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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빌1:22-30
강설날짜 2022-10-02

사도 바울이 택한 길과 우리의 길(빌1:22-30)

 

사도 바울은 유럽의 최초로 설립된 빌립보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친밀한 교제를 하는 거룩한 공교회였습니다. 친밀한 교제를 하고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자신이 처한 현실을 있는 그대고 보고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있는 것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또한, 부끄럽지도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이기 때문에 복음이 심어질 수 있다면 그 어떤 장소라도 기뻐하는 일꾼이었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빌립보 교회에 보고하는 사도 바울은 형제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라고 하면서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은 도리어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는 진전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빌립보 교회 형제들은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신의 매임을 통해 오히려 복음이 심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황제를 보호하는 시위대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였습니다. 시위대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은 황제에게도 알려진다는 것입니다. 황제의 재판대에 선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러한 일로 인해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로마의 모든 사람이 알게 됩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은 감옥에 있다는 해서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기쁨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라고 하면서 “겁 없이 하나님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리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며 우리의 현실을 되돌라 보아야 합니다. 저도 부끄러운 삶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나약한 자에게 함께 하시며 주의 길을 가도록 하시니 이 또한 기쁨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오직 복음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겉치레로 하는 자들도 있고 참으로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것을 알기에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관심은 오직 구원으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될 수 있도록 사명을 감당하는 일꾼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도 바울과 같은 분들이 많이 나오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 얼마나 노력합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이름보다 오직 그리스도였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몸도 소중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영원히 살고자 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모르는 분들은 죽음 앞에서 더 살고자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몸과 영혼의 부활이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도 바울은 죽는 것도 기쁨이었습니다. 하늘의 영광이 빛나며 구원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여기까지 지난주에 대한 강설을 마무리하고 지금부터는 “사도 바울이 택한 길과 우리의 길”이라는 강설을 통해 주님의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황제의 재판을 앞두고 있는 사도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영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황제의 재판 결과에 따라 삶과 죽음의 길입니다. 어떠한 길이든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이 주님을 위한 영광의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22절에서 자신이 어떠한 길을 선택해야 할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의 길보다 삶의 길을 택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 자체를 주님께 맞기었습니다. 22절을 보시면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황제의 재판에서 자신이 풀려나면 성령께서는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저라도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할 일이 많으니 황제의 재판에 무죄가 되도록 하나님께 기도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목숨이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알지 못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생명은 사나 죽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목숨을 소중하게 생각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 주신 삶을 잘 마무리하며 몸과 부활이 있는 천국에 가는 것이 좋습니다. 하여튼 사도 바울은 황제의 재판에서 승소하면 로마에서 자유로움으로 전도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기 때문에 기뻤습니다. 그러면서도 로마에서 순교하면 주님께서 계신 낙원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사는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이러면서 사도 바울은 사나 죽으나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이것이 믿음을 소유한 백성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자신의 생명도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자신이 선택하지 않도록 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23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입니다. 생명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도 바울은 재판의 결과가 어찌 되든 자신이 궁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도 바울은 교회를 위한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교회를 위해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입니다. 교회를 위한 마음으로 인해 사도 바울은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에게 더 좋은 것과 교회에게 더 필요한 것입니다. 죽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교회를 생각할 때 사도 바울은 고민했을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처지에 있다면 어느 것을 선택하고 싶습니까? 사도 바울은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24절에서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말 번역에서 24절의 첫 시작인 “그러나”가 없습니다. “그러나”는 사도 바울의 소망과 반대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황제의 재판에서 승소하면 교회를 위한 일을 계속하면서 사역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에 고민했습니다. 교회를 위한 사역자의 마음에서 나오는 심정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파함으로 회심자들을 얻음으로 초기 기독교가 성장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사느냐 죽느냐로 갈등하고 있는 가운데 25절에서는 자신이 살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입니다. 사도 바울은 생명이 주님께 있다는 것을 확신하면서도 자신은 석방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어떻게 자신이 석방될 것을 알았는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개인적인 확신으로 보아야 합니다. 바울의 서신서에서 석방될 것이라는 계시를 받은 사실이 없습니다. 그랬다면 바울은 성경에 기록했을 것이라 믿습니다. 바울은 자기 생각이 그러하다는 것을 글로 쓴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교회를 위한 마음입니다.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석방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교회가 성장할 수 있도록 그리고 거룩한 영적 섬김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친밀한 교제를 하며 주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오직 교회를 위한 마음이었습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이기에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아직은 어린아이와 같은 교회이기에 성장할 수 있도록 섬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석방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교회로 서로 섬기며 서로 유익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거룩한 공교회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26절의 첫 시작을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라고 함으로 친밀한 교제를 하는 것이 교회에 유익이라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교회가 성장할 수 있도록 바울이 희생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의 마음을 생각해보기 위해 26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보다 뼛속까지 교회를 사랑하는 일꾼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는 사역은 모든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풍성한 영광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모든 사역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결과이며 오직 영광은 자신이 아닌 예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일꾼의 사역이라고 믿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영광을 받으며 이름이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이름이 온누리에 알려지기를 소망했습니다.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배워서 알고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첫 번째 질문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믿음의 선배님들의 고백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도 같은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답을 아시겠지만 읽어 드리겠습니다.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같은 마음으로 주의 길을 가는 일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 대한 길을 이야기한 후 이제는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 권면합니다. 먼저 27절을 보시면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공교회로 존재해야 하지만 타락한 세상에서 성도는 하나의 마음으로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저 자신도 두 마음이 갈등하기도 합니다. 어떤 길이 좋은지 고민될 때가 많습니다. 교회에서 회의해도 모두가 하나의 마음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모습이 어떠한지 알기 때문에 권면합니다. 권면해야 했던 이유는 15절에서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18절에서는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 내분이 일어난 것에 대한 것을 권면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27절에서 어떻게 권면했는지 아십니까? 사도 바울은 정치적이고 군사 언어와 운동경기의 용어를 사용하여 권면합니다. 교회는 복음에 합당한 공동체의 삶으로 꾸려 가라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이니 시민의 의무를 다하라입니다. 빌립보 사람들은 로마의 시민권자임을 자랑하며 자신들은 이탈리아의 벗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인으로 생활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이용하여 사도 바울은 교회는 로마 시민권자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로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며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기 이 세상에서 어떻게 생활하기를 원하시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뜻대로 생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빌립보 사람들이 로마 시민권자다운 모습을 보이지 않고 다른 생활을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특별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이기 때문에 착한 뜻과 참으로 생활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삶이 쉽지 않다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힘든 세상에서 참된 생활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니 힘들어도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빌립보 교회를 떠나 지금은 로마 감옥에 있으면서도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 복음의 진리 즉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서로 한마음과 한뜻으로 전하기 위해 거룩한 공교회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한마음과 한뜻으로 협력하여 대적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초대교회가 세워지면서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28절에서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대적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을 두려워하면 교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적과 전투를 하는 가운데 군인들이 두려운 마음으로 전투를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군인은 군인다워야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군사다운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교회는 전신갑주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완전무장을 해야 합니다. 구약에서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를 아실 것이라 믿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셨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복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복음을 방해하고자 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복음을 증거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이 심어지도록 하며 거룩한 공교회를 위해 한마음과 한뜻으로 승리하는 교회입니다. 승리하는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성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29절에서 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가에 대한 것을 권면하십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선물입니다. 이 구원의 선물을 위해 고난도 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인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우리에게 고난도 주십니다. 경주자들에게 영광은 무엇입니까? 면류관 아니겠습니까? 면류관을 얻기 위해 경주자들은 무엇을 합니까? 훈련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의 선물을 주시면서 값진 면류관이 될 수 있도록 고난도 주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도 모든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빌립보 교회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교회는 더 힘들어질 수 있습니다. 고난이라는 저항이 더 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순종하지 않고 타락하는 교회는 사람이 많아질 수는 있지만, 오히려 고난이 없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 교회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고난을 겪고 있다는 성도는 힘들어도 자신은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으로 받았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그러니 주의 길을 잘 가기를 소망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만 고난이 있지 않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교회에도 있다고 하십니다. 30절을 보시면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도 고난과 싸우고 있다고 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싸움을 넘어 영적 전투를 해야 하는 군인과 같은 교회로 이야기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적도 무섭지만, 마귀를 따르는 자들과 영적으로 싸우며 무너지도록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교회가 승리할 수 있도록 그리고 면류관을 받을 수 있도록 함께하시며 주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처한 상활처럼 빌립보 교회도 그러할 수 있으니 인내하며 승리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초대교회는 순교로 세워진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믿는 현실이었습니다. 종교개혁 때도 같은 현실 아니었습니까? 오히려 고난이 있을 때 교회는 순결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참으로 희한하지 않습니까? 고난이 없을 때는 오히려 교회는 세상을 따라갑니다. 고난이 있을 때는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분들이 순결을 지키고자 합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권면을 마무리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어떠한 것을 했는지 아는 성도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세워질 때 사도 바울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귀신 들린 여종을 고칠 때,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거짓 교사로부터 어려움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 많은 사건을 눈과 이야기로 들었을 것입니다. 너희들은 나를 통해 보았으니 주의 길을 힘들어도 잘 가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동병상련”이라고 합니다.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끼리 서로 가엾게 여기는 심정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서로 싸우지 말고 한마음과 한뜻으로 선을 이루기 위해 거룩한 공교회로 전진해야 합니다. 전투하는 교회는 싸리나무처럼 뭉쳐야 합니다. 그럴 때 더 많은 힘을 내며 하나님 나라로 전진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들은 우리는 사도 바울이 택한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우리가 택한 길을 어디입니까? 사도 바울과 빌립보 교회는 서로 친밀한 교제를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사도 바울의 편지로 같은 교제를 하는 성도입니다. 사도 바울의 권면을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그런데 쉽지 않다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통해 교회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내가 이런 길을 가고 있으니 힘들지만 인내하라고 하십니다.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담대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고난은 오히려 구원의 증거라고 하심으로 면류관을 바라보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권면을 들으며 바른길을 가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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