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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강설날짜 2022-03-20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K9d4okkPNsQ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요약된 교리를 질문하고 답”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 당시 사람들은 대체로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런 시대에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은 특권층이었습니다. 인쇄술이 발전으로 인해 성경은 자국어로 번역되면서 성경을 알고 싶어 했습니다. 성경을 알고 싶도록 하나님께서 종교개혁자를 통해 성경을 알도록 하셨습니다. 믿음의 선배님들은 성경을 자세히 알 수 있도록 교리를 만들어 알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시대는 어떠합니까? 교회는 유산으로 남기어 준 교리에 대하여 알고 있습니까? 교리는 성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참고서와 같습니다. 그런데도 교리의 부재의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지팡이 교회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통해 성경을 알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문으로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나는 어떻게 답하고 싶습니까? 이것에 대해서 믿음의 선배님들은 어떻게 답했는지 아십니까? 잘 들어보십시오.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완전히 치르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시며,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그러하므로 그의 성령으로 그분은 나에게 영생을 확신시켜 주시고,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즐거이 그리고 신속히 그를 위해 살도록 하십니다.”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은 “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입니다. 답변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 바른 생각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하여 사람의 고백으로 시작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좀 더 알 수 있도록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요리문답은 “당신의 유일한 위로”를 질문하고 있습니다. 첫 시작을 왜 이렇게 해야 하는가에 관한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교리를 만들 때 시대적인 상황이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만들 때 시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럽은 십자군 전쟁이 끝난 후 봉건주의가 붕괴되고 새로운 중산층이 생겨났습니다.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로마 카톨릭이 쇠퇴되고 왕권이 점점 강화되면서 돈이 교황에게 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국가의 재정을 든든히 하고자 함으로 국가는 종교개혁을 지지했습니다. 이로 인해 로마 카톨릭과 국가는 충돌했습니다. 그런 때에 하나님께서는 인쇄술이 발달하도록 하셨습니다. 인쇄술은 정보력이 발달하게 하는 것도 있지만 성경이 번역되도록 함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도록 했습니다. 인쇄술은 무지가 소멸하도록 하는 힘이 있었고 진리의 말씀을 알도록 했습니다.

 

이런 시대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냥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질문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질문에는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이 질문은 복음을 이해하는 기초석이 되도록 했습니다. 이것을 차분한 마음으로 알아가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 때 진정한 위로를 받습니다. 나의 몸과 영혼은 내 소유가 아니라 삼위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것을 알기에 위로받을 수 있는 것이며 삼위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으로 찬송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죄로 인해 비참한 원죄를 성경으로부터 알게 된 성도는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알게 하심으로 존귀와 영광을 받습니다. 우리의 몸과 영혼의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소유권이 있다는 것으로 인해 벌거벗은 나의 수치심과 비참한 마음은 오히려 자유로움을 누립니다. 세상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은혜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은혜의 사랑을 앎으로 우리는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는 이 세상이 말하는 위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만이 진정한 위로요 복입니다.

 

불교에서 이 세상을 표현할 때 고통의 바다와 같다는 의미로 “고해”라합니다. 죄로 비참해진 사람들은 슬픔과 눈물 그리고 역경과 사고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삶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인생은 늘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희노애락”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위안과 위로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늘 행복하지 않은 삶이기에 위로받는 것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세상 속에서 위로받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실한 위로가 있습니다. 이 위로를 요리문답 제1문을 통해 알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은 성공을 통해 위로받기를 원하고 이웃과 친구를 통해 위로받으며 생활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부자와 나사로”를 아실 것이라 믿습니다. 부자는 이 땅의 것으로 위로를 받고자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이 세상에서 데려가심으로 인생의 허무함이 무엇인가를 알도록 하십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위로를 받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에서 위로를 찾고자 하십니까? 거지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먹으며 생활했지만 결국 그는 하나님의 진정한 위로를 받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지만, 나사로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진정한 위로를 알았기 때문에 행복했습니다. 이런 행복의 극치는 죽음을 통해 온전해 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위로이며 몸과 영혼을 구원에 이르도록 합니다. 이것이 위로입니다.

 

사람들은 솔로몬을 부러워합니다. 지혜 하면 대체로 사람들은 솔로몬이 떠 오를 것입니다. 이런 솔로몬에게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가 없다면 불행한 존재가 되었을 것은 당연합니다. 진정한 위로를 아는 솔로몬은 이 세상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해 아래 새것은 없나니”입니다. 솔로몬이 지혜로 인생을 생활하는 가운데 표현한 말씀입니다. 자신의 삶과 백성의 삶을 알았기 때문에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죄로 비참해진 사람에게 진정한 위로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사람의 죄의 고통과 슬픔을 제거해 줄 자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은 원죄가 있기 때문에 온전한 위로와 행복과 기쁨을 줄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인생은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헛되지 않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만이 온전한 위로를 주시는 유일한 신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헛되지 않은 것은 전12:13절을 보시면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입니다. 사람의 본분을 아는 것이 위로입니다.

 

믿음의 선배님들이 유산으로 주신 요리문답을 통해 진정한 위로를 알기를 소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만이 위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요리문답 첫 답변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의 유일한 위로는 내가 나의 것이 아니라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나의 유일한 위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믿음의 선배님들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통찰력입니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때 복음의 핵심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선배님들은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마치 베드로가 고백한 것처럼 믿음의 선배님들도 진정한 위로는 예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알기 때문에 솔로몬이 말한 것처럼 사람의 본분으로 하나님께 영광의 찬양을 올려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셨기 때문에 진정한 위로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주셨기 때문에 나는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비참함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을 무시하며 생활하는 오만한 자입니다. 그 자리에서 떠나야 합니다. 오직 성경 말씀을 알 때 오만한 자리에서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강력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성도님 생사 간에 진정한 위로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의 유일한 위로는 내가 나의 것이 아니라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다”입니다. 우리의 일생은 화살과 같습니다. 그만큼 세월이 빠르게 지나갑니다. 화살과 같은 인생이지만 하나님을 알면 인생은 행복합니다. 나사로와 같은 믿음이 있기 때문에 행복한 위로를 받으며 생활합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성경에서 말하는 부자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대학 졸업장을 통해 위로받기를 원하고, 선한 행위나 업적을 통해 그리고 명예나 권세, 건강 등을 통해 행복한 위로를 받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진정한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허무한 것입니다. 허무하지 아니하며 헛되지 않은 것은 살아서나 죽어서는 유일한 위로를 아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참된 구원자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받으며 구원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진정한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종교개혁가인 마틴 루터는 늘 한결같이 편지 맨 위쪽에 “오직 예수”라고 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는 위로는 없습니다. 몸과 영혼이 부활함으로 우리는 온전한 영생을 누립니다. 그때를 소망하며 주의 길을 간다는 것은 안개가 걷히는 길과 같습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의 유일한 위로는 내가 나의 것이 아니라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다”의 고백에는 신앙고백과 함께 감사와 찬송과 증언이 있습니다. 과거의 삶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감사와 찬송과 증언의 성도임을 고백하는 것이며 신앙생활 하겠다는 표현입니다. 나의 삶을 세상 사람들처럼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람의 본분을 다하겠다는 표현입니다. 나의 유일한 위로는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신앙 고백하며 감사와 찬송과 증언의 삶을 살겠다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일부 신자는 만들어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자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들이 생각하는 대로 만들어진 예수를 통해 행복해지고자 합니다. 이것은 미신을 믿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있으면서 도깨비 방망이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라비안나이트처럼 주문을 외우듯이 하면 다 들어주시는 예수님으로 오해한 것과 같습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의 심장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세상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1:21-23절에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입니다. 만물을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을 더 좋아하며 그것이 행복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며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만들어진 우상들을 통해 자신이 최고가 되고자 합니다. 이런 마음은 행복할 수 없으며 진정한 위로를 얻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을 알 때 위로를 받으며 나사로처럼 행복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이라도 오히려 낙원이 있기 때문에 평안함으로 이 세상에서 마지막 이별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별은 영원한 삶의 몸과 영혼의 부활이 있으며 영생을 누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정신적 행복을 위해 잡신을 만들어 마음의 평안을 누리고자 합니다. 이런 시대에 교회는 썩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함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 위로되는 것인지 아십니까? 나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유권이 예수님에게 있어서 책임져 주십니다. 우리의 일생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만 믿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1:3-4절에서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라고 했습니다. 위로는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알도록 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선배님들은 위로가 무엇인가를 알게 하려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요리문답을 통해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완전히 치르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시며,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십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예배에서도 스스로 하나님 앞에 올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이 없이 불가능합니다. 또한, 성령의 인치심 없이 불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죗값을 지급하여 주심으로 나는 성령의 인도함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나의 죗값을 완전히 치르고 마귀의 권세에서 구출하여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섬김을 통해 나는 위로를 받습니다. 믿음의 선배님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위로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도록 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완전히 치르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시며,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십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구원하여 주신 것으로만 멈추고 계시지 않습니다.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시며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며 구원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는 고백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하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매일매일 나와 동행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온전히 알 수 있습니다. 나를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도하십니다. 이것을 성령께서 당신님의 사역을 통해 예수님의 은혜를 알도록 하시며 참된 위로를 받도록 하십니다. 위로를 받은 성도는 사망의 음침한 길이라도 주님만 바라봅니다. 고후1:20-22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의 확신은 나 스스로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협력하여 선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의 선배님들은 “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에 대한 답으로 “그러하므로 그의 성령으로 그분은 나에게 영생을 확신시켜 주시고,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즐거이 그리고 신속히 그를 위해 살도록 하십니다.”라고 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자발적이고 준비된 삶을 생활하도록 힘을 주십니다. 구원받은 것을 감사하며 가만히 있지 않도록 하십니다. 은혜를 받으면 어떻게 하면 복음을 전할 수 있는가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위로를 나만 누리고자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다른 사람들도 참된 위로를 누릴 수 있도록 합니다. 이런 일을 하도록 성령께서 나에게 영생을 확인시켜 주시고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하십니다. 나의 삶을 통해 복음이 심어지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알기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삶을 생활합니다.

 

선한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공덕을 쌓는다고 구원해주신다면 그 누구도 온전한 공덕을 쌓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카톨릭은 종교개혁 당시에도 성경을 가지고 있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성직자와 일부 사람만이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전유물로 만들었습니다. 그 외 사람이 성경을 가지고 있던지 번역을 하고자 하면 벌금을 물리거나 죽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만 소유하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해야 선행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함으로 카톨릭은 부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이 일어나므로 성경은 자국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를 통해 카톨릭은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도 선행을 통해 나의 구원과 가족의 구원을 이루고자 무거운 짐을 지고 생활하는 존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카톨릭은 구원의 확신이 없기 때문에 성경을 참되게 알려주지 못하면서 선행을 통해 구원을 이루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비밀을 알도록 하십니다. 이제는 공개된 비밀입니다. 이 비밀을 통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십자가의 피 흘리심의 뜻을 아는 성도입니다. 구속의 대가를 알기에 하나님을 섬길 수 있으며 위로를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여 주심으로 생명이 회복되도록 하셨습니다. 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시고 보호하여 주심으로 교회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 아래 있습니다. 세상의 유혹과 마귀의 유혹으로부터 낙망하거나 넘어지지 않도록 하십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삶 속에서 늘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돌리기 위해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에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참된 유일한 무엇인가를 복음으로 전해야 합니다. 참된 성도는 하나님의 위로를 알기에 참을 수 없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니 복음으로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는 것은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겁게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요리문답을 읽으며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이것에 대한 고백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완전히 치르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시며,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그러하므로 그의 성령으로 그분은 나에게 영생을 확신시켜 주시고,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즐거이 그리고 신속히 그를 위해 살도록 하십니다.”입니다. 이것을 늘 기억하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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