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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17:22-34
강설날짜 2019-09-01

아레오바고에서 연설한 후의 상황(행17:22-34)

 

매스컴을 보면 금수저, 흙수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봅니다. 세상은 사람들을 그렇게 구별을 하지만, 교회는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고난과 십자가를 지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금수저, 흙수저 구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것처럼 오늘날 교회도 같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주님이 누구신가를 알기 위해 온 사람들에게 성경 말씀을 풀어서 온전하게 전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에서만 공개적으로 해야 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초대교회가 했던 것처럼 삶의 생활에서도 주님의 부활을 증거 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팡이 교회는 주님의 백성으로서 진리를 전해야 하는 사명 즉 지상명령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 없는 교회는 진리의 말씀을 팔아 축복을 산 일부 교회가 있습니다. 부와 번영의 쓰레기와 같은 복음을 더 좋아하는 현실입니다. 무엇이 좋은 강설(설교)인지 모르는 시대에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적인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부와 번영을 좋아합니다. 예배하는 것은 좋아하지만, 십자가를 지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까? 그 반대입니까? 성경의 말씀을 온전하게 전하기 아니하면 신자들을 맘몬주의와 이웃에 대한 착취 즉 나를 위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언약의 열 가지 말씀” 즉 십계명을 어길 수 있습니다. 사람을 위한 강설, 교회 성장만을 위해 쇼를 하는 것은 사람을 위한 호소 즉 세상 사람들이 하는 연설과 같은 것입니다. 강설과 설교는 분명하게 다른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지팡이 교회가 나아가야 하는 복음은 분명한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을 듣는 성도님에게 주님의 위로와 평안함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는 “아레오바고에서 연설한 후의 상황”을 강설로 듣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 언제나 지팡이 교회가 해 왔던 지난주 강설을 요약하여 되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 여행을 하면서 어느 지역이든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증거 했습니다. 하지만 아레오바고의 연설은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수많은 우상을 만들어 신을 섬기고자 했던 그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전했습니다. 그러면 고난과 부활이 들어가야 했지만, 하나님이 누구신가만 전했습니다. 너희들이 섬기는 것은 모두 우상이고, 참신은 하나님만 있다고 연설한 것입니다. 학문과 철학의 도시에서 담대함으로 전한 것입니다.

 

아레오바고는 우상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범사에 종교심”이 있었습니다. 우상으로 자신들이 잘 살 것으로 생각했지만, 결국 자신들을 영원한 지옥으로 가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아덴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 열심이었습니다. 그것을 이용해 참신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도록 하고자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누구하고 했습니까?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라고 했습니다. 간략한 것 같지만 아주 깊고 의미심장한 선언입니다. 아덴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신’을 만들어 힘을 다해 섬기었습니다. 우상은 사람의 손으로 돌봄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손과 마음으로 섬김과 보살핌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주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만물을 통치하시고 보호하십니다. 그러면서 타락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도록 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니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너희들에게 있으니 찾으라는 것입니다. 지팡이 교회도 강설을 들음으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아레오바고에서 연설하는 바울을 통해 아덴 사람들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분자가 사람을 만들어 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님을 힘입어 살며 행동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없이는 사람이 생존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종교심이 많은 그들에게 정확한 메시지로 연설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레오바고의 연설에서 마지막으로 한 것은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사도 바울처럼 회개하라고 해야 합니다. 너희들은 그동안 알지 못하는 신들까지 섬겼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영원한 형벌을 벗어날 수 없으니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아레오바고에 울려 퍼진 바울의 연설은 의미심장했습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우상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갑자기 아레오바고에서 연설로 다룬 익숙한 영역을 떠나 학문과 철학 예술 등으로 유명한 도시에서 낯선 이야기를 합니다. 그들이 돌이킬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를 소개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소개하다가 돌연 예수님을 소개한 것입니다. 31절을 보시면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예수님이라는 이름은 없지만,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이야기를 함으로 심판과 부활을 알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으로 마지막 날에 심판을 작정하셨습니다. 그것을 알 수 있도록 예수님을 부활시켰으니 당신들은 나의 연설을 듣고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바울의 설교의 핵심은 십자가였습니다. 하지만 아레오바고에서 저한 핵심은 하나님이었습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성경을 인용하지 않고 십자가에 대해 연설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환경과 상황에 따라 헬라 문화의 심장부에서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아더 글래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은 종교적 제도나 철학적 체게와 싸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는 심령이 굶주린 자, 더듬어 찾는 자들, 소경과 같이 그들의 소경됨을 고백하며 문빗장을 더듬어 찾으려 하는 자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단과 그것의 비문은 바울에게 우상 숭배의 궁극적인 괴괴를 드러냈으나, 그것은 그가 모든 아테네에서 발견할 수 잇는 유일하게 희망찬 표시였다. 그것을 붙잡음에 있어, 그는 인간의 보편적인 종교적 의식과 인간의 보편적 윤리적 관심의 확실성을 수용했다. 오늘날 그가 우리 가운데 있다면, 그는 말한 것이다. 불교도에게, 회교도에게, 힌두교에게가 아니라 사람에게 전하라. 곤궁의 비극에 처한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라, 당신은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것이다.”였습니다. 에덴 사람들은 철학과 문학으로는 아주 유명했지만, 하나님에 대한 것은 아주 빈약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통해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소개함으로 돌이킬 기회를 준 것입니다. 오늘나 우리에게도 같은 기회가 있습니다. 이 기회를 저버리면 영원한 심판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심판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천국입니다. 같은 세상에서 생활하지만, 신자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하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주님이십니까? 세상을 사랑하시겠습니까?

 

아레오바고에서 바울의 연설을 들었던 아덴 사람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였습니까? 32절을 보시면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입니다. 아덴 사람들은 하나님에는 관심이 있었던 있었지만, 방루이 전한 부활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연설을 그만두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을 조롱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의 말을 다시 듣겠다는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조롱을 한 사람들에게 부활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사후 세계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은 육체를 속되고 악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그들의 생각에 동의하십니까? 그렇다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시인 에스킬 루스(주전 525-456)는 과거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일단 죽으면 티끌이 인간의 피를 빨아들이며 결코 부활은 없으리라”고 했던 글처럼 아덴 사람들은 부활을 믿지 않고 바울은 조롱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들 중에 일부는 바울의 말을 다시 듣도록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통해 회개의 말씀이 강설되고 있습니다. 또한, 복음의 증인 자를 통해 삶으로 전도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부를 하고 있다면 참으로 불행한 것입니다. 돌이킬 기회에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할 수 있는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 후 33절을 보시면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즉 연설하던 아레오바고에 나온 것입니다. 바울은 더는 그 장소에 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더 연설하면 오히려 어려운 상황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복음의 메시지를 전함으로 어려운 상황에 부닥칠 수 있었지만,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메시지는 일부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었습니다. 그 희망은 주님을 믿고 구원을 얻고자 한 것입니다. 34절을 보시면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복음의 메시지는 ‘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죄를 깨닫고 회개한 것입니다. 아레오박에서 전한 메시지는 일부 사람들이 구원 얻도록 함으로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갈 수 있는 기틀을 만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신자들은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복음을 증거 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전9:9-23절에서 아덴에서 바울이 사역을 했던 것을 실패로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숫자가 중요하지만, 하나님은 아닙니다. 바울의 연설을 듣고 믿었던 사람 중에 ‘디오누시오’는 유세비우스에 의해 기록된 것이 있습니다. “아테네의 초대 감독이었다고 말합니다. 그의 죽음에 대해 서는 여러 설이 있다. 한 구전에 의하면 그는 도미티안(Dornitian) 치하 때 아테네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다른 구전에 의하면 그는 로마로 갔다가 클레멘스(demens) 1세에 의해 파리로보내졌으며,파리의 순교자 산(몽마르트)에서 참수당했다고 한다.”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위해한 힘이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 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구원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것이 믿음이며 교회가 가지고 있는 희망입니다.

 

아덴 사람들은 범사에 종교심이 풍부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도 모르는 우상을 만들어 섬기었던 것입니다. 타락한 이성으로 하나님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복음을 들어야 알 수 있습니다. 때마침 바울이 그들에게 전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어떠한 반응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전하면서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이렇게 했던 이유는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라는 것은 돌이키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부활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에 의해 계획되고 이루어진 구속사가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전한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일부 교회는 맘몸주의와 세상의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바울이 전한 것을 전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자신의 본문을 상실하면 이러첢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을 상실하면 부활이 없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는 것은 결국 영원한 죽음입니다. 사망하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형벌을 당하는 지옥입니다. 그곳에서 영원한 고통의 죽음을 계속 당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복음을 바르게 전하지 않고, 복음의 핵심에서 벗어난 설교자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자신을 위한 설교는 자신만 영원한 형벌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당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전하는 봉사자는 조심해야 합니다. 바울이 전한 아덴 사람들만 우상을 잘 섬기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을 보면 자신을 위한 우상을 섬기는 분들도 있습니다. 여전히 우상을 섬기는 시대입니다. 아덴 사람들처럼 학문과 지식 그리고 예술이 발달하여 있는 시대에 있습니다. 그런 시대라도 바울처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바울이 사람들에게 논리적으로 연설한 것처럼, 교회도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은 내가 잘 해서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식과 하나님의 지식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전도 사역자는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 증거 하는 것입니다. 나의 지식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하기 때문에 자랑할 수 없습니다.

 

바울의 연설이 아덴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받아 그가 의도한 연설이 중단되었다고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바울과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의 연설을 통해 우리는 기독교의 모든 진리가 매우 간략하게 요약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방인들을 위해 완벽하게 구성된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은 누구신가를 통해 부활이 있다는 것을 증거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무지한 채로 범하는 죄를 허물치 아니하셨으나 이제 예수를 세상에 보내시고 구속 사 역을 완성하신 이후에는 계속해서 회개하라고 촉구하십니다. 왜냐하면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그리스도의 흘리신 보혈의 공로로 그를 용서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누구나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그 일을 지팡이 교회가 잘 감당하기를 소망하면서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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