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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고전3:1-9
강설날짜 2023-06-04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oawZWWv9UU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입니까?(고전3:1-9)

 

그리스도인이 좋아하는 찬송가 중에 “나의 영원하신 기업”이 있습니다. 잠시 “나의 영원하신 기업”에 대한 생각을 해 보면 좋겠습니다. 찬송가의 의미를 알고 부르면 더 큰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는 “나의 영원하신 기업”이 좋기에 “생명보다 귀하다”라고 고백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찬송가를 부르는 우리는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동행하여 주시지 않으면 나그네와 같은 삶에서 지치고 낙담함으로 다시 과거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따라가는 기업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유산을 받은 기업입니다. 이 세상의 기업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기업은 상속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존재 즉 교회를 의미합니다. 우리말로 번역된 기업의 뜻은 유산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일부 신자들은 삼성 그리고 엘지와 같은 기업으로 오해합니다. 이 세상에서 축복받으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이 없도록 기업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은 유산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이미와 아직”의 관계에서 영적 섬김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세상의 기업과 하나님 나라의 기업은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유산으로 상속받은 교회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신앙생활 하느냐에 따라 알곡과 가라지로 구별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교회는 알곡입니다. 반대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않았음에도 알곡처럼 생활하지만, 마지막 심판대에서는 속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지팡이 교회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동행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우리는 주님과 동행하며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입니다. 가라지는 풍요를 누리며 잘 먹고 잘살고 평화로운 삶을 좋아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가라지와 같은 삶을 따라가야 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는 대로 삶을 생활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서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것을 사용하며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이런 삶이 하나님 나라를 유산으로 상속받은 기업으로서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입니다. 지금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은 교회로써 맛보기 생활하지만, 주님께서 재림하신 후에는 온전한 기업으로 영광된 삶을 생활합니다. 그때를 바라보며 주님과 동행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지난주 “성령의 역사와 임재를 전하는 바울”을 강설로 들었습니다. 제가 요약한 내용을 들으며 다시 기억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기록한 고린도전서를 통해 교회로서 주의 길을 가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죄로 타락한 사람에게 성령의 역사와 임재는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성령께서 하지 않으면 죄로 타락한 사람은 하나님을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을 알도록 하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이 무엇인가를 알도록 하십니다. 성령은 온전한 진리를 알 수 있도록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십니다. 그러니 고린도 교회는 여러 가지의 문제로 분쟁하지 말고 은혜받은 것을 생각하며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을 통해 돌이켜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 없이 영원한 삶을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사람은 복음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삶으로 영적 섬김의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복음을 듣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주의 길을 가는 존재입니다. 성령의 역사와 임재를 통해 우리는 교회로서 존재합니다. 성령은 교회로서 존재하는 우리와 동행하시며 영적인 일을 분별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면서 아직도 복음을 모르는 자들을 위해 지상명령을 감당하도록 하시며 진실한 사역의 길을 가는 일꾼이 되도록 하십니다. 그런데도 육에 속한 사람은 육에 대해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팡이 교회는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받은 성도이기에 영적인 것을 분별하며 주의 길을 갑니다. 그러면서 등대와 같은 존재로 사람을 구원하는 일을 감당합니다. 왜 구원하는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시며 임재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고린도 교회의 여러 가지 분쟁 중 또 다른 것을 알아가겠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같은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파당입니다. 파당으로 인해 교회는 하나의 공동체에서 둘 또는 셋 그 이상의 파당 때문에 분쟁하기도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존재하는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주님의 때까지 온전하지 못함으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 알곡과 가라지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럴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전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동역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분쟁하면 안 됩니다. 교회를 위한 마음이 있다면 분쟁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복음을 위한 삶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며 교회가 바른길로 갈 수 있도록 헌신한 삶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도 바울은 1절의 첫 시작을 “형제들아”라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를 향해 “형제들아”라고 하면서 너희들의 신앙은 성장하지 않고 정체되어 있음을 알도록 합니다. 왜 그런지 1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라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성장하던 중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형제들아”라고 하면서 “육신에 속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육신에 속한 자”를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어린 아이들”이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인이라고 하지만 세상을 따라가는 가라지입니다. 성령의 역사와 임재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화려한 언어와 지혜를 자랑합니다. 교회는 자신의 지혜 등을 자랑하면 안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한 삶이 될 수 있도록 생활하는 존재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도록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의 수준에 맞게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2절에서 고린도 교회를 위해 밥을 먹이지 않고 젖으로 먹였다고 합니다. 우리말 번역은 밥이지만 원문은 고기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기록한 이유가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영적으로 미성숙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높은 수준의 말씀보다 이해할 수 있는 복음으로 전하며 성장하도록 했습니다. 젖을 먹는 아기에게 고기를 먹일 수 없는 것처럼 신앙의 수준에 맞게 고린도 교회를 양육했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역했을 때는 성장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떠났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월이 지나면서 여러 가지 문제로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으며 성장해야 했지만 고린도 교회는 세상의 지혜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2절을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말씀으로 양육 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젖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젖으로 고기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고기로 즉 그 사람의 수준에 따라 양육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열심과 열정을 다 했지만, 고린도 교회의 현실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3절을 보시면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라고 하셨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고린도 교회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라는 책망을 듣고 있습니다. 좋은 말씀을 들어야 함에도 좋은 영양을 섭취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교회를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서로의 은사를 부러워하며 세상의 지혜를 따라갔습니다. 시기와 질투 등으로 인해 서로가 경쟁의 대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속담에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처럼 고린도 교회도 같았습니다. 하나의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더 중요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안에서 파당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면서 서로 시기와 분쟁으로 인해 교회는 육신에 속한 자에 머물렀습니다. 파당은 교회를 분열되도록 하는 지름길입니다. 십자가의 도와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마귀가 좋아하는 일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따라가는 삶입니다. 반대로 마귀는 세상의 원리를 이용해 자신을 따르게 하는 삶을 살도록 합니다. 그리니 지팡이 교회는 정신을 바짝 차리면서 주의 길을 가야 하는 나그네와 같은 삶입니다. 나그네와 같은 삶 속에서 주님께서 동행하여 주십니다. 그러니 오직 주만 바라보는 해바라기와 같은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가지 문제 중에 오늘 말씀에서도 파당에 관해 이야기하십니다. 4절을 보시면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라고 하셨습니다. 신자들은 파당을 만들면서 서로가 자랑합니다. 우리는 아볼로가 최고다, 아니다 우리는 바울이 최고라고 생각하며 파당을 만들어 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하나의 공동체라는 것을 상실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기와 질투로 인해 다른 견해를 가진 신자들과 석이기를 거부했습니다. 세상의 지혜를 따라가며 세상의 잣대로 파당을 만들며 자신들이 생각하는 스승을 좋아했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구체적인 예를 들며 고린도 교회가 바른길로 갈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볼로 등을 예로 드는 이유가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파당을 만들어 자신들이 하는 행동이 하나님의 일을 잘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아볼로를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너희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잘못되었다는 것을 가르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 고린도 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로 분쟁하면서도 복음을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보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스승을 따라가는 파당입니다. 시기와 질투로 인해 파당을 만드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행동 방식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에게 있어서 파당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아볼로를 좋아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좋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서로가 존중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역이 될 수 있도록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꾼은 하나님께서 주신 힘대로 사역하는 성도입니다. 아볼로도 하나님의 종이며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종이며 고린도 교회도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누구나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볼로에게 주신 은사가 있고, 사도 바울에게 주신 은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필요한 은사를 주십니다. 그러니 성도는 자신의 은사를 가지고 섬겨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서로 협력하여 하나의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은사는 내 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5절에서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한계가 있습니다. 세상의 학문과 지혜도 한계가 있습니다. 아볼로도 한계가 있으며 사도 바울도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한계가 없으시며 지존하신 유일신입니다. 유일신인 하나님께서 사역자를 세우시면서 교회를 세워가십니다. 우리는 둘 다 하나님 나라의 사역자요 일꾼입니다. 그러니 파당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역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사보다 순종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며 사람을 따라갔습니다. 사람을 하나님보다 좋아하는 것은 육에 속한 자입니다. 교회는 육에 속한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팡이 교회는 아볼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교회를 세워가셨습니다. 그리함으로 오늘날 우리는 믿음의 선배님들께서 보여주신 믿음을 따라 하나님께 순종하며 주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선배님들처럼 세상의 지혜를 따라가지 않으며 하나의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위해 6절에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심었고 아불로는 물을 주었다고 하셨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 모든 것이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아볼로 자신을 위한 것입니까? 사도 바울을 위한 것입니까? 우리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사역했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성장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일꾼을 통해 믿음을 심는 것이요 자랄 수 있도록 물을 주십니다. 심는 자와 물을 주는 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꾼입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의 지혜를 따르며 자신을 높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순종입니다. 사역자가 아무리 사역을 잘해도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셔야 합니다. 그러니 교회는 힘들더라도 겸손한 마음으로 영적 섬김의 예배를 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필요한 힘과 능력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면서 일꾼인 성도와 동행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6절에 관한 이야기를 7절에서 심는 자와 물을 주는 자는 아무것도 아님을 확신시킵니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라나지 않도록 하시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좋은 것을 심고 좋은 물을 주어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하여 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사람이 최고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성도의 눈에는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만 보입니다. 그렇지 않고 세상의 학문을 따라가는 자들은 육신에 속한 자입니다. 아볼로라 할지라도 사도 바울이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손에 잡힌 바 된 도구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손에 잡힌 도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값없이 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일 한 대로 자기의 상을 주십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을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농사를 지을 때 하는 일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심기도 하고 물을 주기도 하고, 잡초를 제거하기도 합니다. 그 외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이런 일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자신이 중요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농사를 짓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곡식을 거둘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쓰이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심는 은사가 있을 것이고, 물을 주는 은사가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니 서로 분쟁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협력해야 합니다. 그러니 지팡이 교회는 하나님의 동역자로 생활해야 합니다. 나를 위한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상을 주십니다. 이 상에 대한 것은 마무리할 때 전하겠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9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왜 반복해야 했던 것입니까? 모든 행위와 주체자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는 동역자들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행함에 있어서 ‘함께 일하는 교회임을 명심하라’입니다. 8절에서 농부로 비유했다면 9절에서는 건축에 비유합니다. 건축할 때 중요한 것은 터와 상부 구조가 중요합니다. 서로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는 건축가이시며 우리는 사역을 위한 부르심에 따르는 일꾼입니다. 건축할 때 혼자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서로 협력하여 일할 때 좋은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도 협력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때 지상명령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지혜로운 건축자가 될 수 있도록 자신이 어떤 일을 감당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사용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들입니다. 교회에서 누가 최고야라는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럴 때 고린도 교회처럼 파당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리고 십자가 앞에 나 자신을 자랑할 것이 있습니까?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눅9:23절에서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말씀의 강설을 듣는 것은 중요합니다. 말씀을 들음으로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내 힘이 아닌 주님과 동행함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동역자인 우리를 인도하시며 보호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동행하심으로 마지막 날에 상을 주십니다. 8절에서 말한 대로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주십니다. 그러면 이렇게 오해할 것 같습니다. 운동선수와 같은 금, 은, 동으로 생각할 것 같습니다. 이것이 아니라 구원이 상입니다. 영생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상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신분에 따라 금, 은, 동이 없습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서로 협력하여 농부와 건축가처럼 일을 감당했기 때문에 구원의 상을 받습니다. 구원의 상도 우리는 자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감사만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찬송가가 있습니다. “면류관 벗어서 주 앞에 드리세”입니다. 구원의 영광도 주님께 영광입니다. 단지 교회는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동역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심기도 하고 물을 주기도 합니다. 결국 자라게 하시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고린도 교회처럼 파당을 만들 수 없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여러 가지 도구로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하나님의 동역자인 교회는 매일 매일 자기를 쳐서 십자가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온전한 교회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것을 늘 기억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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