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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13:26-41
강설날짜 2019-04-28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FJKGB1N_bSQ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선교를(2).....(행13:26-41)

 

지팡이 교회는 카톨릭처럼 신앙공로 주의가 아닙니다. 공로 즉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신 백성은 자신의 공로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값없이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카톨릭은 행위를 중요하게 여김으로 자신의 신앙이 좋다고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회심보다 오히려 행위를 중요하게 생각함으로 성경의 말씀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배님들이 종교개혁을 한 것은 ‘성경으로 돌아가자’입니다. 성경의 말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자국의 언어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알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말씀이 사라진 어두운 중세에 순교를 각오하면서 ‘성경으로 돌아가자’라고 한 것입니다. 지팡이 교회도 성경을 잘 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목사만 잘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도 잘 가르칠 수 있도록 배워야 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면서 삶에서 정직과 인내와 사랑으로 음침한 골짜기라도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믿음을 주신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공로사상 아닌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증거 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난 주일은 부활주일이기 때문에 “부활에 참여하는 성찬식”을 강설했습니다. 원고는 홈페이지와 주보를 보시면 올려져 있습니다. 오늘은 두 주 전에 전한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선교를” 이어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의 말씀을 요약하겠습니다.

 

안디옥 교회로부터 파송을 받은 바나바와 바울은 구브로 섬에서 로마 총독과 지역에 복음을 전한 후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도착했을 때 어떤 문제가 발생했는지 기억하십니까?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동행을 했던 요한 누가가 고향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던 후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했습니다. 때마침 안식일이라 두 사람도 예배하고자 참석을 한 것입니다. 예배를 참석하고 있는 가운데 회당장이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 사도 바울에게 강설 즉 권고의 말씀을 해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얼어나 손짓하며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입니다. 주의 깊게 경청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열정적으로 전한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조상들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셨지만 그들은 광야에서 약 40년 동안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의 소행을 알면서도 참으셨던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도착한 후 하나님께서는 일곱 족속을 멸하도록 하고,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까지 450년이 걸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잘 알고 있는 역사를 통해 바울은 사사 시대와 사무엘을 언급합니다. 백성들이 왕을 달라고 하자 기스의 아들 사울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원한 왕을 하나님께서는 폐하시고 다윗왕을 주셨습니다. 사울은 사람들이 원하는 왕이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뜻을 다윗을 통해 다 이루도록 하시겠다고 한 것을 바울은 전한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을 이야기한 것은 구원의 메시야를 위한 것입니다. 다윗의 후손 즉 메시야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구주로 세우셨으니 그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께서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먼저 세례 요한을 보내심으로 회개의 세례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메시야가 누구신가를 전하였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하면서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연약한 인간은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주의 길을 가야 합니다.

 

두 주 전에 했던 강설이 기억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도 같은 주제로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강설합니다. 그러면서도 바울은 본격적으로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해 집중적으로 강설을 합니다. 강설 중에 본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에게 위임된 “구원의 말씀”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언약을 맺으신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사건을 26절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형제들아 아브라함의 후손과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입니다. 바울은 지난 주 강설을 통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더 구체적으로 구원의 역사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고 있다는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뚜렷한 구원사를 잘 들을 수 있도록 바울은 ‘형제들아’라고 호칭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형제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존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이라고 합니다.

 

왜 ‘구원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차분하게 한 절씩 보아야 합니다. 먼저 27절을 보시면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 관리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입니다. 불행하게도 구원의 말씀이신 분을 예루샐렘의 백성과 종교지도자들이 인정하지 않고 정죄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이면 성전과 회당에서 선지자의 글을 읽고 강설도 들었지만, 구원의 말씀이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알지 못한 결과는 결국 예수님의 불법적인 처형도 선지자들의 예언에서 이미 제시된 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셨다는 것을 바울이 강설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만 그렇게 전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도 행3:18절에서 동일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지자의 글을 바르게 이해함으로 예수님을 더 잘 알아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선지자의 글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예루살렘의 백성과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28절을 보시면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죄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방인의 손을(빌라도) 빌리어 죽여 달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예수님의 무죄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빌라도도 예수님의 무죄를 눅23:14-15절에서 언급을 합니다. 유대인인 너희들도 예수님이 무죄임을 알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29절을 통해 “성경에 그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대로 즉 예언이 성취되도록 하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캠밸 모간이라는 신학자는 여기서 은혜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모든 역행과 그분의(당신님의) 아들이 당할 거부를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세주를 어두운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랑을 받은 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즉 성도요 교회입니다.

 

이제 바울은 구원을 제시합니다. 구원의 획득과 구원 사역이 완성된 증거를 위해 30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지라”고 강설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완성을 위해 예수님을 부활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전한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부활하도록 하심으로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정죄하여 십자가에 죽인 것은 불법적이고 부당하다는 것을 보증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부활하도록 하심으로 성경의 말씀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진실한 말과 행동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주신대로 부활하신 몸으로 나타내시었습니다. 31절을 보시면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그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의 증인이라” 복음서는 특정한 인물을 말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불특정한 갈릴리 출신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 많은 사람에게 보이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여러 날’ 보이심으로 그들은 복음의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실제로 부활하신 것을 아는 제자들이 증인으로 사도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32절에서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라고 함으로 하나님께서 조상들과 약속하신 것을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너희에게 전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이 전하고 있는 강설이 이단적인 내용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사도 바울은 33절에서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고 전합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위해 시2:7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도다’라고 인용한 본문은 본래 이스라엘 사회에서 왕의 대관식때 사용되던 시입니다. 왕이 기름부음을 받을 때 그 왕이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나 하나님과 부자(父子)의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예수님에게 적용한 것은 특별하고 독특한 인용이 아닙니다. 사실 복음서에서도(막1:11, 녹3:22) 예수님께서 당신님을 메시야로서 성령의 능력을 받을 때 본문과 같은 내용을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왕의 대관식에서 많이 사용을 하였지만 유대인들은 메시야와 연관시켜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날을 소망하기 때문에 초대교회는 예수님께서 다윗의 가문에서 출생한 왕권적인 권리를 가진 메시야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세움을 받았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시편을 인용한 바울은 34절에서 이사야를 인용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이르시되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입니다. 사55:3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55장은 전체 맥락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약속한 영원한 언약은 다윗에게 베푸신 불변하는 사랑을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부활할 것이라는 구약적 근거를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다윗의 가문에서 부활하신 분이 누구인가를 다시 확인하여 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34절과 유사한 말씀인 시16:10절을 35절에서 인용합니다. “또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합니다. 구약적인 부활 사상을 다시 한번 언급하여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를 더욱 심도 있게 진술합니다. 34절과 35절은 22절과 23절에서 바울의 말과 연결지을 때 다윗에게 주신 부활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당신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계속해서 메시야를 기다리지 말고 이미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성취되었다는 것을 알도록 한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썩지 않을 자의 정체 즉 썩음을 당하지 않을 ‘주의 거룩한 자’의 정체를 밝히고 있습니다. 36절을 보시면 “또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다윗처럼 죽임을 당하고 썩음을 당했기에 거룩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죄 없는 자가 아니었지만, 대체로 하나님께 신실했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했습니다. 신실함은 모든 세대 즉 성도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썩음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약속을 받은 주의 거룩한 자는 누구입니까? 그것을 알기 위해 3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그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34-37절을 읽어보시면 ‘썩음을 당하다’라는 표현은 네 번 나옵니다. 그중에 한 번은 다윗이고, 나머지는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적용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썩음을 당하지 않는다’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강설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교 전통에 붙잡혀 있는 유대인들에게 다윗보다 예수님께서 위대함을 강설함으로 그들의 선입견이나 잘못된 의식을 바꾸고자 노력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에도 복음의 메시지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의 강설은 38절부터 41절에서 강설의 결론을 맺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멸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일러줄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메시지에 대한 결론을 전하지만, 스데반은 이런 기회도 없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기도 합니다. 바울이 전한 서신서와 사도행전의 메시지도 같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한 메시지와도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데서 죄 사함이 오며, 그것은 모세 율법으로는 불가능한 의롭다 함을 얻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성도는 ‘결백하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고자 했습니다. 율법은 죄 사함을 줄 수 있는 효력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됩니다. 바울은 칭의의 관점에서 죄 사함의 은혜가 무엇인가를 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오직 죄 사함의 은혜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초청과 경고를 전합니다. 선지자들은 부활을 약속했을 뿐 아니라 불신으로 멸망할 조롱자들이 있을 것도 예언했습니다. 바울은 그의 청중이 죄 사함과 의롭다 함을 가져오나 거부는 형벌을 가져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 합1:5절을 인용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여러 나라를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의 생전에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할 것이라 누가 너희에게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고 함으로 진실을 알라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전한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바벨론 군대를 일으켜 그들을 심판하신다는 내용입니다. 바울이 전한 하박국의 내용을 알기 때문에 과거의 역사가 잘 생각 났을 것입니다. 유다 백성이 이 예언을 믿지 않고 있다가 결국 멸망했던 역사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과거의 역사를 떠오르도록 함으로 구원의 메시지를 들어도 믿지 아니하는 자는 멸망을 한다는 것을 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성도님, 하나님의 용서는 철저할 뿐 아니라 영구하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영구하다는 것은 시간상으로 제한이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시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과거의 죄와 오늘의 죄뿐 아니라 나의 모든 결핍으로 말미암은 미래의 죄까지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르미안들”이 생각하는 방식은 “오늘까지의 죄만은 용서해 주겠지만, 앞으로의 죄는 네가 주의해라. 주의하지 않으면 너는 탈락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카톨릭처럼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칭의로 구원함을 얻은 성도는 계속 죄를 지어야 합니까? 죄 용서함을 받았으니 무슨 죄를 지어도 된다는 것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바울은 롬6:1-2절에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하면서 죄 용서함을 받았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전한 메시지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믿습니다. 그것을 믿기에 지팡이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증인 된 삶을 모이는 교회와 흩어진 교회로 경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전한 메시지를 통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역사가 얼마나 치밀하게 이루어져 가고 있는가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구원의 사건은 결국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바울이 결론적으로 전한 것처럼 죄에서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예수님을 믿게 하심으로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것도 값없이 받은 것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고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혈통으로 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탄생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으로 지음을 받은 자가 바로 성도 즉 교회입니다.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선교를 한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심으로 구원을 이루셨다는 것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26절에서 ‘형제들아’라고 함으로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위해 주의를 환기시키고, 38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라고 함으로 다시 말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40절에서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고 함으로 경고를 맺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바울의 경고를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자신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바울은 죄 사함을 강설하며 생명과 죽음 중 한쪽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이 말씀을 깊이 인식하면서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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