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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23:13-24
강설날짜 2017-10-15

지팡이교회는 3주일 전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시다’라는 강설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계속해서 13-24절 말씀을 사용하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시다’라는 말씀을 이어서 강설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당신님의 죽음을 아시면서도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고 오늘 우리에게도 무엇이 바르게 믿는 것인지를 알리신 것이라 믿습니다. 그들은 유대의 종교지도자들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백성에게 잘 전해야 하지만 오히려 무거운 짐을 지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인간 스스로 죄를 깊이 깨닫게 하심으로 진정한 회개를 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보도록 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런 의미를 알지 못했던 종교지도자들은 백성에게 스스로 질 수도 없는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지우도록 한 것입니다.

 

3주 전에 전한 말씀이 기억나도록 하기 위해서 요약된 말씀을 잘 들으십시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의 정체성을 드러내신 후 “무리와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기 위해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직분과 직책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은 회당에 놓여있던 율법을 가르치는 그들의 의자를 이야기 하는 것으로 율법을 가르치는 자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라고 하시면서 율법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은 늘 성경의 말씀에 근거하여 믿고 의지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은 자신을 의지하도록 했습니다. 오직 지팡이교회는 그 어떤 것도 성경 위에 없다는 것을 알고 성경 말씀을 따라서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종교지도자들에 대해서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라고 하시면서 꾸짖으셨습니다. 백성에게는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지도록 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사람의 몸 가운데 가장 연약한 곳이라고 할 있는 손가락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이용하여 그리고 율법을 잘못 해석하면서 백성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면서 정작 그들은 손가락도 사용하지 않는 위선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만 영광을 받아야 하지만 자신들이 영광을 취한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통하여 죄를 회개 하도록 해야 하지만 자신들을 의지하도록 하는 것은 죄중에 죄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하는 위선자라고 5-7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백성과 다르다는 것이 잘 드러나게 함으로 오직 칭찬을 받고자 하는 것은 백성은 속일지언정 하나님을 속일 수 없는 영원한 심판을 받는 자들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당신님의 백성에게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고 하심으로 하나된 신앙공동체라는 것을 인식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특히 9-12절을 보십시오.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10.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11.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예수님은 당신님의 무리와 제자들에게 그들처럼 위선자들이 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는 당신님의 말씀처럼 언제나 ‘섬기는 자’로 복음의 증인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에게 요청되는 자세입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의 잘못을 말씀하신 후 무리와 제자들을 위해서 그리고 당신님의 백성을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성도의 참 모습과 자세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런 후 예수님은 계속하여 오늘 말씀에서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꾸짖’고 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라고 하면서 ‘화 있을진저’라고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화’라의 의미는 큰 고통이나 혹은 심판을 표현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분노로 ‘화’를 사용하면서 임박한 심판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첫 번째로 ‘화’를 선언하시면서 마23장에서는 ‘화 있을진저’를 7번 사용하심으로 그들의 잘못과 죄악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첫 번째 ‘화’에서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입니까? 다시 한 번 읽어 보았으면 합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율법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은 사람들을 천국에 가까이 가게 하는 대신 천국에서 멀어지게 한 거짓된 지도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런 잘못을 하니 ‘화’라는 표현을 하심으로 거룩한 분노와 심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여 위선자처럼 겉으로는 선한 척 하면서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오히려 대적자인 것입니다. 경건한 것 같지만 위선자요 외식하는 자요 선생 노릇은 하지만 가짜라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가짜라는 것입니다.

 

지팡이교회 성도님, 그들의 잘못이 첫 번째 ‘화’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중에 과연 하나님 앞에 위선자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첫 번째 화를 생각하면 말씀을 통하여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어쩌면 적어도 열심과 많은 수고와 노력으로 백성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자들이지만 오늘날의 우리는 어떠합니까? 이럴수록 우리는 눅18:13절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엄중하게 책망하고 꾸짖으신 후 두 번째 ‘화’를 말씀하십니다. 15절의 말씀을 보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율법은 죄를 알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알게 함으로 사람들이 영생의 문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지만 그들은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지옥 자식이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열심과 많은 수고와 노력은 ‘배나 더 지옥의 자식’이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열심히 전도도 하고 선교 활동도 하지만 그들처럼 외식하는 자들이라면 오히려 심판을 당하는 자들로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한 사람 즉 교인을 얻기 위해서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지만 결과적으로 지옥의 자식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전도와 선교는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의도는 전도와 선교 그 자체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오로지 자신들의 모세오경(율법) 외에 전통에 담긴 많은 요구 조건의 무거운 짐 아래 두기 위해서 열심과 노력과 수고로 모으는 방법을 비판 하신 것입니다. 차라리 그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것입니다. 새롭게 입교한 신자는 자신이 하나님을 따르고 있다고 확신을 하지만 실제로는 마귀를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가르침과 종교에 끌어들이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이방인들을 개종시키고자 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힐렐 학파와 가마리엘 학파(사도 바울) 두 개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특히 힐렐 학파는 더 많이 노력했다고 합니다. 요세푸스는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당시에 많은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가르침은 잘못된 것으로 결국 예수님으로부터 ‘지옥 자식’이 되게 한다는 꾸지람을 듣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끊임없이 연구하고 가르치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게 자들입니다. 이런 결과가 있지 않도록 예수님은 책임의 엄중함과 두려움을 알리신 것입니다.

 

이런 경고의 말씀을 들어도 그들은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척하도록 백성을 동요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정죄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을 가장하면서 실제로는 불순종을 전한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세 번째를 화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16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고 하심으로 눈 먼 자가 인도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나라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전으로 맹세한 것은 지키지 아니해도 좋지만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단에 예물을 놓고 맹세를 했으면 꼭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제단으로 맹세하는 것과 그 위에 예물로 맹세하는 것을 구별했습니다. 자신들이 외식하는 것을 제단의 예물을 통하여 잘 드러낸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면 제단에 예물을 놓고 맹세하여 지켜야 하는 것입니까? 과연 그렇습니까?

 

종교지도자들에게 있어서 성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오늘날의 예배당의 의미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전의 의미는 그 안에 있는 재물 즉 예물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맹세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신실하다는 것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열 가지 언약의 말씀’중에서 세 번째로 말씀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하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17절에서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고 하시면서 잘못된 가르침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과거나 오늘 그리고 미래에도 금은 온갖 용도로 사용되지만 그 자체가 거룩한 것은 아닙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금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성전에 사용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전에서 금을 사용하는 것에서 더 중요한 것은 성전의 의미를 일깨워 주는 예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이야기 중에서 외식하는 자들이 좋아하는 금을 사용하여 성전의 의미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성전을 주신 목적도 모르고 오해하는 그들에 대해서 ‘어리석은 맹인들이여’라고 하십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생각해 보아라.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 더 중요한 모태냐 아니면 성전 안에 있는 한 부분인 금이 중요한가를 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가르침의 태도에 대한 것을 ‘화 있을진저’라고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를 예수님은 18절에서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라고 하심으로 누구의 가르침이 올바른가를 생각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오해와 무지를 꾸짖기도 한 것입니다. 무엇이 중요한가를 생각하도록 하신 후 예수님은 19-22절에서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21.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22.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고 하심으로 모든 맹세들이 하나님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하면서 어떤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맹세의 의미를 너희는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마5:33-37) 맹세를 하지 말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시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나를 구원하여 주실 것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들은 백성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을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바른 가치관을 형성하도록 인도하지 아니하고 물질주의로 왜곡된 전통을 강요하는 재물에 눈이 먼 외식주의 자들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재물에 눈이 먼 소경이요 지옥의 문으로 즉 멸망으로 인도하는 영적인 소경들이었습니다.

 

지팡이교회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전의 금과 예물에 관심을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과 의식은 하나님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것을 숨기고 외식하는 자들이 되어서 ‘지옥 자식’이 되게 했습니다.

 

무엇이 중요한지를 모르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무지와 오해 그리고 부수적인 것에 관심이 많은 것을 꾸짖으신 후 예수님은 더 구체적으로 네 번째 ‘화 있을진저’라고 하십니다. 오늘 분문 23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더 중요한 율법을 소홀히 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박하와 회향’은 근채 같은 것으로 텃밭에 심어서 양념으로 쓰거나 약채입니다. 이런 것들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따로 내어 십일조를 내었습니다. 곡식, 나무의 열매, 소나 양 등으로 십일조를 내면서 그들은 더욱 엄격하게 텃밭에서 기르는 채소도 엄격하게 십일조를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백성으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십일조 행위에 대한 것을 책망하고 꾸짖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더 중요한 요구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최선을 다해 노력을 했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바른 삶은 제대로 하지 않는 위선자였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에서 호세아 선지자는 호6:6절에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마9:13절에서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을 보고 지적할 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의미를 잘 알았다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결국 십자가에 못 박은 자가 누구입니까?

 

지팡이교회 성도님, 십일조는 야곱이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드리고 섬기게 된 믿음을 구체적으로 고백하는 행위요 그런 믿음에 대한 표현이었습니다. 또한 나의 나 된 것 자체가 오직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임을 깨달은 후 자신의 것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정신을 이어받아 “헌상”이라는 의미로 하는 것입니다.(헌상에 대한 의미는 김홍전 목사님의 “헌상에 대하여”와 이승구 교수의 “교회란 무엇인가?” 그리고 오광만 교수의 “헌상”를 읽어 보십시오.) 이런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지극히 일부분까지 철저하게 십일조를 했지만 ‘지옥 자식’으로 되게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믿음의 성도는 깊이 인식하면서 충실한 헌상을 하기를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24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가장 작은 곤충과 가장 큰 짐승을 대조하는 과장법으로 맹인된 소경이 바로 너희라는 것입니다. 랍비들은 포도주를 걸러 내어 포도주를 더럽힐 수 있는 작고 불결한 곤충까지도 없애고 마시면서 낙타는 중동 지역에서 가장 큰 짐승으로 부정하다고 레11:4절에서 말씀하지만 먹기도 했습니다. 이런 말씀을 무리와 제자들은 들으면서 아마도 웃음을 참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주 작은 것은 걸러 내면서 아주 큰 불결한 짐승을 먹는 것은 참으로 외식하는 자들을 잘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라고 저주하는 것은 그들의 외식하는 모습 때문입니다. 경건하지도 의롭지도 않으면서 마치 배우가 연기 하듯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중학생 살인 사건처럼 겉으로는 순한 양 같지만 속은 늑대와 같은 자들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참으로 어떻게 보면 종교지도자들을 따르는 유대인들은 불쌍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 의해서 바른 줄 알고 예수님을 못 박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열심과 수고와 열정이 있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들은 지팡이교회 성도는 더 값진 복음의 증인자가 된 것이 바로 행복인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바르게 믿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를 생각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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