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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3:1-10
강설날짜 2018-06-24

두 사도가 성전에 기도하러 갈 때 무슨 사건이?(행3:1-10)

 

지팡이교회는 지난주 강설처럼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한 몸인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초대교회의 신앙생활은 패역한 시대에 큰 영향력이 있었고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르쳐준 것입니다. 오늘날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충실한 교회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행복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희로애락”으로 생활하지만 주님께서 보여주신 부활을 소망하기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 누구나 인생의 종말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참된 소망을 품은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신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성령강림으로 인해 제자들은 새롭게 변화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유지하고자 배신하고 숨었던 그들이지만 이제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복음을 전하는 사명 자가 된 것입니다. 베드로의 강설은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놀라운 반전을 주었습니다. 강설을 들은 사람들은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삼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개종을 하였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순결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면서 최초의 신약 교회의 원형이 탄생하여 나타났습니다. 성령강림으로 인해 이처럼 열매를 맺도록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강설이 급진적이고 역동적인 변화가 있을 때 혼자 감당한 것이 아니라 열두 사도가 함께 하였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혼자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고전12:12절 말씀처럼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하나의 몸된 교회로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성령강림은 성도가 교제를 통해서 거룩한 교회의 거룩한 모습이 무엇이고 교회가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님이 피 값으로 사신 새 언약에 터를 두고 형성된 것입니다.

 

새 언약의 공동체인 지팡이교회는 성경을 통하여 전달된 주의 말씀을 열심히 선포하고 보존하며,교제와 성찬 그리고 기도하기를 힘써야 하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냥 정신없이 모여서 예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 초대교회처럼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기면서 신자들을 인정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교회를 보시면 일부분이지만 어떠합니까? 그들로 인하여 오히려 교회의 이미지는 세상의 종교와 같다는 평을 듣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는 소망을 품으면서 주의 길을 가야 하는 백성입니다.

 

패역한 세대라고 표현하는 성경의 말씀을 생각하면 과거나 현재나 같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반역하고 감히 도전하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주와 그리스도’로 교회 안에서 고백하면서 가짜 신앙으로 반역하는 신자들은 사람을 속일지언정 하나님을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두 사도가 성전에 기도하여 갈 때 무슨 사건” 즉 40여 년 동안 걷지 못하고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를 고치신 사건을 통해 은혜의 물결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앉은뱅이를 고치신 사역은 능력과 기적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효과적으로 증거할 수 있게 해주는 삼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같은 신앙고백을 하면서 지상대명령을 수행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예루살렘 교회의 초기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교회가 가져야 할 요소들을 상세하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은 자신들의 권능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권능이 앉은뱅이를 완전하게 낫게 하였다고 증거한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베드로는 이스라엘이 얼마 전에 행악하였던 죄를 행3:11-26절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14절은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십시오.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저자인 누가는 두 제자가 기도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고 있다고 기록합니다. ‘제 구시’는 우리시간으로 ‘오후3시’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고 초대 교회를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도 계속해서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욱이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은 다른 곳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 것은 성전에 제사하려 간 것이 아닙니다. 평범하게 기도하러 간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 앉은뱅이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2절을 보시면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성전에 들어가는 문은 여러 개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미문’에 앉아 있었습니다. 미문에 대해서 학자들은 아마도 행3:11절에서 “솔로몬의 행각”이 언급되는 것을 보아 이방인의 뜰로 들어오는 동쪽의 문으로 생각합니다. 하여튼 그는 나면서부터 즉 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고칠 수 없는 불가능한 상태였다는 것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날마다 여인의 뜰로 연결되는 성전 미문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구걸이었고,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 3절을 보시면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두 사도의 시선은 자신들에게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본 것입니다. 왜 그는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고 앉아 있어야 했던 것입니까? 누구나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레21:16-18절에 의하면 신체적으로 결함이 있는 사람은 성전에서 제사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가 먹고 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구걸이었을 것입니다. 지인의 도움을 받아 ‘걷지 못하는 자신을 불쌍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유대교에서는 남을 구제하는 일이 매우 큰 덕목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성전에 올라오는 사람들은 구걸하는 자들에게 동전을 던져 줌으로써 하나님의 상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구걸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성전 미문이 동냥 하는 최고의 장소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앉은뱅이가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왜 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한 것 같습니다. 무엇을 구해야 진정한 삶을 얻게 되는지를 알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열려지지 않은 가련한 사람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두 사도들에게 동냥을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 두 사도는 4절에서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두 사도의 눈이 구걸하는 앉은뱅이의 눈과 마주쳤을 때를 상상해 보십시오. 성전 미문에 매일 앉아 있었던 사람은 제사하러 온 많은 사람들을 만났을 것입니다. 그 주에 제사장, 율법 교사, 부자, 유명한 유대교 지도자 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전을 출입하는 많은 사람들은 앉은뱅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앉은뱅이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육체를 위해서 살아야 했기 때문에 구걸이 중요했고, 정상적인 육체의 몸을 지니고 있던 사람들은 영적 무감각이 지배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 고착된 잘못된 관념들에서 그들의 영적 무지 즉 영혼에 관심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앉은뱅이든 아니든 모두 영적인 관심 없이 오직 자신들의 평안을 위해서 성전에 기도하러 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적인 것이 있었다면 예수님을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리어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구걸하는 자에게 ‘우리를 보라’라고 하면서 앉은뱅이에게 동전과 음식을 던져 준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에 그는 5절에서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사도를 보았지만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줄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옷차림만 보아도 얼굴의 모습만 보아도 잘 알았을 것입니다. 두 얼굴을 보면서도 기대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짧은 만남의 순간에 앉은뱅이는 하나님께서 두 사도를 통해 무슨 일을 하시는지 상상도 못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무엇인가 받을 것을 기대하는 앉은뱅이를 향하여 6절에서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는 것입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걸으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먹을 것을 구걸하는 자에게 지금 줄 수 있는 것은 예수님 이름이었습니다. 아마도 베드로의 말을 듣는 순간 희비가 엇갈렸을 것입니다. ‘은과 금은 없다’라고 할 때 아마도 욕을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심장이 두근두근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게 있는 것을 않은뱅이에게 준다’는 말을 듣는 순간 성령께서 희망과 기대를 주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베드로에게는 ‘은과 금’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소액의 금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것은 돈보다 더 중요한 영혼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이었습니다. 지팡이교회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예수님 이름입니다. ‘은과 금’으로 비교할 수 없는 것임을 베드로는 강조함으로 “예수님 이름으로 걸으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한 것처럼 보이지만 누가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비주의를 행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높이 올리고자 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종교입니다. 세상의 종교처럼 하나님은 신자들을 자립할 수 있게 하심으로 이제 하나님 없이 신앙생활 하도록 하는 일꾼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더욱 의지하고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일부분의 사람들은 ’내가‘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으니 나는 사명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면서 ’내가 충성‘한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인 저는 오늘 강설에서 교훈과 권면을 사람의 마음을 이용하는 도구로 쓰면 안 됩니다. 오직 온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여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풀어서 설명해야 합니다. 강설을 들은 신자들은 성경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자 하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서 7-8절에서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라고 기록합니다. 베드로는 그의 손을 잡아 일어서는 것을 도와주었고, 그 과정에서 앉은뱅이는 발과 발목에 힘을 얻은 것입니다. 치유함을 얻은 그는 사도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해 보십시오. 치유함을 얻은 것은 인간으로서 참된 행복의 극치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진행에 반드시 있어야만 할 절대적인 요소냐 하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송명희 시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송명희 시인은 태어날 때부터 중증뇌성마비 환자였습니다. 의사의 부주의로 아기의 뇌를 집게로 잘못 건드려 소뇌를 다쳤습니다. 태어난 아기는 울지도 못하고 몸을 가누지도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통해 복음을 전하시는 놀라움이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앉은뱅이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꿈을 주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앉은뱅이 사건에서 더 중요한 것은 그 일 자체가 굉장한 일이라서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낫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권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어떻게 큰 역할을 했으며 그 결과는 무엇인가를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송명희 시인의 삶에서도 같은 것입니다.

 

사도들을 통해 치료받은 앉은뱅이는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였습니다. 은혜 받은 자의 가장 합당한 태도입니다. 이 모든 모습을 보았던 사람들은 9-10절에서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이 앉은뱅이가 거기에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섭리로 쓰심으로 그 곳에 있던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린 것입니다. 앉은뱅이였던 자가 걷고 뛰는 모습은 주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온전한 치유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되었던 것입니다. 분명히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임에도 사도들을 통하여 이 같은 신비스러운 일이 발생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결코 인간의 힘으로 말미암아 발 생한 일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는 사도들을 통하여 나타났을 뿐입니다.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과거의 겁쟁이요 배신자가 아닌 것입니다. 나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어떤 마음을 품고 싶습니까?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하여 제자의 수가 삼천 명이나 늘어났으며 베드로의 강설은 교회를 향하여 복음을 가르쳐 든든하게 세워 나갔습니다. 또한 성령의 권능에 따라 기사와 표적 행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이고 확실한 성령의 인도에 따라 앉은뱅이를 고친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임을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함이 있기에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이적을 통하여 거기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사렛 예수님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땅끝까지 왜 ‘증인’이 되라고 하신 예수님의 분부가 어떻게 이루어지며 나가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나가실 때 성령의 권능이 어떻게 그의 제자들을 감화하여 신적 권위를 드러내고 있는가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복음을 증거 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큰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제자들이 좌절하지 않도록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지팡이교회는 주님의 길을 가는 참된 제자로서 세상을 바라보지 마시고 오직 두 제자들과 같은 마음으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전하는 복된 증인이 될 것을 믿으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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