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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딤후3:16-17
강설날짜 2017-11-1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시작하며

 

1517년 10월 31일 종교개혁을 한 후 오백년이 되었지만, 어떤 분들은 지금이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한 시대라고 합니다. 이런 때에 지팡이교회는 종교개혁의 산물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벨기에 신앙고백서를 배운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제는 웨스트민스터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마음은 좋습니다. 그냥 배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고백을 통해서 주의 길을 잘 가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이든, 그리스도인이든 인류의 혁명 중에 가장 큰 것은 무엇입니까? 라고 하면 대체적으로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쳐 영국에서 처음 시작된 급격한 산업생산력의 증대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속한 사람이든, 그리스도이든 왜 종교개혁이 중요한지를 모르고 예수님만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왜 믿음의 선배님들이 신앙고백의 유산을 남기어 주었는지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선배님들의 종교개혁이 있었기 때문에 성경을 알 수 있는 것이고, 참된 예배를 할 수 있는 것이라 믿습니다.

 

종교개혁은 아주 간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관계 되어있고, 유럽 전체를 뒤흔들렸습니다. 종교개혁은 그냥 개혁이 아니라 사람의 목숨으로 이루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된 믿음의 고백을 한다는 것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배운 벨기에 신앙고백서의 저자인 귀도 드 브레도 결국 순교를 당한 것처럼, 많은 믿음의 선배님들이 개혁에 동참함으로 고문과 순교로 일구어낸 것입니다. 그러면 왜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까? 그냥 카톨릭 안에서 믿음의 생활을 하면 생명에 위협을 당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중세교회의 시대적인 배경을 아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한 번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아마도 초대교회라는 말은 들어 보았습니까? 초대교회는 1세기부터 4세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때에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도들과 속사도 그리고 교부들에 의해서 복음이 건전하게 증거 된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암흑기라고 칭하는 중세교회입니다. 그 시대를 4세기(?)로부터 16세기 또는 17세기까지로 즉 교회의 타락이 극에 달했던 시대였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부터는 종교개혁시대의 교회라고 칭할 수 있습니다.

 

왜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까? 초대교회는 주님이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며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을 하는 시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교회는 점점 더 청치권력을 누리기 시작을 합니다. 그로인하여 성직자의 사생활이 문란하게 되고, 성직 매매, 부자들의 향락의 생활, 가난한 자에 대한 멸시, 성직자의 부의 축적이 있었습니다. 또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면죄부의 판매와 마녀사냥을 통해서 자신들의 권력을 누리고자 하는 시대였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저는 “공로사상”이라고 봅니다. 공로사상에 의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믿음과 행위가 있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면죄부도 사야하고, 나의 공로에 의해서 연옥에 있는 나의 가족이 더 좋은 장소로 이동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이렇게 가르친 것이 누구입니까? 성직자였습니다. 우리는 이들에 대해서 ‘사제’라고 표현을 합니다. 이들이 하는 일들은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에서 다리를 연결해주는 자들로 생각한 것입니다. 나의 소원을 하나님에께 부탁하는 존재로, 하나님의 뜻을 신자들에게 대신 전달해 주는 존재로 생각한 것입니다. 사제의 역할을 중요시하다보니 결국은 정치권력을 누림으로 성직을 매매하고, 세상의 정치와 유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공로사상을 더욱 의존하게 함으로 사제의 역할은 아주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공로사상을 이용하여 “면벌부”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남은 벌을 사면해 주는 증명서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또한 교황의 서명이 적힌 면죄부를 교황의 대리자들이 판매를 할 때, 다음과 같은 문구를 들었습니다. “면벌부 판매대의 돈 통에 동전이 짤랑 떨어지는 순간, 연옥에 있던 영혼이 훌쩍 올라갑니다.” 참으로 가슴이 아픈 교회의 역사입니다. 성경을 몰랐던 신자들의 입장에서는 면죄부는 더욱 놀라울 정도로 잘 팔렸습니다. 그것만 있으면 연옥에서 더 좋은 곳으로 간다는 이야기에 중세교회는 더욱 타락되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서 멜랑히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믿음은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게 되며 또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선을 행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렇게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결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아니다. 죄의 용서와 의인(義認)이 믿음에 의하여 가능하기 때문이다. 교부 중 암부로시우스는 "우리의 공적없이 믿음으로서만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필립 샤프도 이렇게 말합니다. “신자들의 집단과 구분되는, 그리고 제사와 제단 개념이 따라붙는 특별한 사제직 개념과 유대교와 이교의 기억들과 유추들에서 슬그머니 기독교 교회에 들어온 것들이다”라고 말합니다. 성직자인 사제는 신자들보다 더 거룩하고 높은 신분으로 생각을 하면서 나의 기도를 대신 전달해 주고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 주는 자로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성경에서 “만인제사장”을 이야기 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사제를 의존하였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제의 도움을 받아서 구원을 얻겠다는 것은 “고해성사”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루터는 언어적인 유희를 통해서 사제주의에 대한 일침을 놓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만인제사장”이라는 표현을 하지만 루터는 “만인사제”라고 함으로 많은 개혁을 했지만 그 중에 일부분이기도 합니다. 루터가 사용한 말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모두가 사제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이 말에는 모든 신자들은 즉 성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중보자 되신다는 의미에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중보자가 되심으로 우리는 당신님 안에서 사제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타락할 수 있었던 이유를 저는 성경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제들만 성경을 볼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성경을 바르게 안다는 것은 자신들의 권력이 무너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는 성경을 볼 수 없음으로 바른 믿음을 소유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개혁을 한 것이 종교개혁이었습니다.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개혁가들은 자국의 언어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쉽게 읽을 수 있는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지팡이교회는 이제부터 웨스트민스터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배경을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1541년 제네바 요리문답, 1560년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1561년 벨기에(벨직 또는 네델란드) 신앙고백서, 1563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619년 도르트 신경으로 이런 믿음의 선배님들의 유산에 의해서 1647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만들어 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 우리는 웨스트민스터를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였던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생각해야 합니다. 총회를 해야 했던 이유는 정치와 사회적인 배경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총회에 의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비롯하여, 예배모범, 대요리문답서와 소요리문답서’가 작성이 되었습니다. 어느 신앙고백서이든 시대마다 성경의 가르침에 잘못된 길을 가는 교회를 향해 바른 성경의 진리를 변호하고 그리스도인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우리가 믿는 성경을 증거 하는 것으로, 교회가 당면하는 문제들이나 성도가 생활하는 데서 걸림돌이 되는 문제들을 해결하며 지도해야 할 필요성에 의해서 작성된 것입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는 여러 신앙고백서들 중에서도 독특하게도 정치와 사회적인 배경에 의해서 작성된 것입니다. 당시 영국의 시대적인 배경을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잘 알고 있는 헨리 8세의 이혼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534년 왕비인 캐서린과의 이혼을 요구했던 왕은 카톨릭에 요구를 했지만 거절 당합니다. 그러면서 헨리 8세는 자신이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라고 선포하면서 카톨릭과 단절합니다. 영국 국교회는(잉글랜드 중심) 예배와 성례를 카톨릭적 성경이 포함된 “공동기도서”에 정해진 규정대로 개혁을 하고, 교회 조직도 카톨릭의 주교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는 완전한 개혁을 이루지 못합니다. 단지 교리에서만 어느 정도 개혁적인 모습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반면, 스코틀랜드의 국교회는 1560년 제네바에 망명을 하고 있던 존 낙스가 귀국을 하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청교도 즉 장로교 교회를 탄생하게 됩니다. 그들은 교회의 조직인 총회, 노회, 당회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1578년에는 국가와 교회가 분리 되어야 하는 ‘두 왕국 이론’이라고 불리는 장로교 정치이론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교회와 정부가 서로 영역에 직접적으로 간여할 수 없다는 것으로, 다만, 교회는 정부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통치하지 않는 경우 비판이나 경고를 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다보니 잉글랜드의 교회는 불완전한 교회로 보았고, 자신들이 “가장 잘 개혁된 교회”로 보았습니다.

 

헨리 8세가 사망한 후 엘리자베스 1세(1558-1603)가 통치하는 시대는 정치와 교회가 서로 혼돈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교회적인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다른 누구보다 문예부흥에 특별히 관심이 많았고, 아버지인 헨리 8세의 종교정책을 이어 받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처럼 권력을 남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 다음 가는 영국교회의 지상 최대의 수령은 실로 영국 왕이다" 라는 성명문을 더 이상 읽혀지지 않도록 하면서, 대신 "여왕은 이 나라에서만 최고의 통치자이다"라고 잘 다듬어 사용하였습니다. 최고 통치권이라는 것은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많은 경건한 군주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권력을 의미하는데 불과하며, 즉 교회에 관한 것, 혹은 국가에 관한 것을 불문하고 모든 영역을 다스리고 감독하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엘리자베스 여왕은 선언하였습니다. 하지만 영국 국교회가 인정하는 성공회에 간섭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정치적인 이유로 보호를 하지만 칼빈주의의 영향을 받은 청교들은 핍박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카톨릭과도 좋은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이런 시대적인 상황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이 사망한 후 스코틀랜드 스튜워드 왕가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메리 여왕의 아들인 제임스 6세는 제임스 1세가 되면서 두 나라 즉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가는 서로가 하나가 되면서 정치적으로 합병을 합니다. 스코틀랜드는 청교도 사상을(장로교, 개혁교회) 가진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감독정치(장로정치)를 지향하는 것을 도입할 것과 개혁주의 신학을 보다 많이 수용할 것을 요구 하게 됩니다. 그 동안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억눌린 것에 대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처지들을 잘 알 것이라고 했지만 제임스 1세는 청교도 제도 즉 장로교는 왕권의 강화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거부를 합니다. 1625. 3. 27일 제임스 1세가 사망을 하면서 그의 둘째 아들 찰스 1세가 왕위를 계승합니다. 왕권을 더욱 강화를 하면서 백성들로 하여금 성공회에 출석하도록 합니다. 출석을 하지 아니하면 벌금을 내도록 하기도 하고, 1637년에는 스코틀랜드 성공회의 공예배서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결국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이유로 종교적인 내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전투는 스코틀랜드의 승리로 마무리가 됩니다. 전쟁에 대한 손해배상을 해야 하는 찰스 1세는 부득불 국회를 소집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1640년 유명한 장기 국회가 열리게 됩니다. 영국의회는 왕과 정치 그리고 사회적인 현실과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서 충돌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약 15,000명의 런던 시민들이 왕의 감독정치 폐지를 요구하는 청원을 하원에 제출합니다. 청원의 구체적인 내용을 요약하면 감독정치로 인하여 오류와 무지가 교회에 쉽게 들어오며, 이로 인하여 부패와 남용이 심각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올릴 수 있었던 이유는 전쟁에 승리한 이유로 볼 수 있습니다. 국회에는 장로교들과 왕당파인 감독교회 지지자들 그리고 크롬웰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 교회파들의 세력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다수를 점하는 장로교들은 감독교회와 협력하여 왕을 움직여 장로교 정치를 도입 하고자 신학적인 개혁을 추진하게 됩니다. 국회는 찰스 1세에게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종교회의를 열도록 했지만, 다섯 번 거부를 합니다. 계속되는 거부에 국회는 상원의 동의를 얻어 왕의 승인 없이 웨스트민스터 회의를 개최하도록 했습니다. 의회는 왕의 반대를 무시하고, 6월 12일에 웨스트민스터 총회 소집을 위한 법령을 제정하였습니다. 이 법령은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목적과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명시하였습니다.

 

우선 총회의 구성 목적은 신앙의 순수성을 세우기 위한 것으로써 교회 정치가 완전하게 개혁되어야 하며, 지금의 상태의 교회정치인 감독정치는 악이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교회정치 형태는 성경적이어야 하며, 모든 잘못된 교리를 정화하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교회와 외국의 개혁교회와의 일치의 필요성을 생각 했습니다. 그 총회를 주관하는 총회장으로서 ‘윌리엄 트위세’가 지명되면서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1643년 7월 1일에 열립니다. 박윤선 박사는 “많은 지식을 가진 위대한 칼빈주의 신학자 121명과 경건한 성도인 학자 30명((군주 10명, 하원의원 20명) 즉 모두 151명이 전심전력하여 제정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모일 수 있도록 1642년 2월 12일 많은 논쟁의 끝에 의회는 총회의 구성원들을 성직자가 선택하지 않고 각 주의 기사들과 시민들의 추천을 받아 의회가 직접 선택하는 것으로 결정함으로 모두 151명이 된 것입니다. 대부분 총회에 참석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장로파였다고 합니다. 총회 참석자의 연령은 평균 60대 초반이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회의는 경건한 분위기에서 진행이 되면서,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 문제를 두고는 논란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정치 문제를 두고는 장장 한 달을 두고 논의를 하면서 과연 그러한가에 대한 신중한 검토를 했습니다. 그들은 많은 시간을 기도하기도 하고, 예배도 하고 금식도 하면서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643년에 회집된 웨스트민스터 회의로 만들어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1647년 2월 상원에서 통과되고 같은 해 8월 27일에 스코틀랜드 교회의 신앙고백서로 먼저 채택되었고, 1648년 6월20일에 영국 하원에서도 통과되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왕정복고로 인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영국교회의 신앙고백서로 채택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지만, 미국 장로교회에서 표준문서로 받아들여졌고, 1729년에 채택된 법안에 의해서 목회자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기본적이며 필수적인 신조 가운데 하나로서 건전한 말씀과 기독교적 교리의 체계의 좋은 형태로 인정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해 12월에 독립교회를 이끌어 가는 크롬웰이 군대를 동원해 국회를 점령하게 됩니다. 그로인하여 신앙고백서와 장로교 제도를 영국교회의 것으로 하려던 일들이 상실됩니다. 그리고 영국의 왕이었던 찰스 1세는 1649년에 참수를 당합니다. 장로교회는 감독교회와 연합하여 영국의 교회로 만들려고 노력을 하지만, 크롬웰의 핍박을 받아 많은 사람들이 외국으로 도피를 하였습니다. 찰스 1세가 죽고 그의 아들 찰스 2세가 통치를 했지만 크롬웰이 왕위에 통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1658년 9월 3일 사망하면서 1660년 2월 11일 장기 국회가 다시 개최됩니다. 그로인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다시 채택하고 인쇄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같은 해 장로교 교회 정치를 법으로 제정 하면서 왕정의 복귀를 원하고 지지하였습니다. 하지만 감독교회주의자들이 득세를 하면서 쇠퇴를 하게 됩니다.

 

5년 반 이상의 기간 동안 총 1163의 회의를 하면서 오늘날의 모든 장로교회들이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만들어낸 결과들을 헌법으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특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기존의 모든 신앙고백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한 답변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총회의 유산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희생과 노력의 결과라고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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