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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12:1:12
강설날짜 2019-03-17

최초의 순교자 사도 야고보와 베드로의 투옥 그리고...(행12:1-12)

 

한국인에게 한국사가 중요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에게도 교회의 역사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역사인 사도행전이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요 성도인 신자들의 변천과 복음사역 등의 과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역사인 사도행전은 오늘날 우리에게 과거의 모습을 통해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사도행전을 강설로 잘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귀로 듣고 마음으로 새기고 삶으로 복음을 증거 하는 지팡이교회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지팡이교회가 교회의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명심해야 합니다. 사람의 가치관은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그러하오니 오직 주님의 마음으로 사도행전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가 되어 지상명령을 잘 감당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초대교회는 스데반의 순교로 여러 지역에 흩어져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에서도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때 놀라운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온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행위와 믿음을 자랑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증거 한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자신을 위한 간증은 복음과 믿음이 아니라 교회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맞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흩어져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최초의 이방인 지역에서 안디옥 교회가 설립된 것입니다. 교회를 내가 세우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됨으로 주님께서 세우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가 세워질 수 있도록 오직 예수님만 증거 해야 합니다.

 

이방인 지역에서 복음을 듣고 신자들이 많이 생긴 것을 예루살렘 교회가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냅니다. 교회가 잘 세워질 수 있도록 “위로의 아들”이라는 바나바는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바나바를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과연 오늘날 바나바와 같은 마음이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안디옥 교회가 성장하면서 바나바는 자신의ㅡ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다소에 있는 사울을 찾아가 안디옥으로 같이 와서 복음을 가르칩니다. 복음을 가르칠 때 세상 사람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함을 듣습니다. 얼마나 기분 좋은 소리입니까? 교회가 스스로 ‘나는 그리스도인이요’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주 안에서 성장하는 가운데 예루살렘으로부터 선지자들이 온 것입니다. 그들이 파송을 받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이 가운데 특히 아가보는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고 한 것입니다. 글라우디오 때에 흉년으로 인하여 안디옥 교회도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을 통해 보낸 것입니다. 구제의 헌금을 보낼 때 그들의 마음으로 자랑한 것이 아니라 봉사의 섬김으로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거룩한 교회의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제자요 사도인 순교자가 나옵니다. 그러면 당연히 베드로 또는 요한이 되어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야고보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완전한 섭리를 다 알 수 없습니다. 누구는 죽음을 당하고 누구는 풀려났던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지혜와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헤롯으로부터 어려움을 당하는 예루살렘 교회를 구원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 승리의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주의 길을 바르게 가기를 소망합니다. 그 동안 우리는 행1장부터 11장까지 사도행전에 대한 전반부에 대한 강설을 들었습니다. 행12장 전반부는 행1장부터 11장의 내용을 마감하기 위한 글이고, 후반부는 행13장부터 28장까지 전개할 내용을 준비하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두 사람이 중요합니다. 행전반부는 베드로의 사역이 중심이었지만 그의 무대가 물러나고, 13장부터는 사도 바울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 회의(행15장)에 한 번 등장하고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큰 계획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 1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그 때에’란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습니까? 안디옥 교회가 구제의 후원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시기입니다. 바로 ‘그 때에’라는 것을 사용함으로 안디옥에서 일어난 이야기가 이제는 유대 지역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그 시기가 바로 헤롯 시대입니다. 헤롯하면(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분봉왕) 예수님 당시에 죽은 왕이 아닙니까?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헤롯은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를 말합니다. 그 헤롯이 무슨 일을 하는 것입니까? ‘손을 들어’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헤롯이 사도들을 죽이고자 하는 것은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분봉왕들은 교회의 핍박에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핍박은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했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특히 사마리아와 이방인 지역으로 퍼지는 것을 보면서 달라진 것입니다. ‘유대인만 하나님의 백성이다’라고 했던 그들이 이제는 이방인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막아야 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로마는 헤롯이 어떻게 하는지 관심이 많았을 것입니다. 로마의 평화를 지킬 수 있는 것은 각 지역을 담당하는 분봉왕의 역할이 크기 때문입니다. 헤롯은 자신이 정치를 잘 할 수 있도록 유대인의 관심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유대인의 마음을 사기 위해 아마도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야고보를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2절을 보시면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참으로 하나님의 섭리는 알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형제요 사도입니다. 야고보는 가장 먼저 죽고, 요한은 가장 마지막까지 남는 사도였습니다.(야고보서의 저자인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입니다.) 하여튼 사도 야고보는 칼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순수한 유대인이었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 참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야고보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급하고(녹 9:53-54) 이기적인 성격이었으므로(막 10:37) 예수님께서는 “우뢰의 아들”이라는(막3:17) 별명을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올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기 전 당신님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면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과 구원하여 줄 것을 믿으면서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요구를 합니다. 마20:21b절을 보시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그 잔을 받아먹은 사람은 아마도 야고보였을 것입니다. 결국 사도 중에 최초의 순교자가 된 것입니다.

 

헤롯이 사도 야고보를 죽이고 핍박하는 것을 보고 유대인들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3절을 보시면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야고보를 죽인 헤롯은 아주 기뻐했을 것입니다. 마치 독립 운동가를 죽인 마음과 같았을 것입니다. 유대교인들은 사도 야고보를 죽인 헤롯의 행동에 대해 기뻐했습니다. 헤롯은 유대인과 로마 황제로부터 환심을 사기 위해 야고보를 의도적으로 죽였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바로 ‘이 때다’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들은 야고보만 아니라 사도 베드로까지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헤롯은 자신이 한 행동에 고무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 중에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까지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에게 많은 환심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무교절”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여 주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 때에 누룩이 없는 빵을 먹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무교절이 중요하기 때문에 베드로를 당장 죽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를 죽이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어떻게 합니까? 4절을 보시면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헤롯과 같은 악한 왕이라도 절기에 처형을 하는 것은 유대인들로부터 좋지 않은 소문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감옥에 가둔 것입니다. 과거의 베드로라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친 것처럼 줄행랑을 쳐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알고 있는 베드로는 죽음을 각오하면서 투옥이 됩니다. 베드로를 감옥에 넣었지만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즉 한 팀당 네 명이 조를 이루도록 하여 지키도록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한 것은 아마도 교회가 베드로를 구출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기도하면서 폭동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헤롯은 무교절이 지나기만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는 무교절이라고 하고 여기서는 유월절이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유월절은 유월절과 무교절 절기를 합친 것을 의미합니다. 유월절은 애굽에 일어날 열 가지 재앙과 관련이 있습니다. 특히 애굽에서 처음 난 것​을 모두 죽이는 재앙​을 내리실 때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 주신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시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린양​이나 어린 염소​를 잡아 그 피​를 집​의 출입구​에 뿌리​라고 한 것을 아실 것입니다. 이런 것을 한 이스라엘 백성​의 집​은 죽이지 않고 넘어간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주신 것을 기념하도록 주신 절기이기도 합니다.

 

헤롯은 정치적 지지 기반을 로마와 유대인들로부터 확고히 하기 위해 베드로의 체포를 이용 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에 5절을 보시면 베드로와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고후10:4절에서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를 생각하면서 기도했던 것 같습니다. 유일한 무기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누가는 ‘간절히’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처럼 같다는 의미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막9:29절에서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던 것을 기억합니까? 초대교회를 세워가는 과정을 보면 늘 기도가 함께 있었습니다. 당연히 오늘날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복과 초자연적인 개입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고난 등이 오면 무조건 기도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초대교회는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를 했습니다. 누가는 오늘날 우리에게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에 대한 특권과 책임 등으로부터 힘이 된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 중에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초능력만을 기대하는 현실 도피적 신앙으로 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만들어낸 불법적 힘에 맞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하고 그것을 따른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밖에서는 교회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어떠했습니까? 6절을 보시면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아마도 헤롯은 무교절과 유월절이 지났기 때문에 정확히는 날짜를 알 수 없지만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그 전날 밤’은 어떤 분위기였겠습니까? 그래서 누가는 감옥에 있는 베드로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군사들이 완벽하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두 쇠사슬에 매여 있었고, 감시하는 군인도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탈출하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모습은 충격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이 밤이 지나면 형장의 이슬처럼 사라질 수 있는데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탈출을 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 나라만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누가는 베드로의 상황을 기록함으로 의도하고자 하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베드로를 구출시킨 하나님의 능력을 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누가는 베드로 구출 작전에 사도행전을 읽고 있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위해 7절을 어떻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까?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이 가까운 가운데도 어린아이와 같이 평온하게 잠자고 있는 베드로를 깨우셨습니다. 꿀잠과 같은 시간에 놀라운 하나님의 구출 작전이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말 개역개정에서는 첫 시작을 ‘홀연히’라고 번역을 했지만 좀 더 원어에 가깝게 번역하면 “보라”입니다. 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주목하고 관심을 가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독자들에게 이제 곧 일어날 일을 주목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있다는 것을 알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고 구출하시기로 개입하신 것입니다. 주의 사자인 천사가 나타남으로 옥중에 광채가 빛난 것입니다. 이 때 누가는 베드로를 지키던 자들에 대한 기록을 하지 않습니다. 언급을 하는 것은 18절에서 갑작스럽게 잠에 빠져 있다가 날이 샌 후 일어나보니 알았다는 것입니다. 군인이 잠들어 있을 때 환한 빛으로 주의 사자는 초자연적으로 개입을 했습니다.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일어나게 한 것입니다. 잠에서 깨어난 베드로의 손에서 쇠사슬이 풀어진 것입니다.

 

계속해서 8절을 보시면 “천사가 이르되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이르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마치 출애굽 사건을 연상하도록 하십니다. 또한 유월절 사건도 연상하도록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전날 밤’과 ‘급히 일어나라’ 그리고 ‘신을 신으라’ 마지막으로 ‘주께서 벗어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베드로 자신에게 있어서 개인적인 출애굽과 같은 유월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천사의 지시대로 따르면서도 지금 일어나는 일이 꿈인지 아닌지 알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9절을 보시면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행5:18-20절에서 옥에서 구출 받은 경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사건이 눈앞에 전개되고 있어도 베드로는 믿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환상을 보고 있는 것 같다고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야고보의 죽음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도 예수님과 같은 부활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평온하게 잠을 잘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지금의 모습을 환상으로 착각한 것 같습니다. 누가는 있는 그대로 기록함으로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헤롯으로부터 구출하시기 위하여 역사하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출애굽도 이스라엘이 스스로 구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것처럼 같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환상이라고 생각하는 가운데 10절을 보시면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시내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는지라 나와서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베드로는 아무런 감시도 없이 초소를 통과한 것입니다. 초소의 문은 마치 자동문처럼 열려 있었던 것입니다. 성으로 통하는 쇠문은 ‘거리로 통하는 철문’을 의미합니다. 문자적 인 의미로는 도시 또는 시내로 향한 의미이기도 합니다. 누가는 기록을 함으로 기적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다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 이 말은 헤롯이 베드로를 성 중에서 가장 튼튼한 감옥에 가두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감옥에서 나와 성중의 거리로 나왔을 때 주의 사자인 천사는 사라졌습니다. 천사를 생각하면 오직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임무를 다한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신자들도 천사와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천사가 떠나자마자 베드로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알게 됩니다. 11-12절을 보시면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입니다. 차가운 바람이 스치자 베드로는 정신이 들어 헤롯의 손과 유대인의 종교적 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실제 상황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당한 일의 의미를 깨닫기 전에 먼저 놀라운 사건이 환상인지 실제인지 인식해야 했습니다. 그 다음에 베드로는 자기가 왜 하나님에 의해 구출되어야 했는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베드로는 자신이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았습니다.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간 것입니다. 마가는 사도 바울과 1차 전도 여행을 같이 하다가 다른 길로 떠나 간 사람이기도 합니다. 또한 초대교회는 마가는 베드로와 동행을 했고, 마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누가는 구체적으로 기록을 합니다. 마가는 로마식 이름이고 요한은 유대식 이름입니다. 마치 바울이 로마식 이름이고 시울이 유대식 이름과 같은 것입니다. 베드로가 도착해 보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사용하는 기도라는 단어는 미완료 동사와 분사형이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이렇게 기록하는 것은 초대교회는 끊임없이 그리고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 신자들의 모습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를 거쳐 최초의 이방인 교회가 설립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세상은 교회를 그냥 두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박해는 오히려 교회를 부흥하도록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보시면 어떠합니까? 물질적인 풍요는 교회를 쇠퇴하도록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이제 편의주의자가 된 것입니다. 과거의 모습이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부럽기도 합니다. 초대교회에게 있어서 야고보의 죽음과 베드로의 투옥은 오직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택할 수 있는 것은 폭동이 아니라 가장 큰 무기인 기도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가장 무력한 방법같이 보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십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께 기도로 의존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약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기도를 한다고 모든 것을 다 들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장 견디기 어려울 때까지는 신자들의 유익을 위해 큰 손을펴시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고난 중에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결코 사람이 자기들의 기도로써 어떤 일이 성취되었다는 공로 의식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베드로 역시 같은 것입니다. 그가 한 일은 오직 환상처럼 느낀 것입니다. 주의 천사가 떠날 때 비로소 알게 댄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의 능력을 크게 체험할 수 있는 은혜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초대교회도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는 믿음과 기도의 중요성을 알게 된 것입니다.

 

헤롯이 아무리 군인을 동원하여 철통같이 베드로를 감옥에 가두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개입을 하시면 막아낼 도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유일하신 신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당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가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야고보의 죽음과 베드로의 구원 모두 다 이해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되는 대로 감옥에도 보내고 옥에서 끌어내기도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에게는 어느 순간이라도 무의미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옥에 갇혀 있는 일까지도 하나님께서는 섭리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일하시고 계십니다. 야고보의 죽음은 더욱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도록 하는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경험한 초대교회는 하나님의 뜻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지팡이교회도 “최초의 순교자 사도 야고보와 베드로의 투옥”을 통해 자신에 대한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를 소망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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