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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빌1:1-2
강설날짜 2022-09-04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Rxj6Z4b7a4o

빌립보서를 시작하며(빌1:1-2)

 

지팡이 교회는 그동안 에베소서를 강설로 들었습니다. 오늘부터는 빌립보서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서와 빌립보서는 서로 단짝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투옥된 가운데 쓰인 서신이라고 하여 옥중서신이라고 합니다. 옥중서신에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가 있습니다. 옥중서신은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는 가운데 기록된 서신서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으며 특히 교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빌레몬서는 윤리적인 면을 띠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마도 감옥에 있는 가운데 교회의 형편에 따라 기록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갈 수 있도록 기록했을 것이라 믿습니다. 빌립보서는 성도 즉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공교회로서 성도의 교제를 할 수 있도록 권면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빌립보서를 학자들은 “기쁨의 편지”로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자체가 기쁨 아니겠습니까? 특히 빌립보서에서 “기쁨”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쁨의 생활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기 때문에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도 바울은 “영적 섬김”의 생활을 하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그 자체의 삶이 기쁨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교제하기 원하며 주의 길을 잘 가라고 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은 제2차 전도 여행 때 세워진 교회이지만 건강한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강설로 들었기 때문에 기억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세워졌던 이유는 루디아 집에서 복음이 시작하기 시작하여 귀신들린 하녀를 고침으로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있을 때 감옥의 문이 열림으로 인해 간수와 그의 가족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교회는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기쁨으로 시작되었음에도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는 거룩한 공교회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편지로 빌립보 교회가 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환경을 이야기하며 기쁨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심으로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삶은 바울처럼 기쁨의 삶입니까?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를 공격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체가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기쁨”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지역은 오늘날 그리스 반도 북부에 위치한 장소로 불가리아와 북부 그리스 사이에 있습니다. 빌립보는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연결하는 첫 지역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로마는 빌립보 지역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빌립보 사람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값없이 주었습니다. 로마 시민권의 가치를 알고 있는 빌립보 사람들은 “이탈리아의 벗”이라고 불렀습니다. 로마와 같은 시민권자로서 누리는 특권은 개인의 자산과 인두세 그리고 토지세가 감면 받았으니 그들은 “이탈리아의 벗”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처럼 빌립보는 다른 지역보다 특별한 대우를 받은 지역입니다. 시민권을 주었다는 것을 볼 때 지역이 가지고 있는 가치가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라는 이름도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원래 지명은 “크레니데스”이었지만, 로마가 정복하며 빌립보라고 했습니다. 주전 365년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빌립2세가 “크레니데스”를 정복하며 자신의 이름을 이용해 빌립보 성이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지역이라 전쟁에서 공로를 세운 군인들을 빌립보 성에 정착하도록 했습니다. 빌립보 성은 유럽의 첫 성이며 해상으로의 왕래와 교역이 활발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매우 풍요로운 지역입니다. 해상으로 중요한 위치만 아니라 금광이 있었기 때문에 더 경제적으로 풍요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지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쉽겠습니까? 로마와 다른 방향으로 삶을 생활한다는 것은 신앙인으로 생활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빌립보는 혼합주의로 가득한 도시이며 우상숭배와 성적으로 문란했기 때문에 복음이 심어진다는 것을 절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지역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가 세워지도록 했으니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이 또한 사도 바울이 한 결과가 아니라 성령께서 하신 신비의 결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기 어려운 지역이라도 성령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 이방인에게도 교회가 세워지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회는 온전한 신앙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문제를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편지를 써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빌립보 교회가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잘 맞아 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을 “좋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거룩한 공교회의 방향으로 바르게 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합니다. 성도의 교제가 유익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좋지 못한 성격을 드러내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좋은 교제를 할 수 있도록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서로 “영적 섬김”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신분이 높든 낮든 예수 안에서 있으면 누구나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하나님의 형상에서 타락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자녀가 될 수 있겠습니까? 값없이 은혜를 받은 우리는 서로 섬기며 하나님 나라의 맛보기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거룩한 공교회입니다. 그러면서도 빌립보 교회가 보여준 사랑에 대한 글이기도 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감옥에 구금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헌상을 통해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것에 대한 사도 바울의 감사의 답장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현실을 보지 말고 주의 길을 잘 가라는 글이기도 합니다.

 

빌립보에 대한 서론을 이것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오늘 본문을 이야기하며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며 지팡이 교회는 “거룩한 공교회”를 위해 주의 길을 가며 “영적 섬김”의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 1절과 2절은 그 당시 헬라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편지의 서문입니다. 발신자와 수신자를 사용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도 같습니다. 자주 사용하는 편지의 서문을 이용해 사도 바울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함으로 신앙인의 길이 무엇인가를 알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생활한 신앙의 길이 무엇인지 알도록 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누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까? 하나님 아닙니까? 하나님 없이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기 때문에 교회는 이 세상에서 “아멘”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지팡이 교회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소망하는 우리는 먼저 1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문서에서 자신을 “사도”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빌립보 교회에 사도에 대한 것을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에 대한 것을 옹호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사도에 대한 것을 기록할 이유가 없는 바울은 놀랍게도 자신을 “종”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종”으로 소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종 즉 하인이라는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알기 때문입니다. 특히 헬라인에게 “종”이라는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미지보다 더 강력합니다. 종은 “노예”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사람들은 로마의 식민지가 아니라 “이탈리아의 벗”이라고 생각하며 로마 시민권자였습니다. 다른 지역은 로마 시민권자가 아니라 종과 같은 노예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빌립보 사람에게 그리고 빌립보 교회에게 사도 바울은 자신을 “종”이라고 했기 때문에 놀랐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빌립보서를 읽으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았을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문맥을 잘 읽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소리 내 읽지 않고 눈으로 보며 마음으로 읽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 기록 당시 사람들은 “읊조리며” 읽었습니다. 읊조리며 읽는다는 것은 소리 내 읽는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을 소리 내 읽으며 문맥을 따라 읽기 때문에 더 자세히 본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면 왜 사도 바울은 “종”이라고 빌립보 교회에 자신을 소개한 것입니까? 헬라인에게 종은 노예의 의미라면 유대인에게는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을 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유대인과 같은 종이라는 개념처럼 하나님만 섬기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마귀의 종노릇에서 이제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주의 길을 가는 성도입니다. 바울도 하나님의 종으로서 사명을 감당하는 사도였습니다. 교회인 성도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마귀입니까? 하나님입니까? 당연히 성도는 하나님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종인 사도 바울은 누구에게 글을 보냈습니까?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입니다. 성도는 원래 하나님의 선택과 연결된 단어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에 대한 칭호로 사용했습니다. 성도는 “분리하다”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분리하다라는 의미에서 자신들은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생각하며 성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의미는 신약시대에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들 즉 자신들에게 적용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성도라고 했습니다. 지팡이 교회도 세상과 구별된 종이며 성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값없이 회복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성도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성도 다음에 쓰인 단어는 감독들입니다. 여기서 감독들이란 오늘날 장로와 같은 단어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며 가르치는 자입니다. 장로에는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와 장로입니다. 하여튼, 감독들은 성도를 바르게 양육해야 하는 직분입니다. 그다음으로 집사는 공동체를 위하여 일하는 직분자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언급한 이유가 있습니다. 감독들과 집사들은 교회 일을 위해 선택된 일꾼으로 책임과 능력을 갖춘 성도입니다. 이렇게 언급함으로 바울은 그들의 권위를 세워 주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중요하기 때문에 교회는 직분 자를 세울 때 신중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의 직분과 달라서 교회는 참된 일꾼 즉 하나님의 종으로 섬길 수 있는 책임과 능력을 갖춘 감독과 집사를 세워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을 언급한 후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무엇이 있기를 기록했습니까? 2절을 보시면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언급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렇게 언급하는 이유는 빌립보 교회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모든 은혜는 삼위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언급하지 않고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소망한다고 하면 세상의 인사법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언급함으로 은혜와 평강이 빌립보 교회에 있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모두 악한 자들이라고 믿었던 바울은 이제 새로운 생명이 된 사도요 성도로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빌립보 교회에 있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다메섹에서 놀라운 체험을 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은혜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거저 주시는 구원의 선물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참된 은혜가 있어야 빌립보 교회는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은총이 없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행위 없이 주어지는 것이 은혜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은혜와 다른 것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아가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는 무엇이 있겠습니까? 당연히 평강입니다. 이또한 하나님에게서 오는 평강입니다. 유대인들은 살롬이라고 하며 인사했습니다. 이렇게 인사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도록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심으로 화목한 백성이 된 교회입니다. 은혜의 결과로 우리는 평강이 있는 성도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자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통해 은혜와 평강이 전해질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러니 교회는 삼위 하나님만 바라보며 주의 길을 가야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처럼 은혜와 평강이 있도록 하십니다. 은혜와 평강이 있는 교회는 삶이 우리를 속일지언정 하나님만 바라보는 해바라기와 같은 성도입니다.

 

오늘 우리는 빌립보서를 통해 간략하게 배경을 듣고 1절과 2절을 들었습니다. 빌립보 지역은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요충지였습니다. 그래서 로마 황제는 빌립보 지역을 점령한 후 퇴역한 로마 군인들이 정착하도록 했습니다. 식민지가 된 빌립보 사람들에게는 특권을 주었습니다. 토지세와 인두세 등을 낼 필요가 없는 특별한 것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로마 시민권입니다. 사도 바울의 아버지처럼 로마를 위한 일을 하지 않고도 조건 없이 주는 시민권입니다. 그래서 로마 시민권의 가치를 알고 있는 빌립보 사람들은 “이탈리아의 벗”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빌립보 사람이 값없이 로마 시민권자가 된 것처럼 교회도 같습니다. 우리의 행위와 말의 유창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죄로 죽어가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도록 하시며 몸과 영혼이 부활하도록 하십니다. 몸과 영혼의 부활 의미를 아는 우리는 “이탈리아의 벗”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특별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로 인해 교회는 평강을 누리는 거룩한 공교회이며 성도의 교제를 하는 하나님 나라의 기관입니다. 교회인 우리는 성화의 과정에 있습니다. 힘들더라도 신앙의 길을 가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시며 성전으로 지어져 갈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은혜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인도하시며 보호하여 주십니다.

 

이방인의 사도인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로 위로하며 아름다운 신앙은 사람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을 알도록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와 평강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동역자였기 때문에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편지를 보냈을 것은 당연합니다. 유럽 최초의 교회이기 때문에 더 간절한 마음이 있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누구인가를 알기 때문에 사도에 대한 의문도 없었습니다. 그만큼 서로 잘 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도라는 단어를 쓰지 아니하며 빌립보 교회가 주의 길을 바르게 가도록 힘을 쓰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투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빌립보 교회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의 가치를 아는 사도 바울도 빌립보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은혜와 평강을 누리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지팡이 교회도 이런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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