말씀을 오해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가족을 등한시하며 나만 잘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리새인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부모를 공경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뜻은 가족을 무조건 등한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보다 더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언약의 열 가지 말씀“ 즉 십계명에서도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가족과의 관계에서 지혜롭게 섬기며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쉬울 길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함께하시는 것을 믿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성도는 결국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그 날을 소망하며 십자가를 지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제자는 주님의 제자이기에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것이 제자의 본분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임명하신 후 파송하시면서 여러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는 마지막 부분으로 제자들을 영접하는 자가 받을 상을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40절을 보시면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영접하는 자가 당신님을 영접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섬기는 권위가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제자들을 섬기며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과 제자들과 동일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만 아니라 우리를 동일시하시므로 하나님 나라로 구원하십니다.

 

감추어진 비밀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예수 그리스도는 열두 사도를 통해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가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말씀을 받아 전하는 제자에게서 복음을 믿고 영접하면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41절을 보시면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생명의 은혜 즉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이 세상처럼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누구나 같은 신분으로서 삼위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의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으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자로 의인의 상을 받습니다. 의인의 상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의롭다 하시는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구원입니다. 선지자의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인 구원의 상을 받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영접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상입니다. 값없이 주어지는 구원의 상을 믿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선지자와 의인을 말씀하신 후 마지막으로 작은 자에 대해서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42절을 보시면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입니다. 여기서 ”작은 자“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제자를 의미합니다. 작은 자는 공동체 생활에서 가장 낮은 위치로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 자“를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작은 자로서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과 믿음을 소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순수함으로 인해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와 같이 순수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제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상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으로라도 섬기면 주님께서 상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중동 지역에서 냉수 한 그릇은 가장 기본적인 대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제자들을 대접해도 상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제자를 대접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한 자를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구원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주의 길을 가는 성도는 구원의 상을 받습니다. 성도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역사의 주관자요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복음의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세상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그냥 두지 않습니다. 세상을 두려워하도록 합니다. 복음이 전파되지 않도록 사도행전에서는 사람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몸과 영혼을 능히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복음을 영접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화평“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에 속해 있는 이리와 같은 자들과 전쟁을 하므로 알곡과 가라지를 나누심으로 당신님의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늘 주님을 시인해야 합니다. 가족이 주를 믿지 못하도록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결국,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보고 들은 것을 전해야 하는 일꾼입니다. 이처럼 추수밭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선지자와 작은 자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나의 목숨을 지키고자 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목숨을 지키고자 하는 자들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반대로 자신의 목숨을 잃는 자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며 구원받습니다. 제자들은 늘 최우선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최우선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구원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세상을 좋아한다면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하는 생활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 구원받는 생활을 하고자 하는 분들은 참되게 예수님을 믿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아니하는 것이 참되게 믿는 증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도록 당신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을 믿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을 영접해야 합니다. 제자를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겠다는 증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들의 헌신으로 인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진정한 행복을 누리며 흩어지는 교회와 모이는 교회로 예배하는 생활을 합니다. 사귐이 있는 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교제를 하며 사명을 감당합니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주님을 시인하며 더 사랑하고자 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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