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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12:13-17
강설날짜 2019-03-24

베드로 구출에 대한 교회의 반응(행12:13-17)

 

저는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좋아합니다. 이번 주 재방송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 한다 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입니다. 이 말은 누가 한 말입니까? 스피노자입니다. 스피노자는 네덜란드 사람으로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난 철학자입니다. 집안도 좋은 가문이었습니다. 스피노자는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 받아 성공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학문도 잘 했기 때문에 철학자가 된 것 같습니다. 스피노자는 유대인이었지만 신을 부정함으로 유대교로부터 출교를 당하였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유대교는 철저한 신본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선민의식이 가득한 민족이기도합니다.

 

스피노자는 신이 없다고 부정을 하였지만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합니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일 죽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것입니다. 죽음보다 현재의 삶에 충실하겠다는 의미로 저는 해석을 합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우리는 내일 종말이 온다면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사과나무를 심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겠습니까? 당연히 복음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종말이 언제인지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마24:37절을 보시면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때를 소망하면서 삶의 예배로 영광을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가 신앙 생활할 수 있는 것을 기뻐하며 복음의 증인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세상의 복과 다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거짓이면 스피노자처럼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신이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삶으로 증거 해야 합니다. 이런 삶의 복을 누리는 우리는 “베드로 구출에 대한 교회의 반응”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말씀으로 자유 함을 누리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은 지난 주 강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주 강설을 다시 기억하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헤롯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로마의 분봉왕으로 헤롯의 손자인 아그립바 1세입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을 핍박 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교회가 이방인 지역으로 성장하는 것도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는 헤롯이 어떻게 하는지 관심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헤롯은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즉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죽이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았을 것입니다. 헤롯은 사도들 중에 야고보를 죽였던 것입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최초의 순교자가 되는 영광을 누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죽음을 “순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이해할 수 없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순교는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지만, 참된 신앙고백을 하는 우리들에게는 영광이기도 합니다. 순교는 내가 스스로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같은 민족인 야고보가 죽었지만 유대인들은 기뻐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인간의 죄악성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여 주신 후 시내산에서 “언약의 열 가지 말씀” 즉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 중에 “살인하지 말라”가 있습니다. 유대인이라면 반드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야고보의 죽음을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 모습을 알고 있는 헤롯은 이제는 베드로를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마침 그 때가 무교절 기간이라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군사들에게 감옥을 굳건하게 지키도록 했습니다. 헤롯은 자신의 정치적인 기반을 위해 이번에는 베드로를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하지만 무교절에 베드로를 죽이면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기다리고 있던 중입니다. 베드로가 옥중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예루살렘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큰 무기는 기도입니다. 교회가 의지한 것은 자신들의 육체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기도는 상상도 못할 놀라운 결과를 가지고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섭리로 개입하심으로 당신님이 누구신가를 드러낸 것입니다.

 

헤롯이 베드로를 죽이고자 한 날의 전날 밤입니다. 베드로는 처형을 아는지 모르는지 평온하게 잠을 자고 있던 중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주의 천사를 보내 베드로를 일어나도록 했습니다. 그런 후 쇠사슬이 손에서 풀어지도록 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이 환상을 보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인간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섭리로 구출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의 천사의 인도함을 받으면서 철통같이 닫혀져 있는 쇠문이 저절로 열려 통과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구출되자 주의 천사는 떠났습니다. 자신의 임무를 다한 후 자신의 능력을 자랑한 것이 아니라 사라진 것입니다. 베드로는 바로 그 때 구출을 당한 것을 안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출하신 것을 안 후 어디로 갔다고 했습니까? 아시겠지만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도착해 보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지난 주 강설에 이어 13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여자 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베드로는 하나님으로부터 감옥에서 구출함을 받은 후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도착하여 대문을 두드린 것입니다. 그 집은 여러 사람들이 베드로의 안전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던 장소 중 하나였습니다. 기도하던 중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로데’라는(장미라는 의미) 여자 아이는 누구인가를 생각하면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갈수록 목소리의 주인공은 베드로였던 것입니다. 14절을 보시면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입니다. 베드로가 자주 요한의 어머니 집에 왔기 때문에 여지 아이는 얼굴을 보지도 않고 목소리만 듣고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여자 아이라고 하지만 원어로는 여종을 뜻하는 것으로 문을 열어주는 여종이라는 여자 아이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소리의 주인공을 더 잘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베드로가 요한의 어머니 집에 자주 왔기 때문에 구출을 받은 후 여기로 온 것입니다. 그 가족들과 친밀한 관계 이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라는 것을 알면 여자 아이는 문을 열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자 아이는 베드로를 밖에 세워 둔 채 그가 왔다는 소식을 전하러 기도를 하고 있는 신자들에게 뛰어 간 것입니다. 너무 기뻐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쉽게 넘겨 버릴 수 있지만 원문을 좀 더 생각하면 의미가 있습니다. 로데라는 여자 아이는 너무 기뻐서 문 여는 것조차 잊고 달려가는 모습은 신비한 하나님의 능력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 기적적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베드로의 목소리를 알고 있는 여자 아이는 너무 기뻐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도를 하고 있던 신자들에게 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로부터 어떠한 소리를 듣습니까? 15절을 보시면 “그들이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여자 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신자들은 열심히 베드로의 안전을 위해 기도를 하고 있었지만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을 믿지 않고 기도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는 하고 있었지만 살아서 다시 돌아올 것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여자 아이는 베드로의 목소리가 틀림없다고 했을 것입니다. 신자들은 여자 아이에게 ‘미쳤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 아이는 ‘참말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 당시의 신자들의 반응과 오늘날 우리가 같은 모습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베드로를 구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해 왔지만, 너무나 놀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자 아이는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베드로가 대문 밖에 있다고 한 것입니다. 신자들은 여자 아이가 무엇을 보았다는 데까지 양보를 하면서 ‘그러면 그의 천사라’고 한 말한 것입니다. 왜 신자들은 주의 천사라고 한 것입니까? 참으로 흥미롭기도 합니다. 막연하게 천사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확실하게 베드로의 천사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당황스러울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생소한 것이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수호천사가 사람을 보호하여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문을 두드리고 있는 천사가 베드로와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일부 유대인들은 사람이 사망을 하면 수호천사가 나타난다고 생각했습니다. 야고보가 순교를 당한 것을 알기 때문에 베드로의 천사가 온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베드로의 안전을 위해 기도하였지만 이제는 그가 순교를 당해 하나님 나라에 갔고 그와 닮은 수호천사가 대문 밖에 서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자들은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16절을 보시면 어떻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까?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그들이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입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믿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새벽기도회이든지, 철야기도회이든 기도회가 많지만 어떠합니까? 그 당시나 오늘이나 도긴개긴입니다. 집안에서는 여자 아이가 미쳤다고 하는 가운데 베드로는 밖에서 대문을 계속 두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계속 두드리다보니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문이 열린 것입니다. 마침내 신자들은 밖으로 나가보니 베드로가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 시간에 베드로가 탈옥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수색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다시 잡힐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당황하고 있는 신자들에게 베드로는 17절에서 어떻게 합니까? “베드로가 그들에게 손짓하여 조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베드로는 자신을 찾고 있는 로마 군대가 알기 전에 신자들에게 손짓을 하여 조용하게 합니다. 그런 후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상세하게 말을 합니다. 상세하게 말한 베드로는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단순하게 읽는 것도 좋지만 여기서는 사도 야고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정확하게 누구인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야고보라는 이름이 각각 다르게 나오지만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으로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12사도는 아니었지만 예루살렘의 지도자로 있었습니다. 아마도 사도들의 대변인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야고보에게 알리라는 것입니다. 갈2:9a절을 보시면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를 생각하면 예루살렘 교회에 중요한 기둥 중에 한 분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야고보는 예루살렘 총회의 의장을 행15장에서 맡게 됩니다. 이처럼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였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예수살렘의 감독이(장로) 되었지만 주후 62년에 순교를 당합니다. 베드로는 마가 요한의 어머니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신을 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 성경은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또한 베드로의 행선지에 대한 언급도 하지 않지만, 헤롯이 사망한 후 행15장에서 다시 등장을 합니다. 그 이유는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있다는 것을 다시 증언한 것입니다.

 

오늘 지팡이교회에게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구출하여 주심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세상과 죽음으로부터 보호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의 구출은 특별한 경우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으로 구원을 얻음으로 영원한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부활하도록 하십니다. 사도 야고보는 순교를 당했지만, 아직 베드로는 할 일이 있기에 순교를 당하지 못하도록 구출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행15장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베드로의 안전을 위해 기도하는 것처럼 우리도 모이기를 힘쓰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히10:25절을 보시면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생활하던 당시보다 지금 더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더 모여야 하는 것이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일부 교회는 모여서 성령을 욕되게 하는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상명령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믿지 아니하도록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차라리 나의 주먹을 믿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초대교회를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시인함으로 당당하게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주님을 드러내며 전함으로 일사각오의 교회였습니다. 일사각오와 같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의 구출 사건 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구출사건이 실제 상황으로 이루어졌지만 신자들은 수호천사가 나타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믿음의 한계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기도한 대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어린 아이인 즉 로데의 믿음과 대조적이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은 신앙의 굳건한 뿌리를 내리지 못한 관념적인 믿음에 대한 일말의 경고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팡이교회는 기도에 대한 생각을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백성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권이요 무기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총과 막강한 권력 등을 믿지만 신자들에게는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를 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기도에 대한 응답을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자신을 위한 욕망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성도가 환난과 염려, 근심, 걱정 중에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을 얻고 고난과 걱정을 이길 수 있습니다.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신자들에게는 사랑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야고보는 순교를 당했고, 베드로도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보여 주신 부활을 소망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순교를 두려워하면 누가 예수님을 믿고자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진실한 사랑을 이제는 사도들이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야고보가 순교를 당하도록 하시고, 베드로를 통해 기도가 무엇인가를 다시 알도록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복음이 이방으로 뻗어가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가 더 든든하게 세워질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말 속담에 “비온 뒤 땅이 굳어진다”는 말처럼 초대교회는 더 강건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면서 참된 회심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에 그저 익숙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자신이 영혼을 붙들고 씨름하는 가운데 참된 구원이 무엇인지를 안 것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하던 베드로가 회심을 한 후 진정한 사도의 사역을 감당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보면 회심 없는 신앙생활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란 무엇인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교회를 모른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함으로 자신을 위한 열심만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베드로와 같은 회심을 함으로 옥중에 있든 어디에 있든 주님만 바라보는 길을 가는 지팡이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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