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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고전1:1-3
강설날짜 2023-03-26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dswcNKRgoD4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고린도 교회와 같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성경의 지식은 축적되고 있지만,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말씀대로 생활하고 있는가? 이런 시대에 지팡이 교회는 고린도전서를 통해 바른 지식으로 주의 길을 가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나그네와 같은 삶을 생활하며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현실은 우리에게 교회 안에서 실제로 부딪힌 생활의 문제를 말씀하여 주시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갈등과 분열 그리고 성도답지 못한 삶의 생활은 고린도 교회처럼 타락되도록 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이때 우리는 공동체의 현실과 고민 속에서 사도 바울이 왜 고린도전서를 기록했는가를 아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함으로 지팡이 교회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생활하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바울의 글을 통해 고린도전서를 이해하며 십자가의 복음으로 주의 길을 가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우리에게 10절에서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4절 끝을 보시면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왜 이렇게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말한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현실을 잘 알고 있으므로 신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기관인 공동체로서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해답 찾을 수 있도록 하며 하나가 될 수 있도록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2절에서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록한 것은 교회에 대한 사도 바울의 진실한 감동으로 선언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거룩해진 성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거룩하여지고”라고 했습니다. 교회인 우리에게 거룩해지기 위해 선행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보시면 어떠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은혜는 하나님의 우리가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불가항력의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생활을 보면 하나님 백성다운 모습이 아닌 것 같습니다. 구원의 은총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어리석은 자 같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교회로 불러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람의 사랑과 다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람은 대가를 원하는 사랑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구원의 대가를 위한 삶의 충족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거룩하여지고”라고 함으로 이미 거룩한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은 교회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알도록 고린도 교회에게 “거룩하여지고”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전도를 통해 세워진 것을 알고 있기에 “거룩하여지고”를 떠올랐을 것이라 믿습니다.

 

지팡이 교회도 하나님의 은혜로 거룩해진 공동체이기에 고린도 교회를 통해 하나 됨을 위한 주의 길을 가는 신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고린도 교회처럼 오늘날 교회도 여러 가지 갈등과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는 우리에게 교회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도록 합니다. 먼저 1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며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고 하며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왜 사도라고 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다른 서신서에서도 사도라고 기록하지만, 고린도전서에서 사도는 각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사도 바울은 사도에 대한 도전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사도라고 했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사도행전을 통해 강설을 들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어떻게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주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나타난 초자연적인 현상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통해 기록된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 알 수 있도록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렇지 않고 모든 것을 다 기록했다면 우리는 성경을 다 이해하기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66권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르심을 받은 사도라고 함으로 자신이 사람을 기쁘게 그리고 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알 수 있도록 그 당시 통용된 편지 형식을 사용하여 1절에서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와 갈등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사도라는 의미가 더 중요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옹호하면서 고린도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와 갈등 등을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에 세워진 하나님 나라의 기관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기관이 아닙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없던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입니다. 사람의 특별한 공로에 의한 하나님께서 교회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도 바울이며 우리도 같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바울과 같은 사람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실 수 있는가? 차라리 내가 바울보다 도덕적으로 선한 것 같습니다. 사람을 죽인 범인이 사도가 될 수 있는가?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오직 감사만 있어야 합니다. 우리로서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왜 사도 바울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나에게 사도 바울처럼 사역을 감당하라고 하면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이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부르셨습니다. 사역을 감당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과 동행하셨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에게만 하나님께서 동행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2절을 보시면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같은 의미로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1절에서 자신이 부르심을 받은 것을 말한 후 이제는 고린도 교회는 나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서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위해 지위의 격차가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이렇게 생각합니다. 교회는 목사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지배 구조를 목사, 장로, 집사 등으로 순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도록 한 것이 교회라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오해하지 않도록 우리는 교회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 사람들이 교회가 어떤 사명을 감당하는지 알게 된 것을 믿습니다. 그리하면 전도할 때 힘이 되리라 믿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성도님, 사도 바울은 자신과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과 지위의 격차를 말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고린도 교회도 같다고 합니다. 어린애이든 어른이든 누구나 똑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입니다. 사도라고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또한, 목사라고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장로라고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서로 존중하며 복음이 전파될 수 있도록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해야 할 사명입니다. 사람은 각자 서로 다른 달란트가 있습니다. 서도 다른 달란트이지만 서로 섬길 때 복음이 전파될 수 있도록 하는 힘이 있습니다. 사도는 사도다운 모습으로, 목사도 장로도 그러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도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사도이든 목사이든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너희 자신을 돌아보라고 하십니다. 2절 말씀을 사용해 고린도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와 갈등 등을 생각하도록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세워질 때의 모습으로 회복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고린도전서를 고린도 교회만을 위해 기록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만 발생하는 일이 아니라 초대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고린도 교회와 초대 교회에서만 일어난 사건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같은 현실에 있습니다. 성경의 내용이 초대 교회보다 더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교회는 더 타락되며 쇠퇴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라고 함으로 주의 재림의 때까지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에게 바른길을 감당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삶에서 신분이 다르지만, 하나님 나라의 기관으로 부르심으로 받은 성도입니다. 높고 낮음이 없는 신분입니다. 이것을 잘 알 수 있는 한국 교회사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올 때 세상의 신분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개신교가 들어올 때 양반들은 백성과 상민들과 함께 예배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양반들만 예배하기 위해 세운 교회가 “홍문수골 교회”입니다. 하지만 양반들이 세운 교회는 쇠퇴함으로 홍문수골 교회와 곤당골 교회가 합쳐 세워진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가 종로에 있는 승동 교회입니다. 바로 이 교회에서 누가 장로가 되었는지 아십니까? 바로 백정입니다. 교회는 이처럼 신분을 넘어 반상의 차별을 넘어섰습니다. 만약 선교사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날 교회는 선비는 선비들만의 교회당으로 백성은 백정만이 모이는 교회당으로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신분을 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으로 받은 하나의 교회입니다.

 

지역마다 교회의 이름을 다르지만 서로 하나의 공동체인 하나님 나라의 기관으로서 시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을 위해 직분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위해 직분 자를 세우셨습니다. 초대 교회가 세워질 수 있도록 사도를 부르셨습니다. 초대 교회가 성장하면서 사도는 집사를 세워 사람을 위한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성장을 위해 일꾼을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부흥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보여주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품행과 인격 등이 충족되어서 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를 심령이 가난해지도록 하시며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을 감당하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알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꾼이 될 수 있도록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지칩니다. 나약한 자신을 바라볼 때 한심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말고 인내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를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 거룩해진 성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각처에서 생활하는 모든 자에게 힘이 될 수 있도록 교회의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섬기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를 섬기는 자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보면 사랑만 받고 싶어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주의 길을 가는 모습이 부럽기도 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현실을 잘 알고 있기에 사도 바울은 3절에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라고 합니다. 화를 낼 것 같지만, 오히려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면서 고린도 교회가 복 있는 성도가 되기를 선언합니다. 왜 사도 바울은 은혜와 평강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입니까? 더 좋은 의미의 단어도 있는데 은혜와 평강을 사용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은혜를 사용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의미와 다른 은혜입니다. 그러면 평강이라는 의미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세상 사람들은 평강이라는 의미를 갈등이 없는 것으로 내적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사용한 평강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평강이라는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평강은 교회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은혜와 평강을 사용하면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인 고린도 교회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며 따라가라고 하십니다. 그러지 교회는 사도 바울처럼 구원의 은혜와 평강을 입었으니 일꾼으로서 섬김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은혜와 평강으로 인해 교회는 주의 길을 가야 합니다. 나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해바라기처럼 주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은혜와 평강은 우리에게 참된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니 참된 은혜와 평강을 주시는 삼위 하나님만 믿기를 소망합니다.

 

사도 바울만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도 바울처럼 사역의 가치는 다르겠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은혜와 평강이 있는 성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신분과 지위 그리고 권리와 자유를 누리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연약한 모습이지만 주의 재림 이후에는 온전한 모습으로 즉 몸과 영혼이 부활함으로 극치의 삶을 생활합니다. 지금은 하나님 나라의 맞보기 생활을 하며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은혜와 평강으로 인해 교회는 일꾼으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참된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를 보면 실망스럽습니다. 주위를 보아도 한숨만 나옵니다. 그러다 보면 낙심하며 교회를 떠나고 싶습니다. 하나님 왜 하필 나만 가지고 그러십니까?라고 호소할 수 있습니다. 그럴수록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을 보며 사람을 볼 때는 답답하지만, 참된 성도는 주님께 기도함으로 힘을 얻습니다. 그리함으로 거친 세상에서 사명을 감당하고자 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 또한 나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은혜와 평강으로 인도하시며 보호하시기 때문에 내가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송 중에 “주여 인도하소서”가 있습니다. 최인혁 찬양 사역자가 작곡한 복음송입니다. “지치고 상한 내 영혼을 주여 받아주소서/ 내가 주께도 지금 가오니”입니다. 가장 힘든 삶을 생활할 때 작곡한 곡으로 우리의 마음을 잘 표현한 곡입니다. 힘들 때 강함 주시며 내 영혼을 인도하시는 주님께 기도하기를 소망합니다. “오 주여 나를 인도하소서”라는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교회인 성도님,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은 내가 이런저런 조건을 하나님께 요구할 수 없습니다. 나의 처지가 남보다 재능이 없을 수 있습니다. 환경적으로도 불평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거룩하여진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죄악으로 물든 사람은 영원한 형벌의 극치를 받는 지옥으로 가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받은 교회는 주님의 재림 때에 몸과 영혼이 부활하여 극치의 하나님 나라에서 상상할 수 없는 생활을 영원토록 누립니다. 그날을 생각하며 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와 갈등에서 협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달란트는 서로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 다 같은 성도입니다. 하나의 교회이지만 지역의 교회마다 다양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편지를 써야 할 만큼 문제가 많았습니다. 이 땅에 있는 교회치고 문제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전서는 우리에게 실제적 문제에 대하여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가를 알려 주는 판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서 발생한 여러 가지 문제와 갈등 등은 단순히 그 시대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재림 때까지 같은 문제로 늘 있는 문제와 갈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전서를 주일마다 강설함으로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주의 길을 가야 하는지 알아 가도록 하겠습니다.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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