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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15:6-12
강설날짜 2019-06-09

예루살렘 공회의 소집(행15:6-12)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주님의 교회라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예배당 이름을 주님의 교회(당)이라고 사용하기도 합니다. 주님의 교회라고 할 때는 당연히 건강한 교회요 순결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제자요 사도임을 아실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배운 말씀을 가지고 이렇게 전합니다. 벧전1:16절을 보시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함을 받은 교회요 성도인 우리는 죄로부터 거룩하여진 백성입니다. 주님께서 거룩하니 백성인 우리도 거룩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일부 교회는 맘몬에 빠져 노예가 되어가는 모습을 보면 애처롭기도 합니다. 큰 교회만 아니라 작은 교회도 메가처치의 노예가 되어가는 현실입니다. 주님의 교회라고 말을 하면서도 세상의 욕망에 사로잡혀 맘몬적인 성공을 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사도행전을 강설로 듣고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이든, 사도 바울이든, 바나바 그리고 신자들은 메가처치의 교회가 아니라 복음으로 사람을 구원하는데 열심을 내었습니다. 교회가 크다고 해서 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참된 신앙으로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에서 빛과 등불과 같은 상징이 있는 것이고, 힘을 낼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자인 존 칼빈은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교회의 탁월함은 교인 수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게 아니라 순결함에 있다.”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니 교회는 주님을 의지할 때 순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많고 적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순결함이 있어야 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세상의 야망을 좇는 성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숨 쉬며, 성령을 의지하며 서로 격려하며 면류관을 향해 전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을 위해 복음을 증거한 후 자신들을 파송한 안디옥 교회에서 휴식하고 있었습니다. 안식년을 보내고 있는 가운데 유대로부터 어떤 형제들이 안디옥에 온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대교적 전통을 고수하고자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전통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개종을 해도 할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할례를 주신 목적을 몰랐던 것입니다. 할례는 히브리어로 “브릿트”로 계약(언약)이란 뜻입니다. 즉 “언약의(계약) 할례”입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언약의 표시로 이스라엘 백성의 몸에 새겨진 흔적이었습니다. 할례는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라"는 상징이 있는 것입니다. 할례를 통해 자신들의 모습을 보면서 늘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있어서 할례만 하면 구원을 얻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될지라도 할례를 해야 구원을 얻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예루살렘으로부터 내려온 그들은 안디옥 교회에서 다툼과 변론을 함으로 교회의 근간을 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의 할례보다 마음의 할례가 더 중요한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할례를 통해 즉 외적인 증거를 주심으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들도 거룩하고, 순결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가 이웃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증명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몰랐던 것입니다. 이방인이 예수님을 믿어도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전통이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을 무너뜨리는 힘이 되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회의가 열리도록 인도하심으로 당신님의 사역을 하시고 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교회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도전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일어난 최초의 위기는 예루살렘 공회의가 열리도록 하는 발의안이 되었습니다. 발의안이 될 수 있도록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에게 보내었습니다. 중대한 문제가 잘 해결될 수 있도록 공의회가 열리도록 한 것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는 말씀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도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이러한 일을 예루살렘 형제들에게 이야기함으로 다 같이 기뻐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 그리고 장로들로부터 영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바리새파 중에 즉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사람들이 일어나 말을 합니다. 1절에서는 할례를 말하였는데, 이제는 율법을 더 추가한 것 같습니다. 이방인들이 개종을 해도 할례와 율법을 지키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변화보다 외적인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이방인에게 당신님의 복음이 확장될 수 있도록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리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데 아주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루살렘 공의회 소집”을 통해 은혜를 누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이 회의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7-12절)와 회의를 이끌어가는 야고보의 연설만(13-22절) 기록 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요약된 형태로 기록을 하지만, 그 회의의 결론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6절을 보시면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인 사도와 장로들만 참여한 것입니까? 언제나 늘 전후 맥락을 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공의회의 구성원이었기 때문에 대표적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하지만 22절을 보시면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라고 기록을 합니다. 공의회에 온 교회가 즉 모든 신자가 참여했습니다. 그 회의에 온 교회가 참여했으며, 회의 결정에 동의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회의는 기독교가 출범한 후 최초의 공의회였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총회 회의, 공동의회, 노회 등의 모범이 무엇인가를 알려 주는 귀한 본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자 유대인들이 그동안 매우 자랑스럽게 지켜 왔던 선민의식에 큰 타격을 받게 되면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될 수 있도록 한 하나님의 신의 한 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역사에서 예루살렘 회의는 신학적이요 구원의 문제였습니다. 회의에서는 많은 토론과 변론 그리고 다툼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간략하게 7절 첫 부분에 기록합니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즉 할례와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편과 그것에 대해 반대하는 편의 주장이 서로 팽팽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서로의 논쟁이 진전을 보이지 못하는 가운데 베드로가 연설하기 시작합니다. 베드로는 처음부터 개입한 것이 아니라 서로가 의논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무게와 역할을 사도행전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회의는 더욱 치열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 베드로가 주도적인 결론을 위해 연설을 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베드로는 어부 출신이었고, 남들이 말하기 전에 먼저 말하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툼과 변론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도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성숙 된 모습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첫 연설을 어떻게 시작하고 있습니까?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베드로가 과거 이방인 고넬료 가정에서 복음을 전했던 일을 기억나도록 합니다. 베드로가 최초의 이방인에게 전한 이야기를 함으로 예루살렘 교회만 아니라 이방인도 잘 알고 있는 주제를 선택한 것입니다. 모두에게 상기시킴으로 다툼과 변론을 중재하고 있습니다. 그 회의장 의장은 야고보였습니다. 베드로가 사도의 대표성으로 회의를 이끌어갈 수 있었지만, 회원으로서 연설한 것입니다. 과거에 베드로는 할례를 받은 형제들과 함께 고넬료의 집에 갔습니다. 그로 인하여 논란이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을 비롯하여 일의 경과를 모두에게 자세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결과임을 인정을 했습니다. 바로 그것을 베드로는 연설로 가지고 온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방인을 구원시키는 자신의 일이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임을 밝힘으로써 이방인 선교에 대해 정당성을 먼저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복음을 믿도록 하나님께서 자신을 택하셨다고 함으로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을 지지합니다.

 

복음은 고넬료가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참된 마음으로 믿을 때 성령을 주었다는 것을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복음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구별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신자들이 받는 것입니다. 내가 어떠한 행위를 해야 즉 선행을 통해 구원을 획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8절에서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라고 합니다. 왜 베드로는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공회에 모인 그 누구보다 정확하게 아시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이방인에게 주심으로 그들도 구원을 얻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이 할례를 받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값없이 선물로 주어진 복음을 믿음으로 주언진 것임을 알도록 한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이든, 이방이이든 모두다 동등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고넬료를 통해 배타적인 생각에서 베드로의 마음을 돌이키도록 한 이유는 바로 예루살렘 공의회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중요한 것은 외적인 할례와 율법의 준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믿음으로 깨끗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9절에서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오직 믿음만이,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입니다. 장로들의 유전이나, 민족적인 우월성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이방인 선교에 대해 확증을 함으로 너희들을 되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이방인 신자들에게 멍에를 지지 말도록 하는 연설을 한 것입니다. 10절을 보시면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입니다. 믿음은 육체적인 할례와 율법의 완전한 준수가 아닙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순종입니다. 외적인 화려한 옷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고넬료의 가정을 통해 보여주셨는데도 너희들이 외적인 것을 중요시 한다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우리 조상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라고 함으로 너희들의 주장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감당하여 주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자유함을 주었습니다. 너희들도 완전히 준수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바리새파 중에 기독교로 개종한 너희들도 완전히 준수하지 못하면서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배웠기 때문에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제39문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본분이 무엇입니까?”입니다. 솔로몬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전12:13절에서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기억이 떠오르십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본분은 그의 나타내 보이신 뜻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그리스도인의 순종은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는“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지도 아니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너희들이 할례를 주장하는 것은 이방인에 대해 배려를 하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베드로는 이방인들도 같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에 대한 부정은 결국 자신과 하나님의 사역을 부정하는 것입니다.이제 베드로는 11절을 통해 자신의 연설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입니다. 누구나 하나님으로부터 같은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구원은 오직 예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복음과 말씀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복음과 말씀을 전해도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맘몬처치를 향하는 것이 멍에를 매도록 하는 것이고, 결국 사망입니다. 베드로는 바울과 같은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을 전함으로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구원함을 받은 신자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대로 생활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야 합니다. 자신이 노력해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베드로의 연설은 공회에 참여한 신자들에게 다툼과 변론이 없도록 했습니다. 이방인들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문제’라는 인식을 하도록 했습니다. 12절을 보시면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바울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통해 이방인에게 행하신 일들을 이야기했습니다. 최종적인 결론에 들어가기 전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선교를 위해 행하신 사역을 보고한 것입니다. 교회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자신들의 선교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인 성도님, 안디옥 교회의 요청으로 예루살렘 공회의가 열릴 수 있도록 발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 이방인이 할례를 받는 문제에 대한 변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방인의 할례는 전체 교회의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장차 이방인 선교와 교회가 세워질 때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찬성과 반대측이 서로 치열한 논쟁과 변론을 한 후, 바로 그때 베드로가 연설한 내용을 아실 것입니다. 베드로가 연설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 중에 할례와 율법을 통해 구원이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 구원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해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을 베드로는 멍에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멍에라고 하면 쉽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밭을 가는 쟁기를 끌도록 소나 다른 짐승을 함께 묶는 농기구입니다. 이 멍에는 주로 구원을 빙해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멍에를 가지고 있는지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신 멍에는 예수님을 믿는 헌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생활을 할 때 복음의 핵심과 관계없는 신앙 습관을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왜 입니까? 오늘 본문 11절을 강설로 들어서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입니다. 베드로의 말과 우리의 마음은 같아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공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은 메시야이신 예수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할례와 율법 준수를 통해 부가적인 조건을 주장한 것입니다. 이것이 필요했다면 예수님께서 성경을 통해 가르쳐 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이단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다른 유사한 복음은 참으로 가증한 것입니다. 잘못된 가르침이 있는 시대에 지팡이 교회는 더 든든히 세워갈 수 있도록 봉사의 섬김이 있어야 하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은 성도라는 것을 늘 인식하면서 믿음과 삶이 언제나 같기를 소망하면서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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