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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빌1:12-21
강설날짜 2022-09-25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주는 위로와 확신(빌1:12-21)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존재하기 때문에 거룩한 공교회로 존재하며 있습니다. 사람이 세운 교회가 아니기에 그 누구도 거룩한 공교회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라지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들이 교회 안에서 교회의 존재를 무너지도록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알곡을 보호하시며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무너지지 않도록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로서 지상명령을 감당하며 교회를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닥친 고난에서도 오히려 주님의 교회가 누룩처럼 퍼지도록 하는 것을 믿으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고난은 하나님께서 존재하시고 있는가? 왜 나에게만 고난이 있는가?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나를 정금과 같이 단련되게 함으로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를 더 알도록 하는 힘이 있습니다. 종교개혁가들은 고난이 힘들어도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리함으로 복음은 오늘날 우리에게 전달되도록 했습니다. 기독교 역사 안에서 교회를 볼 때 고난이 있을 때 교회는 타락되지 않고 오히려 바른길을 가도록 했습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지팡이 교회는 거룩한 공교회로 하나님 나라의 기관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믿으며 교제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강설을 듣기 전 지난 번의 강설을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편지를 쓰며 빌립보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교회를 위해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 했습니다. 한 번만 그런 것이 아니라 빌립보 교회가 세워진 때부터 늘 감사해 왔습니다. 하나님께 간구할 때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기관인 빌립보 교회를 위해 기쁨으로 간구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교회가 설립될 때부터 복음을 위해 참여하는 교회였습니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교제하며 하나님께 감사의 간구를 늘 했습니다. 사도 바울과 빌립보 교회는 끊을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구속되어 있어도 친밀한 교제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된 교제는 누구나 빌립보 교회처럼 복음에 참여하는 교회가 돼야 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복음에 참여하는 교회였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친밀한 교제를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복음에 참여하고 있는 빌립보 교회를 위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날 즉 재림의 날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고 진실”할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서로를 위해 간구해야 하는 성도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교회는 거룩한 공교회로 서로 교제하며 참여하고 있습니까? 이런 시대에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기도하며 빌립보 교회와 같은 삶이 돼야 합니다. 순종은 나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심령이 가난함으로 순종할 때 성령께서 인도하실 때입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십니다. 은혜에 참여하는 교회는 어려운 현실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하며 의의 열매를 맺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에 순종하며 죽음의 길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로 가며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면서도 빌립보 교회와 교제하며 그들을 위해 간구했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사도 바울이기에 빌립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지팡이 교회도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의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빌립보 교회와 친밀한 교제를 하고 있는 사도 바울은 자신에 대한 상황을 알 수 있도록 합니다. 로마 감옥에 있는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사실대로 보고하며 자신의 결심이 무엇인지 드러내며 교회에 위로와 확신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의 위로와 확신이 있으며 사도 바울과 같은 마음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있어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복음이 전파될 수 있다면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복음이 전파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라고 합니다. “형제들아”라고 하면서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쓴 글에서 전환하기 위해 “형제들아”라고 하며 자신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형제들아”라는 것은 서로 잘 알고 있다는 의미이며 서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형제요 교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 자신이 어떠한 환경에 있는가를 잘 알 수 있도록 글을 쓰고자 합니다. 내가 지금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되고 있다입니다. 이것을 빌립보 교회도 알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감옥에 있다고 해서 나의 삶이 패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글을 사도 바울이 쓰고 있는 것일까?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보고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성도를 위한 마음의 글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있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감사했습니다. 오히려 복음이 진전되며 전파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을 지키는 자들은 그냥 군인이 아니라 시위대였습니다. 그 당시 시위대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황제를 지키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고의 대우를 받고 있었습니다. 시위대는 황제를 보호하는 친위대입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황제를 선출할 때 투표할 수 있는 특권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위대는 황제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을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시위대에게 복음이 전파됨으로 그들을 통해 황제에게 복음이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라 믿습니다. 복음이 전파되지 못하도록 마귀는 사도 바울을 감옥에 가두고자 했지만, 오히려 복음은 로마를 결국 무너지도록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인해 결국 313년 로마는 기독교를 국가 종교로 공인합니다. 사도 바울의 매임은 복음이 전진하도록 하는 힘이 있습니다. 복음은 고난을 겪을 때 패배의식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간구하도록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누룩과 같이 복음이 퍼지도록 하십니다. 그러니 빌립보 교회는 패배의식을 넘어서 전진하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보고 알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이 진전되고 있다는 것을 12절에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입니다. 복음이 시위대 안에 증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사람”이라고 합니다. 로마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은 작은 사람이 아니라 누구나 아는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로마에 퍼지고 있었습니다. 시위대에 복음이 증거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황제를 만날 수 없는 기회도 없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중요하기 때문에 시위대가 친히 경호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 자신을 변증할 기회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복음의 증거입니다. 고난을 겪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도 바울은 복음이 증거될 수 있도록 죽음도 불사하며 로마 황제에게 상소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로마 사람들은 바울의 존재를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변증함으로 로마는 점점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확증되도록 했습니다. 작은 밀알이 심어짐으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복음은 로마의 길을 통해 온누리로 퍼졌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을 때 로마에서 신앙생활 하는 성도들에게 어떠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복음을 더 담대히 전하는 성도가 늘었습니다. 14절을 보시면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즉 사도 바울의 매임으로 인해 로마에서 신앙생활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담대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다는 소식은 오히려 그리스도인에게 담대함을 가지도록 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고난을 겪으면 나도 조심해야지 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나 로마 성도는 사도 바울처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빌립보 교회도 알기를 소망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겪는 고난을 보고 실의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복음은 증거되고 있습니다. 로마 성도는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니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고난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희망입니다. 그러니 고난 중에 있더라도 주님만 바라보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있는 성도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5절을 보시면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입니다. 로마에서 신앙생활 하는 성도는 두 부류로 복음을 증거 하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투기와 분쟁”이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오늘날 우리는 온전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학자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에 대한 것을 잘 모르지만, 바울은 그런데도 그리스도는 전파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바울의 관계와 틀어진 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에 대한 악한 마음으로 분쟁과 투기를 하지만 복음을 전할 때는 그래도 그리스도를 전했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로마는 기독교를 하나의 무속신앙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로마는 기독교에 대해 부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황제가 신인데 어떻게 예수가 구원자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참되게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착한 마음과 뜻으로 전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전하지 않았습니다. 지팡이 교회도 착한 뜻으로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삶의 생활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착한 뜻으로 전하는 그리스도인에 대해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입니다. 로마에서 신앙생활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이 복음을 위해 열심히 증거 해 온 사역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착한 뜻으로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착한 뜻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바울이 복음을 변증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도라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이와 반대로 17절에서는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입니다. 투기와 분쟁으로 전하는 자들로 인해 사도 바울의 사역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명성을 위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늘날 일부 교회도 이와 같은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교회가 되지 않도록 교회는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분쟁과 투기는 교회를 무너지도록 하는 힘이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의 현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착한 뜻으로 전하는 교회와 투기와 분쟁으로 전하는 교회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사도 바울은 18절에서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복음이 전파된다면 사도 바울은 그래도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으므로 투기와 분쟁으로 전하는 자들도 품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아도 그리스도 중심으로 생각하며 바르지 않는 동기로 복음을 전해도 기뻐했습니다. 그들이 바르지 않는 마음으로 전하지만 복음이 전해질 수 있다면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라고 했습니다. 왜 이런 말을 한 것입니까?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한다고 한 것입니다. 복음은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이기심으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이런 마음을 교회는 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다른 서신서에서 투기와 분쟁을 넘어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자들을 경고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로마에서 분쟁과 투기로 전하는 자들은 그래도 좋지 못한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비방한다고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사도 바울은 19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입니다. 우리말 번역에는 “왜냐하면”이 빠져있습니다. “왜냐하면”을 넣은 것이 바울의 말씀을 이해하기가 더 쉽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처지가 빌립보 교회의 기도와 그 기도에 응답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풍성하게 공급하여 주는 것을 믿었습니다. 성도는 예수님께서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성도입니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 그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것을 알기에 19절에서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미래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무엇인지 2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입니다. 바울은 재판으로 인해 사형을 당할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재판의 결과가 있던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단지 자신은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않기를 소망하며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몸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더 높이고자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자세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에서 죽임을 당해도 몸과 영혼의 부활이 있는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소망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왜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것입니까? 사도신경을 가지고 우리는 신앙고백 합니다. “몸이 부활하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를 고백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소망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은 소망이 있기를 부탁드립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재판에서 살든지 죽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될 것을 믿으며 주의 길을 가는 일꾼이었습니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편지한 사도 바울은 사랑하며 교제하는 빌립보 교회에 위로와 확신을 주는 글을 21절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입니다. 이 편지의 글에서 사도 바울은 “내게”라는 것을 강조하며 자신은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사나 죽으나 오직 유익은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도 바울의 삶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생활이기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하늘에 소망을 두었습니다. 사도 바울을 걱정하는 빌립보 교회는 이 글을 읽으며 마음이 뭉클해지며 같은 마음으로 몸과 영혼의 부활이 있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위로와 확신을 받았을 것이라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에게서 오는 위로를 받으며 자신의 임무를 다하고자 하는 일꾼이기에 빌립보 교회는 왜 내가 예수님을 믿는가에 대한 위로와 확신을 통해 몸과 영혼의 부활이 있는 주의 길을 가고자 했을 것이라 믿습니다. 이런 사도 바울의 길은 오직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될 것을 믿었기에 오늘날에도 참된 일꾼이라는 말을 듣는 사도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삶의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살든지 죽든지 주의 길을 가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에게서 오는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에서 재판을 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삶이 끝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로 가야 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증거될 수 있다면 자신의 목숨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라고 하며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주의 길을 갔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면 기뻐했습니다. 역시 사도 바울은 뼛속까지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복음이 증거될 수 있다면 그 어느 장소이든 그리스도가 전해지기를 소망했습니다. 자신의 몸보다 예수님이 중요했습니다. 몸과 영혼의 부활을 알기에 사도 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는 일꾼입니다. 참으로 부럽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될 수 있도록 사역한 일꾼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 세상에 사는 이유는 그리스도 때문이요 죽는 것도 몸과 영혼의 부활이 있기에 유익임을 믿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도 위로와 확신이 있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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