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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고전1:18-25
강설날짜 2023-04-23

십자가의 도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교회란?(고전1:18-25)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에게 당신님이 누구신가를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주신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존재를 알리셨습니다. 오늘도 지팡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예배당에 모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합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강설을 사모하기를 소망합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라는 것은 알 것입니다. 사람이 타락하지 아니할 때는 하나님과 신뢰하는 교제를 했습니다. 하지만, 마귀의 속삭임에 넘어간 사람은 결국 타락했습니다. 사람이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해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중보자로 오셨습니다.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모진 고난을 받은 후 돌아가셨습니다. 사람은 사망하면 누구나 흙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부활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로 인해 사람이 부활할 것을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 부활의 영광이 무엇인지 알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을 알기에 우리는 부활을 소망합니다. 천국 혼인 잔치를 기대하며 나그네와 같은 삶에서 영적 섬김의 생활을 감당하며 지상명령을 감당합니다. 세상 사람에게 교회는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을 수 있도록 성경을 통해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지난 주일에 “교회의 분쟁과 오늘날 교회”라는 강설을 들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분쟁을 통해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만의 분쟁을 넘어 이웃과의 분쟁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쇠퇴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 하던 신자도 분쟁으로 인해 신앙의 길을 저버리고 세상 사람으로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교회의 분쟁은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교회는 성경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교회는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는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말씀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책망하셨습니다. 교회 안에 분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분쟁은 교회가 세워질 수 없도록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책망해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책망으로 끝내지 않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을 수 있도록 섬겼습니다. 사람이 모인 곳에는 분쟁이 없을 수 없습니다. 분쟁을 넘어 사람을 죽이는 전쟁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를 전쟁의 역사라고 할 정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의 마음과 고린도 교회의 현실을 알고 있기에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라고 하십니다. 분쟁이 있는 교회는 사도 바울의 권면을 들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입니다. 언변과 지식의 은사가 있는 고린도 교회라 할지라도 분쟁이 있었습니다. 은사를 통해 섬겨야 했지만 오히려 자신의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은사를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며 사용하다 보니 나는 바울파, 베르도, 아볼로, 그리스도 등으로 나뉘어 분쟁했습니다. 또 다른 분쟁은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세례는 하나님을 믿겠다는 고백의 표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을 참되게 믿지 않고 사람을 믿었다는 증거입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서로 신뢰하며 주의 길을 가야 하는 성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현실을 알기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며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교회는 한 몸 공동체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서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는 선언입니다. 한 몸인 교회는 십자가가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오직 복음을 전해야 하는 성도입니다.

 

지난주 말씀을 기억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십자가의 도와 하나님을 믿는 교회란” 무엇인가를 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고린도전서에서 감동적인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알지 못하면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신앙생활 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공과 마음의 안정을 위해 말씀을 듣는 자입니다. 세상의 지혜로 십자가의 도를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님을 알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알 수 있도록 하시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기쁨입니다. 그리함으로 교회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기에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행복이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을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감동의 말씀을 하십니다. 18절을 보시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힘과 권력에 약합니다. 그래서 힘과 권력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마귀도 힘과 능력을 위해 사람을 이용하고자 합니다. 마귀의 종노릇 하는 자들은 그래서 힘과 권력을 좋아합니다. 이와 반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힘과 권력이 아닌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좋아합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고린도 지역에서 생활하는 성도에게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위한 힘과 능력을 포기하고 오직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세상의 힘과 능력을 포기하면 오히려 마음이 온유하고 청결한 성도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산상수훈을 믿으며 복음의 증인 자로 생활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의 도를 모르기 때문에 마귀에게 종노릇 하며 멸망의 길을 선택한 미련한 자들입니다.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구원은 미련한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에게는 구원은 기쁨과 감격이 있습니다. 기쁨의 감격은 하나님의 능력의 극치를 맛보며 생활하기 때문입니다. 영적 섬김의 생활은 결국 부활을 통해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기쁨의 감격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을 누릴 때의 기쁨보다 더 극치의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구원의 기쁨을 사람에게 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행복을 누리지 못하도록 합니다. 마귀는 세상 사람들에게 지혜와 능력을 따라가도록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마지막 날에 영원한 지옥의 슬픔을 누리도록 합니다. 사람은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자신의 힘과 능력을 포기해야 합니다. 구원을 얻은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지금은 나그네와 같은 생활이지만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합니다. 부활은 사람이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능력입니다. 고린도 교회도 십자가의 도가 무엇인지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이 말한 십자가의 도를 생각하며 분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도 이와 같습니다. 십자가를 생각하지 못하면 오늘날 교회도 고린도 교회처럼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19절에서 구약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먼저 사29:1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을 보시면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입으로만 경배하고 마음은 세상의 힘과 권력을 믿는 자들에게 이야기한 메시지였습니다. 그런 자들에게는 사람의 지혜와 총명이 가려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언변과 지혜가 있는 고린도 교회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참된 언변과 지혜로 논쟁하고자 합니다. 사람의 지혜와 능력은 온전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는 온전합니다. 세상의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타락한 사람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믿으며 십자가의 도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혜롭고 총명하게 하심으로 구원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지혜와 총명으로 구원을 이루려는 고린도 교회에게 20절에서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라고 하십니다. 분쟁하는 자들에게 사도 바울은 질문합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입니다. 그러면서 “선비가 어디 있느냐”입니다.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결국 세상의 지혜는 미련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십자가의 도를 생각하도록 하십니다. 위에서 선비는 누구를 의미하느냐는 분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성경이 번역될 때 선비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바울이 말한 선비는 서기관 또는 율법을 가르치는 자를 의미합니다. 하여튼, 세상의 지혜와 선비 그리고 변론가를 생각해 보도록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말한 것을 생각하면 분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도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는 한 몸이라고 하지만 세상의 기업과 같다고 말합니다. 이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분쟁이 있어도 전쟁이 있는 지역이라도 하나님께서는 알곡인 성도를 구원하십니다. 신분이 높고 낮음에 있지 않습니다. 부자이든 가난한 자든 신분과 관계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택에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기쁨이요 구원의 희망입니다. 사람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분쟁이 없습니다. 21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입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이 세상의 지혜와 역설적입니다. 세상의 지혜를 초월하는 능력이 누구입니까? 당연히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구원은 복음을 듣게 하심으로 구원하십니다. 전도는 십자가의 도가 무엇인지 알도록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에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사역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십자가의 도를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메시지 때문입니다. 그 메시지는 십자가의 도 즉 전도의 미련한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련한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의 도를 믿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있지습니다. 가라지는 세상의 권력과 능력을 좋아하기 때문에 십자가의 도를 믿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무엇을 구한다고 하십니까? 22절을 보시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입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한다고 합니다. 유대인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임을 자랑하며 오실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면서 오실 메시야를 찾기 위해 표적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왜 표적에 관심을 가져야 했던 것입니까? 사람은 표적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메시야라면 자신들이 원하는 표적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표적을 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타락한 본 모습입니다. 유대인의 마음을 잘 알고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적을 말한 것입니까? 요나의 표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드러내는 것이며 또한 십자가에서 죽을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그렇다 하더라도 헬라인 즉 이방인은 표적보다 지혜를 찾습니다. 오늘날에도 표적보다 지혜를 통해 신을 찾고자 합니다. 철학도 신을 알려는 방법입니다. 오히려 지혜는 신을 알지 못하도록 하는 참 놀랍습니다. 사람은 과학과 지혜를 통해 성장해 왔습니다. 만물의 근원을 성경으로 알지 못하고 멀어지면서 다른 것으로 찾고자 합니다. 그래서 진화론을 통해 만물의 근원을 찾고자 합니다. 이것이 타락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성경이 아닌 인생의 문제를 지혜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사람의 됨됨이 보다 사람의 능력에 따라 채용합니다. 교회도 이와 같지 않습니까? 외모와 능력 그리고 지혜 등을 통해 저 사람이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는가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런 것들은 마귀가 좋아합니다. 교회를 무너지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도 지혜를 따라가다 보니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무엇인지 알도록 함으로 교회가 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합니다. 23절을 보시면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십자가의 도를 알도록 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전함으로 구원의 역사는 마지막 심판 때까지 지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 사도 바울처럼 유대인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유대인은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어떻게 구원자가 될 수 있는가입니다. 이와 반대로 헬라인 즉 이방인은 십자가에 죽은 자는 가장 비참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구원과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치욕을 당하셨지만, 오히려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십자가는 미련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있는 교회는 구원의 감격이 있는 영광입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도를 알고 있는 성도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인해 십자가의 도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있습니다. 24절을 보시면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믿습니다.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십자가의 도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도를 믿을 수 있도록 능력과 지혜를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과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를 죽였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강력한 부르심으로 인해 오히려 십자가의 도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성도에게 성경을 통해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람이 원하는 보이는 표적이 아닌 말씀을 통해 알도록 하신 신비입니다.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의 사람은 성경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말씀을 특별하게 주셨는가를 생각하며 자신은 죄인이라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분쟁이 없으며 십자가의 도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교회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과거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교만과 욕망이 가득하여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사람의 능력과 지혜를 통해 신을 알고자 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지혜와 능력으로 과학은 발전했지만, 오히려 사람이 사람다운 삶은 과연 어떠합니까? 세월이 지날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지 않으며 사람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고린도 교회도 자신들의 언변과 지혜가 최고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망각하고 세상 사람이 생각하는 언변과 지식의 삶을 생활함으로 결국 교회는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아볼로 등에게 받았다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사도 바울은 25절에서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역설적이며 과장법을 사용하면서 사람의 어리석음을 알도록 하시며 권면하셨습니다. 세상은 신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미련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신처럼 되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미련한 방법으로 당신님이 누구신가를 알도록 하십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이 어떻게 구원자인가 생각합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대속하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어리석게 죽은 예수님이 어떻게 구원자인가?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어리석은 마음입니다. 고린도 교회도 성장하면서 사람의 지혜와 능력과 이성 등으로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교회를 향해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역설적으로 강하게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도와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능력과 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에 능력과 지혜가 있습니다. 그러니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팡이 교회도 과거 세상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무시하며 생활했습니다.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통해 성공하고자 하는 삶을 좋아했습니다. 복음을 들어도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통해 십자가의 도를 알도록 하셨습니다.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도록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며 십자가의 도를 알았습니다. 사람의 지혜와 능력과 언변 등으로 알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해서 주일을 잘 지켜서 헌금을 많이 해서 봉사의 섬김을 하다 보니 하나님께서 너는 선행을 했으니 십자가의 도를 알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낮아지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회개하고 낮아지도록 하셨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사람은 십자가의 도를 알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받아들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께서 낮아짐을 통해 역설적으로 승리라는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참으로 신비롭지 않습니까? 우리도 예수님께서 낮아지지 아니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처럼 분쟁이 일어날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과거나 오늘이나 교회는 일부 교회는 분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시대라 할지라도 참된 교회는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럴 때 분쟁이 있는 교회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은혜 주실 것을 믿으며 전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교회 안의 가라지는 자신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구원해 주실 것을 믿으며 성경을 전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와 하나님을 믿는 교회는 참된 신앙고백을 하면 나는 죄인임을 아는 성도입니다.

 

교회 안에서 알곡과 가라지는 구별됩니다. 사람의 눈을 속일지언정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가라지는 자신 능력과 지혜를 믿으며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그와 반대로 알곡은 믿음의 조상들처럼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며 영적 섬김의 생활을 하는 예배를 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십자가의 도를 믿는 교회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교회입니까? 지팡이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성도이며 십자가의 도를 알며 주의 길을 가는 나그네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미련한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는가를 늘 생각할 때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알아가며 참된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고 죽는 일을 통해 높아지는 것은 신비로우며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것을 알도록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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