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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엡6:18-24
강설날짜 2022-08-07

에베소서를 마무리하는 바울....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에게도 자신들만의 세계관이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세계관 즉 기독교 세계관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믿는 교회의 세계관은 “영적 예배”입니다. “영적 예배”를 들어 받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12:1절에서 신자들에게 권면했습니다. 무엇이라고 권면했습니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구원받은 성도니 세상 사람들과 같은 생활을 하지 말고 “영적 예배”를 하라는 권면입니다. 우리말로 “영적 예배”로 번역했지만, 원문의 의미는 “영적 섬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육신으로 오신 이유를 마20: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입니다. 만유의 주시며 왕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구원하기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아니하며 대신 속죄 물로(대속물) 섬기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세계관으로 삶을 생활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삶으로 섬김이 무엇인지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아는 사도 바울은 그래서 우리에게 “영적 섬김”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으로 ‘예배하라’입니다. 예수님처럼 온전한 삶으로 예배하는 생활, 영적 섬김은 쉽지 않습니다. “희로애락”의 삶은 나를 힘들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세계관으로 생활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와 동행하여 주시기 때문에 “영적 섬김”으로 세상에서 생활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나의 마음에서 나오는 마음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있기에 우리는 말씀을 들으므로 쉼을 얻습니다. 오늘도 쉼을 얻기 위해 말씀을 사모하며 전신 갑주를 입고 기독교 세계관으로 세상에서 “영적 섬김”의 길을 가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그동안 에베소서를 강설해 왔습니다. 하지만, 제가 사고로 인해 손가락이 골절되어 원고를 쓸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많이 회복됨으로 다시 원고를 쓰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를 기록하며 하나님의 온전하신 계획과 목적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온전하신 계획과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하심입니다. 우리를 선택하시고 예정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성도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을 찬양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시며 만물이 통일되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하게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만의 섭리로 교회를 이끌어가십니다. 단지 우리는 가르쳐주신 만큼 알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영적 섬김”으로 삶 속에서 영광을 올려 드리는 생활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할 수 있도록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형상을 회복해 주심으로 하나님께 존귀한 생활을 하도록 오늘도 말씀을 통해 은혜 주실 것을 믿습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 성도에게 하는 마지막 인사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힌 자로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에베소 성도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형편을 있는 그대로 알리기 위해 두기고를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군사로 영적 전투를 하기 위해 전신 갑주를 입고 생활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부탁했으며 에베소 교회는 늘 기도해야 하는 성도입니다. 우리도 영적인 전투를 위해 사도 바울과 같은 정신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18절을 보시면 사도 바울은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다른 방향으로 기도할 수 있으니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나의 마음대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인 성도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라’입니다. 우리가 영적 전투의 생활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성령 안에서 기도로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심령이 가난한 성도로서 우리의 무력함과 절망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해 기도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 생활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유혹합니다. 군인에게 중요한 것은 정신력입니다. 군인이 전투할 정신력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군인에게 국민의 생명을 맡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도 군인과 같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전신 갑주를 입도록 하심으로 마귀와 전투할 힘을 주십니다. 기도는 성도에게 큰 무기입니다. 기도하는 성도는 말씀을 알기 때문에 마귀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에 마귀에게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기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에베소 성도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우리도 힘든 일이 있을 때 가장 친한 친구에게 자신의 마음을 알리며 함께 해 주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도 이런 마음인데 하물며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투옥되어 있기 때문에 에베소 성도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 교회에 기도 요청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인도해 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19절을 보시면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입니다. 에베소 교회에 기도 요청을 하는 이유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고난 중에도 “복음의 비밀”을 전하기 위한 마음입니다. 가장 큰 비밀은 복음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바르게 알도록 하는 비밀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맡은 사명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요청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보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직도 모르는 자들을 위한 마음입니다. 이처럼 기도는 담대한 마음을 가지도록 하는 힘이 있습니다. 감옥에 있다 할지라도 담대한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요청은 우리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듭니다. 사도 바울은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고 자 하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에 담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말씀”을 주시기 때문에 입을 열어 전해야 하는 사명자입니다. 그 일을 온전하게 할 수 있도록 기도 요청을 받은 에베소 교회는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특별한 임무를 받은 사명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사명자로서 세상에서 “영적 섬김”을 해야 하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입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기도를 요청하는 이유에 대해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입니다. 저라면 이렇게 기도 요청할 것 같습니다. 또한, 하나님께도 이렇게 기도할 것 같습니다. 복음의 비밀을 전해야 하니 감옥에서 꺼내 달라고 할 것 같습니다. 몸이 자유로워야 더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런 기도를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로마 감옥에 투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장소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복음은 장애물이 있다고 해도 우회하지 않습니다. 장애물이 고난과 매임이라 할지라도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담대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이 더 담대할 수 있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로마 감옥의 쇠사슬은 하나님만 더 간절히 바라보게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향한 기독교 세계관은 세상의 세계관과 분명히 다릅니다. 쇠사슬로 인해 몸이 자유롭지 않더라도 사도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의 복음이 더 중요했습니다. 쇠사슬은 더 담대함을 주는 힘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신비롭지 않습니까?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의 권면 말씀을 읽으며 마음이 뭉클했을 것이라 믿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는 어느 장소가 되었든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자입니다. 복음의 비밀을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장소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로마 감옥에 쇠사슬로 묶여 있어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복음의 비밀이 전해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이 흔들리지 아니하며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내가 사도 바울과 같은 현실에 있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겠습니까? 사도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마지막 인사를 하며 두기고를 소개합니다. 두기고는 사도 바울의 동역자로서 아시아 지방 출신으로 제3차 전도 여행 마지막 때에 수행했습니다. 두기고는 동역자로서 같은 마음으로 멍에를 메고 수고하며 동행하는 사역자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편지를 잘 전달할 수 있도록 두기고에게 부탁했습니다. 20절을 보시면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리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두기고를 사랑하는 형제요 일꾼이라고 합니다. 골4:7절에서도 두기고를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그는 사랑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라고 소개합니다. 바울에 대한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신분입니다. 거기다가 신실한 일꾼입니다. 이런 두기고를 에베소 교회에 보낸다는 것은 참된 일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과 엮인다는 것은 로마로부터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두기고는 두려움이 없이 담대함으로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편지를 에베소에 전달했습니다. 친밀한 교제를 하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일꾼을 에베소 교회에 보낸 것입니다. 우리도 두기고와 같은 사람입니까? 두기고와 같은 믿음이 나에게 있습니까?

두기고는 사도 바울의 모든 생활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두기고를 통해 바울이 어떤 형편에 있는지 더 잘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편지보다 더 강한 힘은 사람의 입을 통해 나오는 진실한 마음 아니겠습니까? 두기고를 통해 이야기를 듣는 에베소 교회는 마음이 뭉클해지며 더 간절한 마음으로 사도 바울을 위해 기도했을 것이라 믿습니다. 두기고는 사도 바울처럼 착하고 충성된 일꾼이었습니다. 이런 일꾼을 통해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가 자신의 사정을 잘 알기 원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편지와 더불어 두기고를 통해 자신이 맡은 사명이 중요하다는 것을 에베소 교회가 알기 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도 나와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며 참된 길로 가기를 바라는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두기고를 통해 사도 바울은 자신의 마음을 잘 알아달라고 하는 것으로 끝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두기고를 통해 에베소 교회를 위로하고자 합니다. 주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도 추스르기 어려운 가운데서도 에베소 교회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22절을 보시면 “우리 사정을 알리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그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입니다. 사도 바울이 어떤 형편에 있는지 아는 신자 중에는 연약한 마음으로 인해 실의에 빠져 신앙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로하고자 합니다. 환난은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더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합니다. 기도하도록 합니다. 서로 협력하여 이길 수 있도록 합니다. 군사는 혼자 싸울 때 보다 연합하여 전투에 임할 때 큰 힘을 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도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혼자 힘으로 싸우기보다 위로하며 영적 전투에서 섬김의 생활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기를 소망합니다.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그리스도인이 있을 때 더 힘이 되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옥중에 있더라고 에베소 교회에 힘이 되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어도 우리를 위한 마음이 있으니 더 큰 위로를 받지 않겠습니까?

복음만을 전하고자 하는 사도 바울의 글과 두기고를 통해 들은 이야기는 에베소 교회가 더 힘을 내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라 믿습니다. 위로를 받는 에베소 교회를 위해 사도 바울은 복의 기도로 인사하며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23절을 보시면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입니다. 사도 바울은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로 인해 성도는 누구나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을 받는 존재입니다. 이것을 에베소 성도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는 믿음과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도록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존재를 다시 회복하여 주심으로 우리에게 믿음과 사랑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승리로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회복하도록 하시며 “몸과 영혼”이 부활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니 교회는 부자와 가난한 자이든, 피부색이 달라도 하나의 성도로서 주의 길을 가며 믿음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주 안에서 하나의 교회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같은 마음의 기독교 세계관으로 세상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영적 섬김”의 생활을 하며 남은 자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을 올려 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을 소유할 수 있도록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도 믿음을 알기에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믿음과 사랑을 권면하며 에베소서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믿음 안에서 사랑하기 때문에 기도로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믿음과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한 마지막 글로 마무리합니다. 24절을 보시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입니다. 은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독생자 아들이신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보내어주시고 십자가를 통해 희생하도록 하심으로 구원하여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사람은 누구나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이야 말로 은혜중의 은혜입니다. 세상과 다른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믿음과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불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은혜 앞에 “변함없이”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썩지 아니할 영광을 위해 생활하는 성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는 진실한 사랑이요 불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로서 생활하며 “몸과 영혼”의 부활을 소망합니다.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준비를 하며 삶으로 영광을 올려드리는 “영적 섬김”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존재이기에 에베소 교회도 같은 마음으로 주의 길을 가기를 위해 기도록 마무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의 모습을 보았으면 합니다. 나는 사도 바울과 같은 마음입니까? 하나님의 향한 마음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교회가 하나됨을 위해 일한 사역자였습니다. 교회는 “창세 전에 하나님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선택과 예정이 있기에 교회는 하나 됨을 지켜야 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를 마무리하며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도 에베소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글을 마무리했습니다.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동역자인 두기고를 보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비밀을 알기에 에베소 교회를 믿음 안에서 사랑했습니다. 쇠사슬에 매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을 알기에 에베소 교회와 오늘날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비밀은 “몸과 영혼”을 부활하도록 하며 하나님 나라에서 극치의 생활을 하도록 합니다. 그러니 지팡이 교회는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는 권면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하나 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삶을 생활할 수 있습니다. 영광의 삶을 올려드리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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