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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1:1, 16:13-20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와 교회(마1:1, 16:13-20)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을 통해 풍성한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말씀을 들음으로 진리의 자유를 누리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세상의 삶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으로 변화된 성도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하여 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생활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추수하는 일꾼의 삶을 생활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회개한 신자들은 거룩한 공교회로 사귐이 있는 교제를 하며 지상명령을 감당합니다. 지상명령을 감당한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세상 즉 추수밭은 예사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성도는 사귐이 있는 생활을 하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기쁨이 무엇인가를 알기 때문에 지상명령을 감당하고자 합니다. 지상명령을 감당하고자 하는 교회 위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풍성한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를 우리는 온전하게 알 수 없지만, 성경을 통해 부분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쳐준 만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태는 자신이 기록한 마태복음에서 세리라고 했습니다.(마10:4) 마태는 세상의 부를 더 좋아하는 자였습니다. 하지만, 마태는 예수님을 만난 후 새로운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제자가 되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저자인 마태 자신이 세리라는 것을 이야기한 이유는 아마도 사도의 반열은 고사하고 감히 복음서 저자가 될 수 없다는 고백이 담기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마태는 새로운 삶을 생활하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가 되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를 따르라”는 말에 응답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믿는 우리는 마태와 같은 마음이 있는 교회입니다.

 

마태가 기록한 오늘 본문 1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입니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호칭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라는 이름과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복음서에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당신님께서 사람의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는 구약에서 왕과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에게 기름 부은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함께 쓰는 이유는 예수님이 왕과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의 사역을 담당하실 메시야라는 것을 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천사는 또 다른 이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천사는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했습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천사가 말한대로 예수님께서는 임마누엘로 시작하여 임마누엘로 마무리하셨습니다. 지상명령으로 잘 알고 있는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안에서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그것을 알 수 있도록 특별한 의미를 전달합니다. 그것은 세계라는 의미입니다. 세계라는 단어는 우리말로 여러 가지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족보, 계보, 대략 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마태는 단순히 혈통을 가리키는 족보의 의미보다 역사라는 뜻을 전달하기 위해 세계 그리고 계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역사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성경에서 역사적으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사용된 단어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범죄로 죽음과 저주의 역사가 시작될 때, 아벨의 죽음으로 경건한 혈통이 끊어졌으나 셋을 주심으로 경건한 혈통으로 이어갈 때, 홍수의 사건 후 새 인류의 역사를 시작할 때,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등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을 의미합니다. 특히 다윗과 아브라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함으로 하늘과 땅의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 사건을 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태는 그것을 첫 절부터 선언하는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요 구약에서 예언한 성취자이시며 당신님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분으로 묘사하기 위한 것입니다. 창세기가 세상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면 마태복음은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알리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작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교회는 이 세상에 있어야 합니까?’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있게 된 이유는 “하나님 나라 때문에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없다면 교회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있기에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기에 하나님 나라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것은 삼위 하나님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타락한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증거되도록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를 통해 복음을 증거 하도록 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게 나타내기 위한 공동체인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전하도록 하십니다.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누구입니까? 세상으로부터 구원받은 우리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건물로 생각합니다. 교회의 건물은 예배당이라고 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가 영과 진리로 예배하기 위해 모인 장소가 예배당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에 바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지 건물이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노회 전광규 목사님께서 번역하신 “우리가 교회다”를 보시면 교회에 대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이 세상 가운데 구원받은 백성이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해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으로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증거 하는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독특하게 하나님 나라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이 생긴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통치를 받는 백성입니다.

 

오늘 말씀 16장 13절을 보십시오. 대체로 16절에 더 관심이 많이 있지만 13절의 의미를 잘 알아야 16절의 의미를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13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질문하셨으면 그냥 답을 찾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도착할 때 질문을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님의 정체성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질문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빌립보는 전통적으로 바알신과 소위 목신으로 불리는 판과 로마 황제 가이사랴 숭배의 중심지입니다. 이곳은 원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헤롯 대왕에게 주었던 곳이지만, 나중에는 헤롯 대왕의 네 번 째 아들인 빌립의 영토가 되면서, 지중해 해안에 있는 가이사랴와 구분하기 위해서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여 ‘빌립보 가이사랴’라고 한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주 간단한 질문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분명한 신앙고백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대략 200키로미터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위해서 예루살렘 여행을 하시는 것입니다. 여행을 시작하시기 전 제자들의 공통된 신앙고백을 위해서 당신님이 누구신가를 알리시는 것입니다. 늘 예수님의 길은 의미심장한 의도와 목적으로 가시는 길입니다. 우리도 여행할 때 의도와 목적이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메시야라는 것을 표적으로 보여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21절에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아들을 보내신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당신님이 누구신가를 확인한 후입니다.

 

우리는 다시 13절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하시면서 예수님이 먼저 질문을 하십니다. 무엇을 질문하십니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입니다. 우리가 볼 때는 한 번 질문을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원문을 보시면 ‘제자들에게 계속 묻다’라는 동사를 사용하심으로 미완료형으로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반복해서 질문했다는 증거입니다. 제자들이 먼저 질문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먼저 적극적으로 당신님이 누구신가를 질문하셨습니다.

14절을 보시면 제자들도 적극적으로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답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셨고, 세례 요한과 같은 메시지를 전달한 것으로 생각하여 다시 살아난 세례 요한으로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메시야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와야 할 그 엘리야로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선지자 중의 하나로 생각하기도 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온전하게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안다고 하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것에는 둔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해 오시던 사역의 말씀과 근거 그리고 권위를 과거 선지자들이 했던 것과 같다고 생각을 하는 것은 둔감한 것입니다. 선지자들과 분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특히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바알세불이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참으로 비통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모르는 것은 성경을 모르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보는 것은 신성한 능력을 무시하는 것이고, 신적인 권위를 인정하지 아니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14절에서 제자들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답했습니다. 답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제자들에게 15절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믿음은 무엇이고, 너희가 나를 누구라고 생각을 하면서 믿고 따르고 있는지 아주 간략하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쉬운 질문이지만 이런 질문을 받으면 대체적으로 당황하고 황당한 마음이 들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공동생활하면서 훨씬 많은 말씀들과 이적들을 목격한 증인들이면서, 지금까지 이적과 기적을 단편적으로 경험한 사람들과는 달리 종합적으로 경험을 했지만 갑작스러운 질문은 어려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팡이 교회 성도님, 성도님께서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나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누구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우리의 생각과 제자들의 생각이 일치합니까? 아니면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어렵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하신 의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언제나 질문은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신성을 무시하고, 신적인 권위를 보지 아니하는 둔감한 시대에 예수님께서 당신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질문한 것입니다. 질문을 통해서 제자들이 신앙고백을 하도록 하시고 앞으로 예루살렘으로 갈 것을 예고하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하심으로 진행될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사도가 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통하여 당신님에 대한 분명한 생각과 태도를 확인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누구신가에 관심이 없는 가운데 예수님의 질문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시대에 신앙 생활하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질문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에 어떻게 답하고 싶습니까? 오늘 각자에게 질문하여 보시고 내가 가지고 있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서 반성도 하고 또 확인하심으로 잘 정리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질문의 시작을 보면 ‘너희’라는 복수를 사용하심으로 제자들 전체의 의견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담대하게 16절에서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제자들 전체를 향한 것으로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개인적인 고백이면서, 그와 동일한 믿음을 가진 다른 제자들을 대표하여 고백한 것입니다. 베드로 자신만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의 대표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좀 더 풀이해 보는 것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리스도의 뜻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어로는 메시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을 말합니다. 구약의 시대에 기름 부음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제사장, 선지자, 왕’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은 구약의 세 가지(제사장, 선지자, 왕) 모두를 포함합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심으로 예수님은 유일하시고, 선지자들이 약속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지금까지 기다리던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시고, 나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자들의 대표로 신앙고백 하는 베드로를 보면서 예수님께서는 온누리에 ‘메시야’이심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소망을 이루어 주실 분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면서, 모든 것의 완성자로 믿고 순종하십시오.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재림의 주로 오심으로 마귀의 세력을 다 멸하시고, 회복하여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리고 신앙고백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성육신하여 오심으로 우리의 죄를 구원하여 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베드로처럼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으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분명히 믿고 신앙 생활하는 성도입니다.

 

계속해서 17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하심으로 메시야로 고백한 것에 감격한 마음으로 그 어떤 상급을 약속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고백한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새로운 진리를 발견한 신앙고백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고백도 자신이 스스로 깨달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조명해 주신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경험과 배움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경험과 배움으로 안 것인가? 그의 생업은 어부였지만, 주님의 제자가 되어 많은 표적을 보면서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의문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경험과 배움을 통해서 기도도 했을 것입니다. 이런 경험과 배움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바른 신앙고백을 한 것입니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따르던 가룟 유다를 생각해 봅시다. 베드로와 함께 주님과 동행을 했습니다. 동행했다는 것은 베드로처럼 많은 경험과 배움 그리고 기도도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마지막 길은 어떠했습니까? 그리고 도마를 생각하여 보십시오. 요20:29절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는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하나님 나라를 알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그 해답을 16절에서 예수님께서 명확하게 하시고 있습니다.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누가 알도록 하십니까?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고백을 하면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우리가 베드로처럼 복된 것입니다.

 

바른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가 어떻게 복된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지 18절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그동안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은 베드로를 ‘바요나 시몬’으로 불렀고, 주님도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래서 17절에서 ‘바요나 시몬’으로 말씀하신 것이고, 여기서는 “베드로”라고 부르시면서 상징을 부여하십니다. 어떻게 상징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까? 베드로와 같은 뜻을 가진 “반석”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너는 베드로’라고 하신 후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시기 위해서 원어로는 ‘그리고’를 사용하십니다. 왜 ‘그리고’를 사용하신 것을 혹시 이해하셨습니까? 베드로와 반석을 동일시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아람어를 사용하여 베드로와 반석을 이야기하시기 위해 ‘게바’를 사용했다고 추측합니다. 이것을 마태는 아람어를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헬라어로 베드로(페트로스), 반석(페트라)을 적용하여 번역한 것으로 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18절을 읽어 볼 수 있습니다. “너는 반석이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를 당신님께서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차 이루실 신약의 교회와 베드로의 신앙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시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진행 될 것을 베드로의 이름으로 언어유희를 하시는 것입니다. 엡2:2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바울 사도가 에베소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교회가 어떻게 세워진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역사적인 신앙의 고백을 통해서 주님께서 세우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서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한 개인의 사도를 부각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시기 위한 강조입니다. 엡2:29절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베드로 한 개인의 사도 위에 교회를 세우시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신 주님께서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세워 가는 것이 교회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는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곳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를 마태는 처음으로 ‘에클레시아’를 사용했습니다. 왜 처음으로 사용했을까? 이 단어는 히브리어 ‘카알’을 번역한 것입니다. 뜻은 회중,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심으로 새로운 언약 공동체를 만드신 유대인만의 교회가 아니라 이방인들을 모두 포함한 온누리의 당신님의 백성의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신앙 고백한 것처럼 지팡이 교회도 견고한 신앙으로 고백하도록 하심으로 승리하게 하십니다. 그 공동체는 ‘음부의 권세’ 등 죽음의 권세, 죄의 저주와 세력이 넘볼 수 없도록 이미 신앙 고백한 성도는 영원한 생명의 축복을 받은 교회입니다.

 

이제 우리는 19절을 보았으면 합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교회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천국 열쇠’의 권위를 행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해하여 베드로 한 사도에게 천국을 자기 뜻대로 닫고 열 수 있는 권세를 준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시면서 제자들 모두에게 질문하고 답을 들으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동일한 고백인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와 같은 고백을 오늘날의 교회인 성도에게도 주어져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도록 성도에게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심으로 특별한 존재가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하늘의 열쇠로 참된 고백은 면류관을 받지만, 참된 고백이 아닌 것은 하늘의 문을 닫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에 주어진 ‘천국 열쇠’의 권세는 나에게도 적용이 되고,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듣고 영접하는 사람은 하늘 문이 열리지만, 그 반대는 닫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19절에서 ‘매다와 풀다’는 미완료시제를 사용하심으로 예수님께서 재림의 주로 다시 오시기까지 계속하여 진행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과 우리도 같은 말씀을 들으므로 같은 신앙의 고백을 함으로 천국 열쇠가 같은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이 예수님임을 고백하면서 신앙 생활하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 됩니다. 교회가 무엇인지, 교회의 주인은 누구시며, 교회를 세우는 분이 누구신지 바르게 알아서 바르게 충성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유대인 사회에 있어서 한 사람의 이름은 단순한 호칭의 의미 외에도 그 사람의 인품이나 특성 혹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첫 시작을 하므로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메시야로 기다리고 있던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는 새로운 시대의 세계와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함으로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야를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주인이시며 모든 구속 역사의 성취 자라는 것을 족보를 통해 기록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약을 성취하신 메시야입니다. 메시야를 믿는 우리는 참된 백성입니다. 이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 가운데 가장 거룩하고 무결점인 교회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로 말씀하여 주시기도 했습니다. 무결점 교회는 주님의 재림 때 이루어집니다. 그날을 소망하며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으로 믿음 생활해야 합니다. 그날을 소망하면서 지상명령을 감당하는 교회이기 때문에 종말론적인 공동체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종말론적 공동체이기 때문에 굳건한 신앙으로 오늘도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에서도 삶이 예배처럼 생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이기에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신앙고백 하며 영광을 올려드리는 삶을 생활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청지기입니다. 우리는 교회이기에 코로나 시대라 할지라도 서로 사랑하며 성도의 교제를 합니다.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복음의 증인자로 생활하는 지팡이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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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 열두 제자를 부르사 전은덕 마10:1-8 2021-11-07 341
250 목자 없는 양을 위해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전은덕 마9:32-38 2021-10-31 337
249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전은덕 마9:27-31 2021-10-24 337
248 예수님께서 관리의 딸과 혈루증 여인을 고치심 전은덕 마9:18-26) 2021-10-17 347
247 금식 논쟁보다 신랑이 함께 있을 동안에 전은덕 마9:14-17 2021-10-10 401
246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 전은덕 마9:9-13 2021-10-03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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