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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엡3:1-13
강설날짜 2022-08-21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Y-DGZpWa9No

바울은 자신의 이야기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엡3:1-13) 

 

강설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이 있기에 강설할 수 있습니다. 강설을 통해 하나님을 전할 수 있습니다. 강설은 성경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 성경을 통해 제한된 것을 전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전해야 한다. 간략하게 예화 등을 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화도 성경 말씀과 관련된 것만 전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과 관련되어 있지 아니한 예화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예화 등을 많이 사용하다 보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을 바르게 전달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특별하게 주신 말씀이기에 목회자는 사명자요 일꾼이기에 하나님 말씀만 전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의 이야기와 비밀에 관한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보내며 자신의 이야기와 비밀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어떤 형편에 있는가를 알 수 있도록 1절에서 “갇힌 자”라고 합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은 “갇힌 자”라는 의미가 쉽게 다가왔을 것은 당연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지만,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사명자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감옥이라도 두렵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의미는 엡6:20절에서 더 의미심장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쇠사슬에 매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바울은 하나님이 있기에 두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세상의 어떠한 고난이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인내하며 주의 길을 가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처지를 통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육체적인 고난만 견디면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해야 하므로 영적인 고난도 함께 당해야 했습니다. 마귀는 육체적인 고난보다 영적인 고난이 더 사람에게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육체와 영적 고난을 동시에 당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지를 사용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안후 끊임없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던 중 이제는 로마 감옥에 투옥되어 있습니다. 잠깐이라도 복음을 전하는 것을 멈추면 감옥이 쉴만한 장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쉴만한 장소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1절을 보시면 아실 것이라 믿습니다. 그것은 “이방인을 위하여”입니다. 이방인을 위하여 지금 나는 감옥에서 “갇힌 자”로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비밀로 인해 사역을 멈출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힘들고 영적으로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기에 너희들도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과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라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보다 이웃을 위한 특히 이방인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왜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지 아십니까? 사도 바울은 2절과 7절과 8절에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게 주신, 나에게”입니다. 그러면 나에게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2절과 7절 8절에서 공통된 단어가 있습니다. 본문을 읽어서 아실 것이라 믿습니다. “은혜”입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선물입니다. 구원의 선물로 인해 자신에게 주어진 이방인을 위한 사도의 사역입니다. 이 사역의 길을 마귀라 할지라도 막을 수 없다는 바울의 믿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영적 섬김”의 생활 아니겠습니까?

 

복음은 스스로 알게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종교처럼 고행을 통해 해탈의 경지를 넘어설 때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셔야만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질 때 자신의 처지를 알고 비로소 회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2절에서 “은혜의 경륜”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은혜의 경륜을 알기에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신도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2절 첫 시작을 “너희를 위하여”라고 하셨습니다. 감옥에 쇠사슬로 갇힌 자로 있지만 “너희를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전해야 하는 것이 일꾼 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가 강력했으면 자신의 몸보다 이방인이 중요했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복음을 깨달았다는 것은 영광입니다. 영광의 극치는 주님의 재림 때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마라톤 경주자가 경주에서 승리했을 때 받는 면류관보다 더 극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계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3절에서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계시는 하나님께서 당신님이 누구신가를 알도록 하는 것이기에 구원의 은혜입니다. 계시가 있어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당연합니다. 5절을 보시면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라고 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통해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성경이 기록된 후에는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도록 하셨습니다. 감추어진 비밀을 이제는 이방인에게까지 알도록 하시는 사역을 성령께서 하심으로 사도 바울은 일꾼 된 사도로서 전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열심히 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6절입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한 사역입니다. 이방인이라도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이것을 위해 사도 바울은 쇠사슬로 갇힌 자로 감옥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귀도 복음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된 교회입니다.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 당신님의 교회를 전하도록 하시며 상속자로 택하심을 받은 성도는 마귀로부터 보호하십니다. 구원받을 백성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이며 주님을 믿는 성도입니다. 바울만 특별한 사역이 아니라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서 함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승천하실 때 지상명령을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부르심을 알기에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7절을 보시면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하나님이 능력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위해 일꾼이 되었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역을 감당함으로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가는 사역자였습니다. 교회는 누구나 사도 바울과 같은 정신으로 주의 길을 가야 하는 일꾼입니다. 이 일을 망각하면 교회가 쇠퇴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장로교회 출발점이라고 하는 스코틀랜드를 아십니까? 그 지역의 대표적인 사역자가 존 녹스였습니다. 위대한 사역자라고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역을 한 종교개혁가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흐르면서 스코틀랜드 지역의 일부 교회는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다섯 교회가 있는 지역에서 성도는 있지만, 목회자는 한 명도 없다고 하니 참으로 슬픈 현실입니다. 우리나라도 어쩌면 이와 같은 현실이 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모교단의 신학대학교 신학생 지원자가 다섯 명이라고 하니 스코틀랜드의 길을 따라가고 있는지 걱정이 됩니다. 한국 신학교의 대표적인 교단은 해마다 신학생 지원자가 많았지만, 교회의 타락(?)과 쇠퇴(?)로 말미암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는가 생각됩니다. 교회는 종교개혁가의 정신 즉 “성경으로 돌아가자”라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시대입니다. 오늘날만 그런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재림의 주로 오시는 날까지 늘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회는 복음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복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전해져야 합니다. 나의 능력대로 힘대로 재능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초청하여 쇼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모이는 교회로 예배당에서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역사하실 것을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해 진심 어린 글을 기록함으로 성도를 사랑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글을 나에게 적용하며 함께 듣기를 소망합니다. 9절을 보시면 사도 바울은 비밀에 대한 이해를 말씀하여 주시고 계십니다.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처지를 밝히고 있는 가운데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방인에게까지 하나님의 은총이 “비밀의 경륜”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경륜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사람의 눈으로 바다의 깊이를 측량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비밀도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주어지는 영광이며 누룩과 같이 퍼지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이 측량할 수 없는 부유함이 비밀의 경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비밀입니다. 비밀을 알 때 하나님의 경륜을 알 수 있으며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며 이 세상에서 마지막 때를 기다리며 “영적 섬김”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감추어졌던 비밀을 하나님께서 알게 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공개되는 놀라운 신비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주님의 교회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기에 하나님의 경륜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10절을 보시면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여기서 사도 바울은 “교회로 말미암아”을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의 신비를 교회를 통해 알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10절에서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영적인 실체를 드러내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기관이기 때문에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세우신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기관입니다. 이 기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비밀이 전해지도록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에게 “각종 지혜”를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각종 지혜”를 당신님께서 특별하게 주신 성경을 통해 알도록 하십니다. 성경은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도록 하는 지혜의 힘이 있습니다. 그렇기 떄문에 교회는 성경을 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11:29절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9:13절에서는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공통된 단어는 “배우라”입니다. 주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도록 하십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자 하십니까? 그럴 때 마음의 쉼을 얻을 수 있으며 죄인임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예배를 많이 한다고 해서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참되게 알 때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알기에 자신의 몸보다 이방인 사역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감옥에 쇠사슬로 매여 투옥되어 있어도 두려워하지 아니했습니다. 복음의 비밀을 위해 오히려 더 자신 있게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이라 할지라도 로마 시민권자로서 잠시 휴식을 하는 장소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쉼의 장소로 생각하며 하나님 나라의 경륜을 위해 전진하는 사도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알기에 쉼의 장소라고 생각하며 안식하면서도 글을 통해 교회를 위로하고 권면하며 세워가는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열심을 내야 했는가에 대한 해답을 우리는 11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드러나게 하신 하나님의 지혜가 영원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계획임을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신비의 작정은 특정한 시대에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어느 시대든지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속죄의 양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정”하신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없이 어느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 중의 사랑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신비의 비밀을 아는 교회는 12절 말씀처럼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를 아멘으로 믿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사랑하기에 감옥이라 할지라도 담대함으로 두려움이나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오히려 감옥는 신비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오히려 간수가 하나님을 믿도록 하는 장소였습니다. 로마 감옥 이전에 빌립보에서 바울은 구금되어 있을 때 빌립보의 간수가 구원받은 것을 알기에 그보다 더 두려운 로마 감옥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감사의 장소였습니다.(행16:22-32) 구원받을 사람에게 장소는 주의 복음을 전하는 흩어지는 교회로서 복음이 전해지는 힘이 있습니다. 빌립보 간수에 관한 이야기는 사도행전 강설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더 중요하니 “낙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13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입니다. 에베소 교회와 오늘날 교회는 사도 바울을 생각하며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왜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개혁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습니까? 오히려 교회가 세상에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과거 한국 교회는 삼각형 모양의 형태였다면 이제는 역삼각형입니다. 그만큼 자녀에게 복음이 증거되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참되게 배우지 못함으로 자녀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생각됩니다. 이런 시대에 에베소서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기관인 교회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신비 중의 신비인 하나님의 비밀을 알고 싶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두려움이나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감옥에 있다고 해서 사도 바울은 두려움이나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복음의 장소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 안에서 지어져 가는 성전임을 알기에 오히려 누룩과 같이 복음이 퍼지기를 소망하며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보냈을 것이라 믿습니다. 왜 이렇게 해야 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광” 때문입니다. 자신의 영광보다도 오히려 “너희의 영광”이라고 함으로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광의 구원은 이 세상에서 느낄 수 없는 극치의 영광이요 행복이며 구원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좋기에 사도 바울은 자신보다 복음이 더 중요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나의 환난에 대해 낙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 실망하고 낙심하며 다른 길을 갈 것을 알기에 그러지 말고 오직 “너희의 영광”만 생각하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있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사람을 보면 실망합니다. 오히려 원수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바라보는 성도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원수의 대상이 아니며 낙심의 대상도 아닌 사랑의 구원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되돌아보며 그리고 자서전적인 이야기를 통해 에베소 교회가 바른길을 가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비밀을 알았던 것처럼 에베소 교회가 하나님의 비밀을 알도록 하고 있습니다. 고난의 길이라도 영광의 날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고난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영광은 주님을 믿을 때부터 극치의 이르는 영광은 주님의 재림 때입니다. 그것을 위해 사도 바울은 경주자처럼 힘을 내어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알기에 마귀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마귀도 두려워하지 않는데 사도 바울에게 로마 감옥이 두려움이 대상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교회를 위해 글을 쓰는 공간이요 복음이 증거되는 장소였습니다. 어느 장소든지 교회는 흩어지는 성도로서 “영적 섬김”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이는 교회로서 예배당에서 삶의 모든 의미를 담아 “영과 진리”로 오직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증거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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