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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고전1:10-17
강설날짜 2023-04-16

고린도 교회의 분쟁과 오늘날 교회

 

우연히 검색하다가 강남 대형교회 500억 사기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검찰이 교회 집사라는 지위를 이용해 신자들로부터 500억이 넘는 금액을 받아서 호화 생활을 누린 자를 구속했습니다. 강남의 어느 교회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은 교회 활동을 열심히 하는 집사였다고 합니다. 각종 봉사와 장애인단체를 후원하다 보니 신자들로부터 좋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은 것 같습니다. 인정받은 집사는 고액이라는 고수익을 이용해 신자들에게 많은 투자금을 받았다고 합니다. 투자금을 받은 집사는 정상적으로 고수익을 주었다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재투자를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고수익은 계속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신자들에게 받은 돈으로 좋은 집에 살면서 자녀의 유학비 등으로 사용하며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신자들에게 집사에 관한 안 좋은 소식이 들리자 집사는 “하나님이 고수익을 보장한다”라고 하며 “기도의 힘을 믿어라”라고 했습니다. 신자들은 고수익을 벌고 싶었으나 반대로 대출받은 돈까지 받지 못하는 사태가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오히려 고수익이 아닌 반대의 현실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이것이 올바른 이야기입니까? 오늘날 교회는 초대 교회보다 더 많은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안에서 분쟁으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당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교회는 고린도 교회를 통해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아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과 오늘날의 교회를 강설하기 전 지난번에 했던 말씀을 기억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의 제목은 “고린도 교회에 주신 언변과 지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이방인의 사도가 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셨다고 합니다. 그 은사는 “언변과 지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며 사용했습니다. 대체로 성도는 은사를 받으면 신앙생활을 더 잘할 것 같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보면 어떠합니까? 오히려 신앙생활 하는 데 있어서 주변 사람에게 어려움을 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지 않도록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믿으며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겸손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은사를 통해 교회는 견고하게 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분쟁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견고하다는 것은 서로 격려하며 믿음 안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섬겨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신 언변과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며 사용할 때 신자들은 견고하지 못하며 서로 불신이 늘어 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견고하게 하십니다. 이것을 알기에 사도 바울은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셨는가 하면 성도는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과 교제하며 든든히 세워져 가는 성도가 될 수 있도록 편지로 섬기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와 교제할 수 있도록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미쁘시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와 교제하는 사도 바울은 이제 신자들에게 책망하기 시작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를 되돌아보며 주의 길을 가기를 소망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말씀을 우리에게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을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10절에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가장 먼저 분쟁에 대한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죄로 타락한 사람은 어느 장소이든 분쟁이 있습니다. 분쟁이 없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죄로 인해 사람은 분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나 혼자 무인도에서 생활하면 분쟁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모인 곳에는 분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람의 관계는 도덕적인 분쟁이라면 고린도 교회는 신앙적인 차원에서 분쟁입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고린도 지역에서 생활하는 교회에게 “형제들아”라고 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엄숙하고 진지한 마음으로 분쟁에 대한 것을 권면하고 자 합니다. 그래서 권고한다는 단어를 사용해 간청하고 탄원한다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교회를 사랑하는 사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간절한 마음으로 고린도 교회에 간청하고 탄원하는 편지로 분쟁이 없도록 하며 주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섬기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마음과 통하는 사람과 모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반대의 견해와는 오히려 모임을 만들기를 싫어합니다. 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생각하며 어떤 것이 하나님을 위한 마음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하십니다. 분쟁으로부터 떠나 믿음 안에서 서로 연합하라고 권면합니다. 고린도 교회를 잘 알고 있어서 사도 바울은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갈 수 있도록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대한 소식을 듣었기 때문에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지역에서 생활하는 신자들에게 “형제들아”라고 하며 교회가 분쟁이 없도록 권면합니다. 바울은 어떻게 고린도 교회에 관한 소식을 들었던 것입니까? 11절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글로에”라는 여인입니다. 글로에의 뜻은 그 지역의 여신의 별명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글로에”는 이방신을 섬겼던 여인으로 생각됩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로 개종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여튼, 이 여인을 통해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형편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바울은 “형제들아”라고 하며 분쟁하지 말고 서로 연합하여 지상명령을 감당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고린도 교회에 어떤 분쟁이 있었던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알기에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입니다. 사도 바울은 분쟁에 대한 성격이 무엇이지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초대 교회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방인 신자들은 사도 바울을 유대인 신자들은 베드로를 지지했습니다. 이방인 신자들 안에서도 사도 바울과 아볼로로 나뉘었습니다. 서로의 권위를 인정해야 했지만, 자신들의 생각에 따라 이야기하면서 서로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했던 고린도 교회는 오히려 서로 당을 만들었습니다. 서로 연합하지 못하고 당을 만들며 하나님께서 주신 언변과 지식의 은사를 잘못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서 일어난 분쟁을 책망하며 권고했습니다. 교회는 지신의 이념과 사상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주신 성경의 말씀대로 믿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또 다른 분쟁이 있었습니다. 이 또한 12절과 연결된 말씀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베드로, 사도 바울, 아볼로 등으로 나뉘어 있는 가운데 누구에게서 세례를 받았는가를 중요시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세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는 누구에게서 세례를 받았는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어떠합니까? 큰 교회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 아니면 유명한 목사에게 세례받은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세례를 누가 주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면 됩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고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분이시기 때문에 교회는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조각조각 나뉘어 있지 않으니 교회도 그러해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기에 서로 분쟁해서는 안 됩니다. 서로 한 몸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신랑과 신부가 서로 한 몸인 것처럼 교회도 갖습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을 모시는 교회는 거룩한 신부로서 서로 한 몸 공동체입니다. 죄로 타락한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한 신부로 부르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도 우리가 신부라는 것을 기억하며 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였으며”라고 합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생각하지 못하고 분쟁하는 것은 주님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주님만 섬겨야 합니다. 교회는 목사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 않고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받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일부 교회는 주님보다 목사를 더 섬기고자 합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목사교”라고 할 정도입니다. 이런 일이 없도록 교회는 성경 말씀에 충실해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는데 14절에서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합니다. 몇 사람이 누구인지 1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입니다. 사도 바울이 세례를 준 사람은 “그리스보와 가이오”입니다. 많은 사람을 전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를 신중하게 주었다는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16절을 보시면 “스데바나 집”에도 세례를 주었습니다. 여기서 스데바나 집이라고 하는 것은 가족을 의미합니다. 하여튼, 무조건 믿으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지 않았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성장하면서 누가 어떻게 세례를 주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고린도 지역에서 신앙생활 하는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면서 분쟁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누구에게서 받았는가를 더 중요시했습니다. 바울이든, 베드로이든, 아볼로이든, 큰 교회 목사이든 작은 교회 목사라 할지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바울이 세례를 몇 명에게 주었다는 것을 감사하는 이유는 자신이 바울교를 만들기 위해 제자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막을 수 있으므로 감사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바울이든 목사이든 자신의 이름이 높이 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쇠하여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이름만 남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이름으로 세례받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15절을 보시면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숭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자신을 위한 바울교를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과 연결하기 위한 세례도 주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볼 수 있도록 교회를 섬겼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고린도 교회를 잘 섬길 수 있는 신자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처럼 교회를 떠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세례를 주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세례를 무조건 주지 않았다는 것을 기록합니다. 그러면서 고린도 교회에게 세례가 무엇인지 알도록 합니다. 16절을 보시면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입니다. 스데바나 가족은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가족에게 세례를 준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섬기도록 세례를 주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었습니다. 그리함으로 예수님만 섬길 수 있도록 하는 사도였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세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1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입니다. 세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아니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를 더 중요시했습니다. 주님을 참되게 믿지 아니하고 좋은 목사와 사도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자랑하면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교회는 사도교도 아니며 목사고도 아닙니다.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이 세례를 준 이유는 복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사람은 이름을 남기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름을 남기고 싶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남기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할 때 십자가의 복음이 헛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며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죄로 타락한 세상에서 생활할 때 분쟁이 없을 수 없습니다. 분쟁이 없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교회는 어떻게 신앙생활 해야 하겠습니까? 오직 주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성도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분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성도는 주님만 바라보며 세상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꾼의 삶을 생활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삶으로 영적 예배를 하고자 함에도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세상의 생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이럴 때 교회는 성경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마18장의 말씀을 차분하게 읽어보시면 권징에 대한 내용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는 권징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강설을 참고해 주십시오. 홈페이지에 있으니 참고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의 분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몸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자가 되고 싶습니까? 반대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로서 사명을 감당하고 자 하십니까? 고린도 교회는 바울파, 베드로파, 아볼로파 등으로 분열되어 분쟁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신 언변과 지식의 은사를 자신의 것으로 생각함으로 교회를 무너지도록 했습니다. 교회를 무너지도록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잘 알기 때문에 세례가 무엇인지 기억하도록 합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다는 고백의 신앙이 있습니다. 신자들이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다는 고백과 함께 교회는 서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죄를 십자가에서 감당해 주셨다는 것을 믿으며 교회는 하나 되므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일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하도록 합니다. 우리도 이런 생각을 늘 해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한 몸이 될 수 있습니다. 마치 가족의 의미와 같습니다. 가족이라는 의미는 서로 다른 몸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의 공동체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처럼 교회도 같습니다. 서로 다른 가족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그리고 세례로 인해 한 몸이 되었습니다. 한 몸을 위해 마음을 다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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