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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고전2:1-5
강설날짜 2023-05-07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1rekHZzhfhQ

사도 바울이 무엇을 전하기를 원했는가?(고전2:1-5)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신앙생활 할 때 이 세상의 부귀영화와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주님만 외치지만, 우리의 모습을 보면 현실을 바라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하지만 우리는 어떠합니까? 그럴 때마다 주님께서는 은혜를 주시며 인도하십니다. 말씀을 통해 은혜를 주시며 흔들렸던 나에게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되돌려 놓습니다. 세상의 멍에에서 자유롭게 하시며 짐을 가볍게 하십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세상의 짐과 주님의 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짐은 멍에를 메도록 하지만 주님의 짐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짐이 무겁더라고 주님께서는 멍에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는 멍에가 쉽고 짐이 가볍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믿기 때문에 이 세상의 멍에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님이 누구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잠시 원문의 첫 시작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이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하실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멍에를 메고 내게서 배우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입니다. 첫 시작은 “내 멍에를 메고”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면 메고 배우라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당연히 주님의 멍에이며 주님의 말씀 아니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멍에를 메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멍에 그러면 무거운 짐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교회인 우리에게 당신님의 멍에를 지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을 하실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의 멍에도 힘든 데 왜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멍에를 지라고 하는 것입니까? 더 무거운 짐을 지라는 것입니까? 그 해답을 알기 위해 우리는 다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입니다. 주님의 멍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해 보십시오.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 성도를 의미합니다. 멍에는 혼자 질 때 무겁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함께하실 때 멍에는 가볍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쉽게 이해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멍에는 혼자 지는 짐이 아닙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멍에는 두 사람이 그리고 짐승이 함께 지는 짐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께 우리의 삶을 의지하는 성도는 주님의 멍에로 인하여 짐이 가볍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은혜를 주십니다.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함께 멍에를 지십니다. 지팡이 교회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따르는 성도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멍에의 짐을 주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삶으로 영적 섬김을 하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 지팡이 교회는 두 주에 걸쳐 “십자가의 도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교회란?” 무엇인가를 강설로 들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자랑합니다. 죄로 타락했기 때문에 자랑하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다 하더라도 성도는 무엇이 자랑입니까?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십자가의 도와 하나님의 능력 아니겠습니까? 교회는 십자가의 도와 하나님의 능력을 알기에 세상 사람들에게 자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을 자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는가 안 믿는가에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에게 십자가는 미련합니다. 그래서 한때 사도 바울도 십자가를 따르는 자들을 죽이는 자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오히려 십자가를 따르는 성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외적인 조건이 없습니다. 사람이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교회인 우리 즉 미련한 것들을 택하심으로 오히려 세상에서 지혜롭다고 하며 자랑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그러니 교회는 “주 안에서” 오직 주님만 자랑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런 분들이 있습니다. 유대인처럼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처럼 지혜를 구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님의 멍에를 메라고 하셨는데 오히려 유대인과 헬라인처럼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결국 걸림돌이요 어리석음입니다. 표적과 지혜는 걸림돌이며 어리석음으로 결국 사망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십자가의 능력과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하게 전할 수 있도록 주님의 멍에를 메고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타락한 자들이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시며 교회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며 십자가의 도와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가를 말씀으로 가르쳐 주시며 교회를 세워가십니다. 구속함을 받은 지팡이 교회는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사도 바울이 무엇을 전하기를 원했는가?”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로 인해 말과 지혜를 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은사를 자신의 것으로 생각함으로 세상 사람들처럼 말과 지혜로 자신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말과 지혜가 아니라 복음으로 구원하시며 십자가의 도와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나를 자랑하지 아니하며 십자가의 도와 하나님의 능력을 주 안에서 자랑합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와 하나님의 능력을 알기에 1절에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입니다. 고린도 교회와 오늘날 우리에게 잘난 척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과 지혜 등으로 잘난 척 자랑하면 결국 고린도 교회처럼 될 수 있습니다. 분쟁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나와 같은 한 몸 공동체요 형제이며 교회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지역에서 생활하는 형제들에게 복음을 증거 할 때 무엇을 했는지 생각해 보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말과 지혜를 자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전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복음이 심어지도록 하셨습니다. 반대로 세상 사람들은 아름다운 말과 지혜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가를 드러내기를 좋아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말과 지혜로 자랑하며 복음을 자신들이 만들어 낸 것으로 자랑했습니다. 오늘날 일부 교회도 카리스마적인 말과 지혜로 복음을 전하지만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총동원 주일에는 화려한 예배당으로 꾸미며 사람이 교회의 주인공처럼 만듭니다. 과연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복음입니까? 화려한 예배당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알기에 말과 지혜로 자신을 자랑하지 아니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은 십자가의 도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죄로 타락한 세상에는 사람들이 거짓으로 만들어 놓은 종교가 많습니다. 교회라고 하면서 자신이 신이라고 하는 가짜 기독교도 있습니다. 그런 자들이 전하는 거짓 복음에 넘어갑니다. 화려한 예배당 그리고 유창한 말과 지혜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리도록 합니다. 그런 자들은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고자 합니다. 세력을 확장하기 좋아하는 자들은 사람을 유혹하는 설득력이 있습니다. 교주를 믿도록 하는 말과 지혜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자신을 자랑하는 유창한 말과 지혜가 아니었습니다. 가진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십자가의 도와 하나님의 능력을 전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능력이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2절을 보시면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입니다.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전할 때 복음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능력을 알기에 자신이 믿었던 자랑거리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이런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지역만이 아니라 어느 장소가 되었든 오직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화목 제물이 되어주셨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 복음을 믿도록 하십니다. 사람이 복음을 믿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유사 종교는 사람이 사람을 믿도록 합니다. 이것이 유사 종교와 다른 것입니다.

 

지금까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자랑한 것이 없다고 하는 사도 바울은 3절에서 주제를 전환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처음으로 고린도 지역에 갔을 때 주체할 수 없는 약함과 두려움으로 심히 떨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오해하실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와 같은 연약한 사람이기에 육체의 허약함과 약함이 있다는 것입니까? 그러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이 말한 의미는 육체가 아닌 마음입니다. 심적으로 어려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보다 먼저 아덴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유창한 말과 지혜를 통한 결과는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고린도 지역에 도착해서 복음을 전하고자 할 때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아덴에서 알게 된 사도 바울은 오직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고린도 지역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어떠한 모습으로 복음을 전했는가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과거의 사역이 기억될 수 있도록 3절에서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지역에서 교회가 세워질 수 있도록 사도 바울은 마음이 연약한 가운데 의지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더욱 자신의 학벌과 능력을 믿는 것입니까? 아니면 고린도 사람들처럼 말과 지혜를 믿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부모와 친구를 믿습니까? 이런 것으로 교회를 세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교회는 세상의 것으로 세울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특별한 기관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필요합니다. 복음으로 교회가 세워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받을 수 없는 사랑을 예수님에게서 받은 우리가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이 세상의 것을 배설물로 생각하며 주의 길을 가야 합니다. 좋은 학교와 좋은 직장, 노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내 안에 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열심히 생활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우리가 흔히 말하는 투 잡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의 욕망에 사로 잡히지 아니하며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일을 감당하며 십자가의 도를 전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믿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성령께서 하실 것을 믿고 맡겨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사역은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며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이 해야 할 순종입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와 하나님의 능력을 알기에 4절에서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말과 지혜로 교회가 든든히 세워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교회는 세상의 말과 지혜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가짜로 믿는 자들은 자신을 자랑하며 유사 종교를 만들어 냅니다. 이런 시대에 교회는 복음의 변질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며 십자가의 도를 전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전하는 복음이 변질하면 교회도 어려움이 생깁니다. 마치 고린도 교회처럼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논리로 복음을 전한다면 마치 고린도 교회처럼 자기 말과 지혜를 믿는 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까? 사도 바울처럼 해야 합니다. 오직 십자가의 도 즉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밝히 드러내심으로 우리와 같은 신앙인이 되도록 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신앙인이 되었는가를 세상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도를 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자신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은 사람을 자랑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사람의 어떠한 수단에 의지하지 않고 성령께서 교회를 통해 진리를 전하도록 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합니다. 참된 교회는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합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있기 때문에 성령께서 복음이 심어질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러니 살아 있는 교회는 주 안에 머물러 있는 성도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주 안에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성도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5절에서 자신이 왜 지혜로 된 말을 사용하지 않았는지 고린도 교회에 말씀하십니다. 고린도 교회는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 말과 지혜로 서로 논쟁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니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말씀을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사람의 말과 지혜를 자랑하는 유사 종교에 빠집니다. 유사 종교는 교회를 무너지도록 하며 가족에게도 슬픔을 줍니다. 이런 시대에 교회는 사도 바울처럼 주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가를 복음으로 전해야 합니다. 믿음의 근거는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입니다. 그러니 고린도 교회처럼 논쟁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이런 교회를 위해 사도 바울은 최선을 다해 교회가 무너지지 않도록 하십니다. 이런 사도 바울이 있기에 우리는 고린도 전서를 통해 믿음이 무엇인가?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팡이 교회는 사도 바울이 무엇을 전하기를 원했는가를 바르게 아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믿음에 근거한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기관으로서 몸과 영혼이 부활함으로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천상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날을 소망하며 주의 길을 가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이 세운 장소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창조하신 세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주신 말씀의 첫 시작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사람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주 안에서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선행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가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노력으로 주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사람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속으로 가지만,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해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영광의 나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알기 때문에 자기 말과 지혜로 복음을 전하지 않고 주 안에서 십자가의 도와 하나님의 능력을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심어질 수 있도록 헌신한 제자였습니다. 그러니 지팡이 교회는 사도 바울이 무엇을 전하기를 원했는가를 바르게 알기를 소망합니다. 그럴 때 사이비와 이단 그리고 유사 종교에 유혹되지 아니하며 주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누리며 나를 통해 성령께서 복음이 심어질 수 있도록 하신 것을 믿으며 십자가의 도를 전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를 때 사람을 죽이는 병기였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안 후 사도 바울은 자신을 자랑하지 아니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질 수 있도록 사역하는 일꾼이요 사도였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병기에서 이제는 사람을 살리는 병기가 되어 교회를 세우는 성도였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가야 할 방향입니다. 사도 바울이 무엇을 전하기를 원했는가를 아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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