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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고전15:12-19
강설날짜 2023-04-09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cOJ_Utel3dA

기독교는 역사적인 종교이다. 곧 역사적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기초한다. 이는 단순히 추상적인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적인 구원 행동을 하셨는가 증언하고 전파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사건이다. 이 두 사건은 역사 속에서 발생한 사건들이기 때문에 이를 목격한 증인들이 많았다.

 

기독교는 바로 그 증인들이 전해준 증거의 말씀에 기초하여 세워졌다. 따라서 복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으로 역사적인 이 구속 사건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들은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을 나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 따라서 부활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 신앙의 초석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기독교 신앙이 성립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일들은 초대교회 당시에도 많이 있었다. 특별히 도케티즘(Docetism), 가현설(假現設)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만일 이런식의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절대 구원받지 못한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이미 오래전 성경에 예언되었으며 예수께서도 제자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복음서는 이러한 사실을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다. 특별히 마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례 절차를 기록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마가는 자신이 목격자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물론 예수를 따르는 무리라는 이유로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평가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사회적인 권위를 가진 사람들, 특히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 있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 종교적으로 존경받는 유대교 지도자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직접 예수를 장사지냈다.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빌라도는 예수님의 죽음을 인정하고 그의 시체를 내어주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실제 십자가형을 담당했던 백부장은 예수가 죽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하고 빌라도에게 보고했으며 그 시신을 아리마대 요셉에게 전달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 있었던 사람들이었으며 로마 사회 안에서, 유대교 사회 안에서 모두 객관적으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 사실을 매우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또한 마가는 어떤 특정한 사람들의 이름, 곧 여인들의 이름을 반복적으로 기록하여 언급하고 있다. 성경학자들은 마가가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시기에 세 여인들이 아직 예수 공동체 안에 살아남아 있었기 때문에 만약 의심이 있는 경우 누구든지 이 세 여인들에게 물어보라는 의도를 가지고 기록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마가는 부활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모두 믿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막 16:11). 심지어 제자들조차 믿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막 16: 13). 어쩌면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그러나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특별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만약 흔히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 한 차례 일어난 일이라면 믿을 수 있지만 부활의 그 가치는 절대적이지 않다.

 

그런데 이 말은 매우 중요한 말이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 인류 역사 속에서 오직 딱 한 번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의 부활은 이처럼 어쩌다가 일어난 일이 아니라 철저히 성경대로 일어난 일이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미리 말씀하셨으며 예고된 일이다(막 8: 31, 9: 31, 10: 33 – 34 참고). 그러나 이 말씀을 믿고 기대하며 기억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비록 부활에 대한 말씀을 믿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무덤 앞에는 가보아야 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 무덤을 찾지

않았다. 사실 세 여인들도 부활을 믿었기 때문에 확인하러 온 것이 아니라 다만 관습에 따라 시체에 향유를 바르기 위하여 찾아온 것뿐이었다. 그때 흰옷을 입은 한 청년으로 기록된 천사가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을 되새겨 주고 있다. 그래서 이 세 여인들이 첫 목격자가 되었던 것이다(눅 24: 36 이하).

 

여기에서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께서 영으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육체로 부활하셨다. 이것을 믿고 따르는 일은 매우 중요한 신앙의 고백이다. 만약 이 사실을 믿지 못한다면 그는 아직 성도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로 죽고 육체로 부활하셨다. 자신을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는 의미가 바로 부활이라고 설명해주셨다(눅 24: 44 - 48). 그리고 잠깐 나타나셨다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무려 40일 동안이나 이 땅에 머무르시며 하나님 나라와 그 뜻을 가르치신 이후에 승천하셨다(행 1: 3 – 11). 또 이 모든 사실을 부정하고 심지어 예수를 믿고 따르던 자들을 잡아 죽이기까지 했던 바울은 자신도 이 일에 증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 이외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이 일을 목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고전 15: 3 – 8). 또한 마가와 마찬가지로 그 당시에 목격자들이 아직 살아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 자신의 이 글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예수의 부활에는 많은 목격자들이 있다.

 

물론 2천여 년이 지난 지금의 현실에서 그들을 만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신이 직접 보고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부 제자들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말 할 수도 있다. 실제 그렇게 이야기하고 연구까지 하는 신학자들도 많다. 그러나 이 사실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다음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한목소리로 죽었던 예수가 부활했다고 거짓으로 지어내었다면 왜 예수님께서 붙잡힐 때는 죽음이 두려워 도망가고, 겉옷을 벗고 달아났던, 아니 심지어 저주까지 하며 맹세하여 예수를 부인했던 제자들이 어떻게 하나같이 목숨을 걸고 순교까지 하며 부활을 증거하고 전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오늘날 사이비 이단들처럼 조직적인 관리나 관계 속에서 얽히고설킨 문제와 특히 재산 문제가 남아있기 때문도 아니었다.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 마리아의 아들이라고까지 불린 갈릴리 벽촌의 사람이었다. 심지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에는 속옷까지 로마 병사들이 제비뽑아 나눠 가지고 갔다. 무엇보다 그 당시 예수의 부활을 이야기하면 신성모독이 되어 죽어야만 했고, 가족들까지 모두 극심한 박해를 받아야만 했다. 만약 제자들이 꾸며낸 이야기라면 그들이 누릴 유익이 무엇인가 증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들은 어리석고 미련하게 목숨을 걸면서까지 예수의 부활을 증거했을까? 성경은 이 일에 대하여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고 한마디로 정리하고 있다(사도행전 3장 13절 이하 18절, 4장 18절 이하 20절에서 그 내용을 알려주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동안 그의 하나님 되심을 보았고, 그의 가르침을 들었으며, 이제 그의 부활을 보았고 – 그가 못 박힌 손과 발, 그리고 창에 찔린 옆구리, 함께 조반을 나누어 주셨던 – 또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 가르쳐 주신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 변화된 제자들의 모습,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부활의 증거가 된다. 또 다른 대의명분을 이야기하고 반론을 펼칠 수 있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제자들이 이렇게 한다고 해서 그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었다. 단지 죽음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바로 부활에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지만, 만약 우리 죄를 위하여 죽고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위대한 종교의 창시자와 다를 바 없다. 모든 종교의 창시자에게는 태어난 날이 있다. 그들 역시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죽었고 장사 된 날이 있다. 그러나 부활한 날은 오직 예수님께만 있다. 누구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다. 아무리 기독교 신앙이 밉고, 싫어도 자신들의 교주가 부활했다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부활은 기독교 신앙만의 유일성이고, 독점성이고, 배타적이다. 이에 따른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르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사실 부활절에 더 큰 의미를 두어야 한다. 오늘날 세상 가운데 희석이 되어버린 여러 가지 교회의 행사를 살펴볼 때 안타까움을 감출 수가 없다. 부활에 대한 감사와 기쁨이 사라지고 말았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었기 때문에 우리는 죽지 않을 수 있었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표하여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우리도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이 부활에 대한 소망 때문에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말할 수 있었다.

 

우리가 주일마다 모여 예배하는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께 예배하고 그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주일은 늘 주의 십자가를 기억하고 또 주의 부활을 되새기며 감사하고 구원의 기쁨을 함께 찬양하는 날이다. 이 일에 우리가 증인이 되는 날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사람들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죄 가운데서 벗어날 수도

없고 사망의 권세 아래서 헤어 나올 수도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믿음도 헛된 것이고 그들이 전파하는 복음도 결국 헛된 것이 될 것이다(14절). 부활의 역사적 사실이 없어도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여전히 가능할 수 있다는 주장은 모두 거짓된 것이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인들의 이 모든 헌신적인 수고와 노력은 다 헛된 것이며, 또 만약 부활의 소망이 없는데도 그런 어려움과 고난을 무릅쓰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히 가장 불쌍하고 미련한 사람일 것이다(19절).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20절).” 추수하는 농부에게 첫 열매는 이제 본격적으로 열매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처음 익은 열매를 보면서 땀방울이 맺힌 이마에 미소가 머무는 것은 이제 곧 본격적인 추수가 있을 것을 내다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제 신자들의 본격적인 부활이 있을 것을 미리 보여주는 확실한 전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세상에서 아무리 힘든 고난을 받아도 낙심하지 않고 심지어 죽음의 위험에 직면해서도 두려워하거나 절망하지 않는 것은 미래의 확실한 부활의 소망을 기쁨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 받는다”라는 동사는 현재형으로 구원의 계속, 지속성을 가리킨다(2절).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을 믿을 때 단번에 얻는 것이지만, 구원 얻는 상태는 지속적인 것이다. 결코 이 땅에서의 도피를 이야기하고 피안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구원은 한번 얻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 유지하고 또 완성해야 할 어떤 것이고, 구원을 유지하고 완성해야 할 책임은 인간 편에 주어져 있다. 따라서 이 복음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너희 구원을 성취하라”고 권면을 했다(빌 2:12-13). 심판은 그 사람의 행위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신앙은 바른 기초 위에서 시작해야 한다. 예수를 믿는다고 주장하면서 예수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헛되이 믿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놓으신 부활의 길, 영생의 길에 참여하기를 소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14절). 이러한 믿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는 표현은 사람들의 믿음의 반응과 관계없이 모든 인류가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에 동참하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22절).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믿음만이 유일한 구원의 원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죄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그를 믿는 자들에게 부활의 생명을 얻는 길을 열어놓으셨다. 성도들은 이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이제 죄에 대해서는 죽었다는 것이다. 이제 의와 은총의 권세 아래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부활의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부활의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근거한 것이다.

 

초대교회 당시 로마가 황제 숭배를 점점 더 악랄하게 강요하자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땅 위에서 버틸 만한 능력이 없어서 지하의 땅굴 속으로 숨게 되었다. 카타콤이라고 불리는 이 땅굴은 로마 건축을 위해 오랫동안 토공들이 흙을 파내기 위해 시작된 곳이었는데, 수백 년을 지나면서 이 땅굴은 끝을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거미줄처럼 뻗어나간 천혜의 요새가 되었다.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피해 이곳으로 피한 것이다.

 

그러나 습기 차고 어두운 이곳은 정상적으로 살 만한 곳이 아니었다. 기독교인들이 이곳에 피신하면서 조악한 환경으로 인해 병약해지고 때로는 죽는 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죽은 자들을 위해 땅굴 속에 무덤을 파고 벽에다 내세에 대한 소망을 말하는 성구와 자신들의 소원을 새겨 넣었다. 때론 바깥 세상에 나왔다가 체포되어 원형 경기장으로 끌려가며칠씩 굶긴 사자들의 밥으로 사라져 갈 때에도 그들은 하늘을 바라보고 기쁨으로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원형 경기장의 사자들의 밥이 될 순간에도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있느냐?” 마치 사망을 조소하듯 찬송을 불렀다. 미래에 부활의 소망을 가진 카타콤의 순교자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복종하게 하실 그때 사망의 독침, 혹은 쏘는 것은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게 될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고전 15:28).

 

바로 미래의 이 소망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현재의 어려움과 무의미를 이길 수 있고 가치 있는 일에 수고를 진력할 수 있다. 부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다스림을 믿고 따르며, 이 땅에서의 보상을 넘어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섬기며,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기대하고 준비하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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